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남창우목사

“야긴과 보아스” (역대하 3:15~17)

새벽지기1 2018. 9. 17. 06:14


  “야긴과 보아스”

 

설교일시 : 2018. 3. 18

설 교 자 : 남창우목사

성경말씀 : 역대하 3:15~17

 

어느 장로님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우리 인간들은 도저히 깨달을 수 없다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을 세우는 이는 누구인가요? 우리가 일견 생각할 때 우리 인생을 우리가 스스로 세워 나간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세워가신다 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꿈꾸며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우리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의 인생은 누가 세우는 것입니까?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내용이 나옵니다. 성전을 짓고 그 앞에 두 기둥을 세웠습니다. 하나는 ‘야긴’이요 다른 하나는 ‘보아스’입니다. ‘야긴’은 ‘저가 세우시리라’ 라는 뜻이고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세우셨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솔로몬의 고백이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될 수 있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십니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십니다. 내가 세우면 실패하지만 하나님이 세우시면 성공합니다.

 

나를 세우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목회도 그렇습니다. 내가 야긴의 기둥을 세우고 보아스의 기둥을 세울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세우시고 나의 목회를 세우십니다. 우리가 야긴과 보아스의 이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의 이름으로 살아가면 실패합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야긴과 보아스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이름으로 기도하니까 응답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 세우는 기둥이 있는데 함께 알아봅니다.

첫째, ‘나’라는 기둥입니다. 매우 강력한 기둥입니다. 내가 나의 삶을 세워나가려는 기둥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기둥입니다. 우리는 절대 우리가 세울 수 없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입니다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가정도 그렇습니다. 가정의 모든 문제도 우리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이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맡기는 것이 우리 가정이 서는 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누가 우리의 인생을 세웁니까? 우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있기에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둘째, ‘꾀’라는 기둥입니다. 우리의 꾀는 우리의 인생을 세울 수 없습니다. 결국 저 잡는 일입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집니다. 꾀는 견딜 수 있을 때 견디어만 하는 유익한 고난을 피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견디어야만 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필요하고 유익한 고난도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자기 꾀로 피하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 자기 꾀로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감당할 수 없을 때에 그 고난이 다시 찾아옵니다. 그때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꾀를 부려서 고난을 피하며 살아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보면 자기 꾀로 살아가는 이들이 형통한 듯 보이지만 그 결과를 우리는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고난을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십니다.

 

셋째, ‘돈’이라는 기둥입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할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돈은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릴 수 있지만 떨어진 새를 다시 살려 날아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돈은 우리를 세울 수 없고 살릴 수도 없습니다. 돈 믿고 달려드는 사람은 자기도 망치고 이웃도 망칩니다. 돈으로부터 자유하여야 합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을 경영하려 하지 말고 돈으로부터 자유케 되길 바랍니다. 돈이 절대 우리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돈은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배반하고 등을 돌립니다.

 

넷째. ‘사람과 조직’이라는 기둥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을 의지하며 살아갑니까? 조직을 의지하며 살아갑니까? 이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그 사람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할 대상입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는 동안 내 곁에 머물게 하는 이웃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의지하는 목회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조직을 의지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는 패를 가르는 것입니다. 목회는 사람과 조직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잘못된 기둥이 있으면 이 시간 다 허물고 다시 세울 수 있길 바랍니다. 돈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사람과 조직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절대 자기 꾀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남은 인생, 야긴과 보아스의 두 기둥을 세우고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세워주심으로 힘 있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의 핵심 키워드는 불안사회 위험사회 피로사회 갈등사회입니다. 최근 들어서는 여기에 절벽사회가 더해졌습니다. 취업, 인구, 주거, 소통의 절벽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벼랑 끝 절벽 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안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혼미합니다. 그 이유는 괘도를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아담을 부르신 것은 아담이 있어야할 곳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모두가 괘도를 이탈했습니다.

 

이러한 고통스런 현실을 극복하는 유일한 비결은 원래 괘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괘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직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고 하나님만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한편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하나님의 세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레일 위에 인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는 돈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꾀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조직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자기가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괘도를 이탈한 것입니다. 탈선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는 십자가의 정신으로 우리가 살아간다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순종하는 사람이 있으면 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 되길 원합니다. 야긴과 보아스, 하나님께 능력이 있다,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두 단어를 품고 여러분이 살고 여러분이 살아 야 사회가 살고 이 나라가 살게 됩니다.

 

 

말씀 묵상과 믿음의 결단

 

1. 말씀 묵상

 

1) 말씀 배경

: 열왕기상 7:13~22 말씀에 보면, 솔로몬은 성전과 왕궁을 지은 후 사람을 보내어 히람이라는 사람을 두로에서 데려 옵니다. 그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었는데 놋쇠 대장장이였습니다. 히람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은 대장장이였습니다. 그는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자였습니다. 이를 솔로몬 왕이 데려와서 공사를 맡긴 것입니다.

 

2) 성전 기물을 만드는 일에 이방인이 참여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성전과 그 모든 기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뿐만이 아닌 이방인의 손에 의해서도 제작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이러한 사실에서 1)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때로 이방인도 사용하신다는 것과, 2) 하나님 나라의 참여는 혈통과 신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성서교재간행사 주석 참조)

 

3) 성전기구 제작에 놋이 사용됨

성전의 외부 기구 제작에 사용된 놋은 성전 내부 장식에 사용 된 금에 비해 투박하고 서민적이지만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비중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금이 하나님의 침범 할 수 없는 순전함과 영광을 상징한다면 놋은 죄악 된 인간과 함께 하시고 그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몸소 체휼하신 그리스도의 성품을 상징하고 있습니다(히4:15) 그러한 사실은 예수의 구속을 상징하는 광야의 ‘놋뱀’(민21:9)이 놋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성서교재간행사 주석 참조)

 

4) 성전 앞에 세워진 두 기둥 ; ‘야긴’과 ‘보아스’

이 두 기둥은 성전의 주랑 앞에 세워졌는데 오른 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습니다. 야긴은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의미를, 보아스는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명칭은 1)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의 영원성과 능력을 상징하며 2)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영원성과 능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견고하고 능력 있게 서기를 바라는 소원과 그 나라의 풍요로움을 염원하는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2. 말씀 적용과 믿음을 결단

 

1) 나에게도 ‘광야의 놋뱀’이 되시는 예수님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를 살리셨다는 진리의 말씀이 진정 그러한가 하여 되뇌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나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며 나의 인식 저 너머의 사실이었기에 그냥 믿으면 된다는 권유가 어찌 그리 허황되게 들렸던지요. 그러나 그러한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구원의 역사하심으로 나의 심령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음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라는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분명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셨던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광야의 놋뱀’을 선물하셨습니다. 예수님 그분이 나의 생명의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그 십자가의 은혜만이 소망이 됩니다. 오늘도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가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의 은혜에 맡기며 오늘을 살아가길 소망해 봅니다.

 

2) 나도 작은 히람이 될 수 있을까?

비록 이방인이며 무명의 삶을 살아가던 히람이었지만 하나님의 귀한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아버지의 가업인 대장장이 일을 어어 받아 성실히 그 일에 정통한 삶을 살아 온 준비된 일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자였다는 성경 말씀에 머리가 끄덕여 집니다. 참으로 귀한 삶입니다. 그는 분명 성전 기구 만드는 일에 온 힘을 다 하였을 겁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집안에서 자라온 나에게 구원의 빛이 비추인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선한 일에 쓰임 받으리는 기대는 애당초 없었습니다. 다만 구원의 여정 가운데 선한 청기기의 삶을 살아가고 싶은 선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그 은혜가 있기에 작은 일에 성실히 살아갈 뿐입니다. 믿음의 아버지요 믿음의 외조부로, 믿음의 벗이요 믿음의 동역자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작은 히람으로 살아가길 소망해 봅니다. 그리고 선한 일에 청지기로 살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3) 나에게도 잘못된 기둥이 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이다’ 라고 고백하며 살아가지만 나의 믿음의 여정을 돌아보면 그 믿음의 고백이 입술의 고백에 머무르는 때가 너무나 많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며 주님의 기쁨이 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살아가지만 값싼 은혜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창조주 되시며 나의 주권자 되시는 주님께 나의 삶을 맡기며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간다고 외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망각한 채 세상 것들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나의 모습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혹여 실천적 무신론자나 명목적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목사님의 최근 설교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면 부끄럽습니다. 나는 진정 주 안에서 행복자로 살아가고 있는지? 나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산 제사 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씨름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오늘 설교 말씀에 나의 삶을 비추어 보면 나 또한 잘못된 기둥을 세우고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나’를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기보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사람과 조직’을 먼저 의지하는 모습을 숨길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나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나의 지혜와 나의 꾀를 의지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다시한번 주님의 자비를 구하여 봅니다. 하나님을 나의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믿음의 길을 가게 하여주시길 간구해 봅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나를 다스리시며 도우시옵소서!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4) 나의 삶의 ‘야긴’과 ‘보아스’는 있는가?

솔로몬 왕이 성전과 왕궁을 건축하고 성전 앞에 세워진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를 세움은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신실한 자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민족과 자신이 되기를 원하는 서원과 다짐의 뜻이라 생각됩니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능력을 베풀어 주시리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나의 삶에도 ‘야긴’과 ‘보아스’는 있는가 돌아봅니다. 분명 창조주 되시며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여기까지 인도하심은 놀라운 은총입니다.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의롭다 하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시는 그 은혜는 나의 삶에 일어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만이 나의 진정한 기둥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 나의 기둥이 됩니다. 바라기는 나의 가정과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가 주님께서 주인 되신 ‘야긴의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또한 주님의 능력으로 세워지는 ‘보아스의 공동체’가 되길 간구해 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함께 하시는 은총을 누리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선한 이웃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