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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유래와 언어의 회복

새벽지기1 2019. 3. 27. 12:55


방언의 유래와 언어의 회복

 

방언을 말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방언의 대상은 불신자다. 하나님이 방언으로 해야 알아듣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한 것이며 방언의 용도도 오해하는 것이다. 방언을 하나님께 하는 영의 언어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과연 그런가?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마저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다. 그런 분에게 '영의 언어'로 해야만 알아들으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지나치게 오해하는 것이다.

 

각 방언은 저주의 표적이다.

원래 인간은 언어가 하나였다. 모든 인간이 한뜻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 할 수 있도록 언어가 하나였다. 그러나 죄인들은 한뜻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기위해 바벨탑을 쌓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사악함을 보시고 언어를 흩으셨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되고 흩어져서 다른 민족이 되고 각 방언이 생긴 것이다. 결국 방언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저주로 흩어져서 생긴 산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흩으시고 시간이 흐른 후 때가 차 매, 메시아인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죄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려 십자가를 지셨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로 흩어져 각 방언을 하게 된 죄인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흩어짐을 면하고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즉, 복음으로 모두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현현이요, 충만이다. 말씀은 복음이며 언어다.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복된 말씀으로 하나 되게 하시려고 말씀으로 오셨다. 각 방언을 쓰는 죄인들도 예수를 영접하면 저주에서 벗어나 말씀이신 예수로 하나가 되며 한 가지 언어인 복음으로 회복되어 흩어짐을 면하고 한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그래서 각 방언을 하는 자들도 이제는 한 언어인 말씀(예수)으로 회복되고 하나 되어 하나님을 찬양한다. 각 방언의 저주에서 벗어나 흩어짐을 면하고 예수 안에서 회복된 것이다.

 

뜻 모를 방언에 대해 제일 먼저 들고 나오는 구절이 예수님의 말씀인 막16:17절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이 구절에 나오는 새 방언은 뜻 모르고 주절대는 방언이 아니고 복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말씀인 "새 방언"은 주절대는 마귀방언을 말씀하신 게 결코 아니다. 새 방언이란 새로운 언어를 말씀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죄인들은 입으로 죄만 지었다. 죄인들이 하는 모든 언어는 죄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입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는 새로운 언어인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새 언어이며 새 방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새 방언은 뜻 모를 방언이 아니라 복음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은 언어이며 각 나라 말이다.

왜 방언을 주셨을까? 성경을 보면 사도들조차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이 강했고 성경도 유대인만의 것이고 하나님도 유대인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장벽을 깨뜨리는 것이 방언의 은사로 나타났다. 한 번도 배운 일이 없는 이방인의 언어인 방언이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무려 16개국(행2:8-11)의 각 나라 방언을 체험한 사도들은 그제 서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도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다.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을 말함을 들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행2:11). 이로 인해 삼천 명이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행2:41). 또 베드로에게 복음을 들은 이방인이 자기나라 말로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행10:46).

 

이처럼 방언은 알아듣는 것이다. 그런데 알아듣지 못하는 뜻 없는 방언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는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어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오히려 개구리 울음소리 같은 방언을 들으면 복음전도는커녕 기겁하고 도망가지 않겠는가? 이로 보건대 뜻 모를 방언을 성령이 주셨다고 믿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현대의 방언을 하는 분들에게 일어나는 입이 돌아가고 혀가 꼬이는 현상이 사도들에게 일어났다고 성경은 증거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바울이 방언을 권장했는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고린도는 우상숭배가 극심한 무역도시이며 항구도시이다.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도덕적으로도 매우 타락하여 심지어 아버지의 첩과도 동침한 사람이 바울이 개척한 교회에 있기도 했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무질서하게 사용하고, 성찬을 남용하며 방언의 은사를 주신 이유도 알지 못하고 방언으로 시끄럽게 기도하며 방언을 남발하고 은사가 같은 자들끼리 서로 편을 가르고 서로 분쟁하였다(고전11:18-19).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편지로 그들을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며 성령의 은사는 위아래가 없이 다 똑 같다고 가르치며(고전12:8-30), 성령의 은사들을 질서 있게 사용 할 것을 권면하고 성령의 은사보다 십자가 사랑을 깨닫는 것이 제일이라고 그들을 가르쳤다. 즉, 무질서한 고린도교회를 방언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로 이끌어가는 편지가 고린도전서다. 바울이 편지를 통하여 무엇을 강조했는지, 또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자.

 

바울은 은사에 매달리는 교인들에게 모든 성령의 은사보다 가장 귀한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다(고전12;31-13:13). 바울이 말하는 사랑이란 인간의 일시적이며 얄팍하고 감정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면 이 사랑을 깨닫는 것이 온전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고전13:10).

 

이 사랑을 깨달으면 예언도 그치고 방언도 그치고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한다고 말한다(고전13:8). 이 사랑이 없으면 모든 은사나 지식이나 헌신이나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고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한다(고전13;1-3). 이 사랑을 깨달으면 그동안의 모든 일이 어린아이의 일이였음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고전13:11). 이 사랑 안에 깊이 잠겨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면 예수의 얼굴을 마주보듯 온전히 알게 된다고 한다(고전13:12).

 

이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이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통 속에 죽어간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는 것이 지식이 아닌 완전한 복음을 깨닫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에게 모든 은사보다 이 사랑의 은사를 구하라고 말하고 있다(고전12:31). 모든 성령의 은사는 이 사랑의 복음을 가르쳐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는 방언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완전한 복음을 가르치는 책이다.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는 것이며 불신자에게 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고전14:22). 방언의 은사란 불신자에게 그 사람이 난 곳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것이다(행2;8). 하나님께 방언을 하는 분들은 하나님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전도의 대상일까? 고전 14장은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통역하지 않는 방언(외국어)을 남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책망하는 구절로 차있다.

 

이처럼 거듭거듭 해서 방언을 자랑하고 남발하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 어찌 방언을 권장하는 것이겠는가? 바울은 방언을 자랑하며 남발하는 교인들에게 "너희보다 내가 더 방언을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뜻 모를 방언을 여러 가지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사도바울에게 여러 나라의 방언을 할 수 있도록 하셨다. 사도바울은 여러 방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교인들에게 방언의 자랑을 멈추라는 것이다(고전14;18).


또 방언을 장려하는 구절이 "방언을 금하지 말라"는 구절이다. 이것은 방언의 남발을 꾸짖은 바울은 이로 말미암아 방언의 은사가 위축되어 타국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지 않게 될 것을 우려하여 방언을 금하지는 말라고 하였다(고전14:39).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고전14장 2, 4, 14, 15절을 근거로 바울이 방언을 권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위 구절이 방언을 장려한 구절이라면, 지금까지 방언을 남발한 교인들을 책망한 바울을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이 심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바울이 누구인가? 로마서를 통해 정통기독교 교리를 반듯하게 세운사람이다. 또 성령에 사로잡혀 복음을 전한 사람이다. 오직 복음에 역점을 둔 바울이 뜻 모를 방언을 권장했겠는가? 바울이 오늘날 복음과 관계없는 뜻 모를 방언을 하는 교인들을 본다면 아마도 꾸짖고 책망하지 않았을까?

 

"믿는 자들 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16:17).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니"(고전14:21-22).

 

모든 책들이 마찬가지이지만 성경책을 해석할 때는 전체적인 문맥에서 그 뜻을 알려고 해야 한다. 인용한 고린도전서 14장 22절만 딱 떼어서 놓고 보면 마치 마가복음 16장의 말씀과 배치되는 말씀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글을 문맥에서 독해하지 않고 그 구절만 보기 때문에 생긴 오류다. 14장 21절을 보면,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이때에 율법에 기록된 바 라는 말씀은 이사야 28:11,12 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지 않자 다른 방언을 하는 민족 곧 앗수르 민족을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벌하실 것을 말씀하는 구절이다. 그러므로 인용한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의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라는 구절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던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방언을 하는 앗수르 민족에 의해 벌을 받았듯이,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은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적이다. 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그 구절을 이해할 때 먼저 이사야서28장에 기록된 상황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사야 28장은 이사야 선지자가 당시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이사야를 비웃고 조롱하는 장면(사28:9)이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른 방언을 하는 앗수르 민족을 들어 너희를 비웃고 벌하시겠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다른 방언을 하는 앗수르 민족이 선지자의 가르침을 받지 않던 이스라엘에게 표징이 되었듯이 믿는 자에게 따르는 방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표적이 될 것이다 문맥적으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이 예언의 말씀은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믿는 자에게 따르는 방언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멸망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21~22절이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율법에 능통했던 바울이 방언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바울은 이사야서에서 다른 방언을 하는 앗수르 민족의 침입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그 이야기를 예로 든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 그 뒤에 나오는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로 든 것일 것이다. 비유하자면, 다른 방언을 하는 앗수르 민족이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듯이, 믿는 자에게 따르는 방언이 마치 그 앗수르 민족의 방언과 같이 하나의 표징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더 한 단계 나아가면 그러니 예수를 믿어야 된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또는 성경구절과 같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다 그렇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