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다!
(롬1:16-17-이신득의(以信得義) 원리)
▶본문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해석과 설명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원문에는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가르’로 본절이 시작된다.
즉 앞절에서 밝힌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도 복음을 전햐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는 표현의 의미는
아마도 주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말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전승(막8:38, 눅9:26)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하다.(Barmby) 또한 당시 법체계와 지중해를 호령하는 정치적 권력을 자랑하는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한다고 할지라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변방의 식민지에 불과한 유대 지역에서 시작된 비천한 듯한 출발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Alford) 즉 지혜로운 자들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로마인들은 복음을 미련한 것이라고 조롱하였디만(고전1:23) 바울은 그 복음이 가진 구원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음으로 이를 과감하게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원문에는 이 문장의 서두에도 ‘가르(왜냐하면)’라는 접속사가 등장한다.
즉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한편 본 구절에는 복음의 본질이 소상하게 담겨져 있다.
①복음의 근본적인 동인(動因)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②복음은 <믿음을 요구>한다.
③복음을 <믿는 결과>는 구원이다.
*이것을 이신득의(以信得義) 또는 이신칭의(以信稱)義) 원리(교리)라고 한다.
④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열려있다.
당시 로마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로마식민지의 치안을 유지했다. 이른바 ‘팍스로마(Pax Romana)’였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이 그 어떤 힘과 능력보다 우월함을 입증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능력있는 복음을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기서 ‘헬라인’이란 14절에 나오는 ‘야만인’과 대조적인 개념이 아니라 ‘유대인’과 대조되는 ‘모든 이방인’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다만 이 서신을 받는 수신자가 유대인 크리스찬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주신 이유를 밝히고 이방에도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즉 ‘너희도 (나처럼)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롬1:6)들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여기서 ‘하나님의 의(디카이 오쉬네 데우)’라는 단어는 로마서의 핵심어다.
‘하나님의 의’란 처벌할 수 있는 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법정적(forensic-법정에서 변론하는 것)인 개념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의’는 구약성경이 그 배경이 됨으로,
헬라 문화권에서 사용되었던 ‘의(義)’와는 완전히 다르다.
법정적 관점에서 용어 설명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란 단순히 죄와 멀어진 상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택하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능력과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다.(사56: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
신약에서는 죄의 세력을 멸하시고 인간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구원의 주체되시는 하나님의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은 하나님 자신의 의이기도 하며, 동시에 하나님께 속한 의로움에 근거하여 죄인들을 의롭다하시는 칭의(justfication-정당화, 변호, 변명, 핑계)의 개념도 포함한다.(Vermes)
‘복음에는...나타나서’
로마서에는 ‘나타나서’라는 말씀이 세 곳 기록되었다.
①본 절(1:17절)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②1: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③3:21절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다.(예수 그리스도를 말함)
한편, 이 문장의 서두에도 ‘가르(왜냐하면)’로 시작되어 전절과의 관련을 나타내고 있으며, 복음이 어떻게 죄인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지를 알려 준다.
참고로 ‘나타나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포칼륍테타이’로 ‘감취었던 것이 드러나다’는 의미로 시제가 현재형인 것은 계속적인 계시의 상황을 표현해 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는 지금도 인간 세상에 계속하여 드러나서 인간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특주-‘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에 대하여!
○종교개혁을 통하여 이른바 바울의 '칭의론'(稱義論)이 신학적 논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개신교 신학자들의 거의 대다수는 칭의론은 바울 신학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정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칭의론의 근거와 목적이 되는 '하나님의 의(義)'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아직까지 철저하게 규명되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다양한 해석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의 뜻을 올바로 포착하지 못한 까닭은 '의'(義)를 추상명사로만 이해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는 '정의'(正義)라는 낱말이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히브리어 성서의 '채댁'과 '체다카' 라는 두 낱말은 거의 대 부분 '의'(義)로 번역되었다.
○바울이 사용한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의 어법에서 유래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의'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전승은 드보라의 노래이다. ‘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삿 5:11)’ 드보라가 칭송한 '여호와의 의'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베풀어주신 구원 또는 승리를 뜻한다. 공동번역성경은 이 표현을 '야훼의 승리'로 번역했다.
'여호와의 의'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원수들의 억압으로부터 구출해 내신 구원 행위다.
'여호와의 의'는 여화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개입하셔서 잘못된 현상을 바로 세우시는 행위다. 따라서, '여호와의 의'라는 표현에 사용된 '의'(義)는 '구원'과 거의 동의어다.
○히브리어에서 '의'와 '의롭다'라는 낱말은 원래 법정적(法廷的) 용어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신 25:1).
○세상에는 옳은 일, 선한 일 하는 사람들 참 많다. 사람은 일시적으로 착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는 착하지 못한다. 성경의 선은 ‘온전한 선’을 말씀하고 있다. 지속적이고 영원적인 사랑의 선이 사람에게는 없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고 열심히 율법을 행했다. 하지만,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온전히 행하지 못해도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3:21)고 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여기서 ‘믿음으로’라고 번역한 헬라어 ‘에크 피스테오스’는 ‘믿음으로부터’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믿음에서부터’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근원이 바로 ‘믿음’이라는 사실을 지적해 준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그리스도를 만나 주로 고백하는 믿음’이라고 했고, 칼빈은 ‘복음을 받아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믿음, 초보적인 믿음’이라고 했다. 뒤에 나오는 ‘믿음에 이르게’는 믿음의 방향, 즉 믿음을 가진 성도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믿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후자의 믿음은 보다 성숙한 믿음, 즉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의가 한 성도의 믿음의 시작과 완성의 길을 걷는 과정을 주도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보여주고 있다.
| 의(righteousness) | 죄(sin) |
뜻 |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 *옳음, 정의, 공의, 정직, 깨끗함. 히)체데크, 헬)디카이오스; 올바로 만듦. ->하나님의 인간 구원 | 인간(죄인)의 속성 *원뜻-궁수의 화살이 과녁을 벗어난 것. 즉, 하나님의 목적에 어긋난 삶. |
믿음으로 사는 것(의인; 믿음으로 사는 사람) |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죄인;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 | |
공통점 | *관계적 용어(대신관계) *법정적 용어-요5:24-심판을 받지 않음. | *관계적 용어(대신관계) *법정적 용어-롬6:23-심판을 받음. |
과정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으로(고후5:17) | 태어나면서부터 죄인(롬3:23) |
결과 | 구원(롬1:17) | 사망(롬6:23 |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자신이 주장하는 구원의 교리를 확증함에 있어 항상 구약의 통해 인증하는데, 여기서 ‘기록된 바’는 구약 성경 하박국2:4절을 인용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한편, ‘살리라’에 해당하는 ‘제세타이’는 요한복음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로 ‘영생(요3:16)’이라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로서 영육이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영원히 존속됨을 가리킨다.
◆묵상과 적용
◦복음의 능력을 의지하여 살라!
세상에는 옳은 일, 선한 일 하는 사람들 참 많다.
이렇게 사람은 일시적으로 착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는 착할 수는 없다.
성경의 선은 ‘온전한 선’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이고 영원적인 사랑의 선이 사람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도 의로울 수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분명하게 드러났다.
우리는 마땅히 죽었어야 했다.
(원래 이미 죽었던 자들이다)
로마서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가 죄인을 위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어떤 행위나 공적이나 수고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득의(以信得義) 또는 이신칭의(以信稱)義) 원리(교리)다.
그렇다고 복음을 결코 ‘값싼 복음’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이제 잘 살아야 한다.
그러면 잘 사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능력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처음 믿었던 그 초심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본문에서 ‘하나님의 의’가
한 성도의 거룩한 성화의 삶을 주도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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