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권성수목사

한국교회 설교의 트렌드

새벽지기1 2018. 3. 25. 07:22


한국교회 설교의 트렌드

 

한국교회의 설교가 지금 어떤 트렌드(trend)를 이루고 있는가? 한국교회 설교의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의 설교자들은 어떤 설교를 하고 있고 앞으로 어떤 설교를 할 것인가? 미래는 미래에 가 보아야 알 것이다. 그러나 과거가 현재로 연결되고 현재는 미래로 흘러가기 때문에 현재의 설교 추세를 보면 미래의 설교도 전망할 수 있다. 현재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어떤 설교를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한국교회 미래 설교를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미국의 설교자와 설교학자가 글을 써서 큰 영향을 미치면, 그것이 바로 한국에 소개된다. 한국의 설교자와 설교학자는 미국의 설교와 설교학에 영향을 아주 빠른 속도로 받고 있다. 특별히 ‘미국의 어떤 설교자가 어떻게 설교해서 그 교회가 잘 된다.’는 소문만 나면 한국교회는 바로 그런 설교를 따라간다. 이런 각도에서 한국교회의 설교의 트렌드를 10가지로 정리해 보는 동시에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이야기식 설교

구설교학의 설교는 성경 본문에서 하나의 핵심 명제를 찾아서 그것을 대체적으로 3대지로 전한다. 설교자가 권위를 가지고 성경의 진리를 청중에게 선포한다. 설교자는 명제적 진리를 설명하고 논증하고 예증하고 적용한다. 설교자는 청중으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여 그 진리대로 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신설교학은 설교자보다 청중을 더 중시한다. 진리의 전달보다 청중의 체험을 더 강조한다. 청중이 성경 말씀을 체험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신설교학은 결론부터 내리고 그 결론을 설명하는 연역적 방식보다는 구체적인 사실들을 이야기함으로써 청중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하는 귀납적 방식을 사용한다. 신설교학은 주로 이야기 설교를 통해서 청중의 체험을 유발한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구설교학의 전통적인 설교를 하고 있다. 전통적인 3대지 설교를 선포적인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설교자들 중에 설교학자들을 통해서 귀납법적 이야기 설교에 대해서 들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한국교회 설교자는 전통적인 설교를 하면서 간증이나 예화를 통해서 이야기를 많이 섞어서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은 과거보다 의식적으로 이야기를 더 많이 섞어서 하는 것 같다. 전통적인 설교를 하면서 예화를 많이 했던 설교자도 과거에는 예화를 많이 들어서 되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가도 이제는 예화가 많이 들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앞으로 한국의 설교자는 설교에 이야기들을 종래보다 더 많이 사용할 것이다. 사실 설교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흘러가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문학적 자질이 많거나 본래 이야기꾼이라면 모르지만,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설교 한 편을 기승전결의 플롯을 가진 이야기로 작성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설교자들이 전통적인 설교 속에 이야기들을 더 많이 넣는다는 의미에서 ‘이야기식(式) 설교’를 하게 될 것이다. 간증과 예화를 많이 들고, 생활 실화를 많이 들게 될 것이다.

 

한국 교회 설교자들이 이야기를 많이 섞은 이야기식 설교를 한다고 해서 청중에게 알아서 결론을 내리도록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설교자가 이야기 속에 결론을 숨겨놓을 뿐 아니라, 이야기 끝에 결론을 내리는 설교를 하는 것 같다. 앞으로 한국교회 설교자는 권위 있게 선포하기보다는 부드럽게 설득하는 이야기식 설교를 하게 될 것이다.

 

후현대의 청중은 권위적인 선포를 거절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교인들은 아직도 권위적인 선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청년들과 교육 수준이 높은 교인들은 설교자가 강단을 치면서 권위 있게 선포하는 설교에 대해서 은근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교인들은 이야기식 설교에는 별로 반감을 품지 않는다. 설교 시간에 별로 부담 없이 이야기를 듣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하는 사람도 부담이 없고, 듣는 사람도 부담이 없다. 이야기는 하는 사람도 재미가 있고, 듣는 사람도 재미가 있다.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효과가 있다. 이야기는 진리를 생생하게 전달하여 기억에 오래 남게 하는 특징이 있다. 이야기는 설교자와 청중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는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이야기 속으로 말려들게 하는 특징이 있다. 이야기는 이런 의미에서 후현대의 분위기와 잘 맞는다. 한국 교회 설교자들은 앞으로 이야기식 설교를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 설교자가 이야기식 설교를 많이 한다고 해서 성경을 포기하거나 제쳐 두지는 않을 것이다. 성경 자체에 설화가 많다. 이야기 설교는 성경의 설화 장르를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실화를 통해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야기 설교를 한다고 해서 성경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2. 성경 강해 설교

한국교회 교인들은 설교자가 성경에서 떠난다고 생각하면 아주 싫어한다. 교인들은 성경을 무시하는 설교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교인들은 성경을 본래 신성한 경전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교인들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의 내용을 설명하는 설교를 좋아한다.

 

강해설교는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고 적용하여 청중이 성경대로 살아가게 하는 설교이다. 강해설교는 성경과 생활을 연결시키는 설교이다. 성경 구절을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으로 해설했다고 해서 강해설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설교는 성경의 지평만 설명하는 설교이다. 성경의 자구(字句)를 주해한다고 해서 강해설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설교는 주해설교이다. 강해설교는 성경의 지평과 현실의 지평을 녹여서 하나로 묶는 설교이다. 강해설교는 성경의 지평과 현실의 지평을 융합하는 설교인 것이다.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이런 의미의 강해설교를 앞으로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정보와 지식의 시대이다. 설교자가 강해설교만 한다고 해서 교인들이 그 설교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교자가 성경도 깊이 파고, 현실도 깊이 파서, 성경과 현실을 지하수 차원에서 연결시키는 강해설교가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성경의 내용을 피상적으로 깨닫고 현실의 상황도 피상적으로 관찰하여 성경과 현실을 얇은 끈으로 연결하는 설교는 청중에게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청중이 감성 터치를 좋아하고 재미와 흥미와 유머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강해설교자가 얕은 차원에서 감성만 터치하면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얕은 강해설교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설교는 당장 들을 때는 좋을지 모르지만, 청중이 듣고 난 후에 공허감을 느낄 수 있다.

 

설교자가 문맥(文脈)과 사맥(史脈)과 경맥(經脈)을 깊이 살펴서 성경을 해석하고, 현실을 깊이 이해하고 설교해야 지속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정 전인(全人)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감성만이 아니라 지성과 의지까지 움직일 수 있는 깊은 강해설교라야 성경이 의도하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과 현실을 깊이 연결하는 ‘깊은 강해설교’가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전망은 현재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제자훈련을 대체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에게 제자훈련을 하는 설교자는 ‘얕은 강해설교’를 할 수가 없다. 제자훈련을 하는 교회의 교인들은 성경을 배우고 경건서적을 읽고 상당히 높은 지적 수준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제자훈련 목회에 성공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다.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대부분 제자훈련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제자훈련을 하고 있다. 제자훈련을 받은 교인들은 똑똑해지기 때문에 설교자가 ‘깊은 강해설교’를 해야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성경도 깊이 보고 현실도 깊이 봐서 이 둘을 깊은 차원에서 연결시키는 강해설교가 유행할 것으로 내다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성경 장르 설교

성경은 여러 자기 장르로 되어 있다. 율법, 역사, 시, 잠언, 예언, 설화, 복음, 서신, 묵시, 비유 등. 구설교학에 따른 전통적인 설교는 서신 장르를 비교적 잘 살리는 설교라고 볼 수 있다. 신설교학에 따른 새로운 설교는 설화 장르를 비교적 잘 살리는 설교라고 볼 수 있다. 미래의 설교는 성경의 모든 장르를 살리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미래 한국의 설교는 신설교학에 영향을 받아 설화 장르를 많이 살릴 것이다. 구설교학의 영향을 계속 받아 서신 장르도 많이 살릴 것이다. 그러나 미래 한국의 설교는 성경의 다양한 장르를 다양하게 살리는 방향을 잡게 될 것이다.

 

설교는 성경의 본질만이 아니라 형태까지 살리는 방향을 잡아야 한다. 비유는 비유로 설교하고, 역사는 역사로 설교하고, 시는 시로 설교해야 한다. 설교자가 실제로 비유를 비유로 설교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비유의 본질을 잘 이해해서 비유를 제대로 살리는 설교를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구설교학은 서신 장르를 잘 사리고 신설교학은 설화 장르를 잘 살리고 있다면, 앞으로의 설교학은 성경의 다양한 장르를 다 그대로 살리는 방향을 잡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설교학이 성경의 다양한 장르를 그대로 살리는 설교를 설교의 이상형으로 잡게 될 것이다.

 

4. 생활 적용 설교

최근에 우리는 전문 학자들이 이론적으로 강의하는 컨퍼런스에는 목회자들이 100여명 모이지만, 실제적으로 먹혀드는 목회 컨퍼런스에는 10,000여명이 모이는 현상을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꿩 잡는 것이 메다.”는 실용주의 격언이 잘 통한다. 가치관과 이론이 잘못된 상태에서 실용성만 추구한다면 문제가 있지만, 올바른 가치관과 이론에 근거한 실용성은 반드시 추구해야 할 것이다.

 

설교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청중이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청중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설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 적용시켜 주어야 한다. 생활에 적용되지 않거나 적용될 수 없는 설교를 들은 청중은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So What?)”라는 반응을 보이고 현실 생활 속으로 나아간다. 설교자는 청중이 ‘집으로 가져갈’(take home)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청중 대부분은 설교가 성경 본문에 얼마나 정확한 근거를 잡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설교자가 ‘지금 내가 살아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내가 당장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설교자는 청중의 이러한 욕구를 무시하지 말고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설교자는 청중의 ‘체감 필요’(felt needs)를 충족시켜 주되, 청중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지만 청중에게 요구되는 ‘실질 필요’(real needs)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청중은 잘 먹고 건강하게 살고 자녀 교육 잘 하고 마음이 편한 것이 좋다는 식의 ‘체감 필요’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청중이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아래로 만물을 다스리는 ‘실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설교자는 청중의 ‘체감 필요’와 ‘실질 필요’를 충족시켜 주되, 청중이 메시지를 집에 가져가서 바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 연륜이 짧을수록 설교의 적용성이 약한 편이고 설교 연륜이 길수록 적용성이 강한 편이다. 목회 초기의 설교자는 대개 성경 본문의 해석과 설명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한다. 그러다가 보니 설교의 예증과 적용은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 목회 경험이 많은 설교자는 청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청중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기 때문에 실제 생활에 적용되는 메시지를 상대적으로 많이 전한다.

 

성경의 지평과 현실의 지평을 놓고 비중을 따지기는 쉽지 않지만, 초보 설교자는 성경 본문의 해석과 설명에 설교의 80%를 할애하고 적용에 20%를 할애하는 식으로 설교한다. 베테랑 설교자는 본문 해설에 20%를 할애하고 적용에 80% 할애한다. 달통(達通)한 설교자는 아예 설교 전체가 적용이고, 설교 전체가 본문 해설이다. 성경의 지평과 생활의 지평이 녹아서 하나가 된 설교를 설교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는 것이다. 설교의 제목도 적용, 서론도 적용, 본론의 대지들도 다 적용, 결론도 물론 적용, 설교의 어투도 적용, 설교의 태도도 적용--모든 것이 적용이라는 것이다.

 

사실 성경을 보라.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실 때에 아담이 집에 가져가지 못할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에 아브라함이 “그래서 어쩌란 말씀입니까? 왜 그렇게 허공에 매단 말씀을 하십니까?”라는 반응을 보일만한 말씀이 있었는가? 하나님이 다윗에게 말씀하실 때에 다윗이 적용하지 못할 말씀이 있었는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최후통첩 계시를 하실 때에 예수님이 은하수 세계 얘기를 하신 적이 있는가? 물론 제자들과 당시 청중이 이해하기에 어려운 말씀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는가? 바울 서신을 볼 때 바울이 준 어떤 말씀이 생활과 무관한 것이 있었는가? 성경 전체가 ‘생활’의 말씀이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살아가도록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훈련하는’ 책이다.

 

요즈음 우리나라 교계에서 소위 히트를 치고 있는 설교자들은 다 적용이 강한 설교를 하고 있다. 청중이 적용이 강한 메신저를 요구하기 때문에 적용이 강한 설교자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성인들을 상대한 설교자도 적용이 강한 설교자가 영향력이 강하다. 청소년을 상대한 설교자도 적용이 강한 설교자가 인기와 영향의 폭이 넓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다.

 

적용이 강한 메시지를 전해야 할 이유는 이렇게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적용은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세상의 처세술, 리더십, 심리학, 상담학, 경영학, 마케팅 등의 베스트셀러에서 추출한 메시지를 ‘성경적 메시지’로 가장하거나 포장해서 적용 설교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온 데 간 데 없고 인간의 소리, 인간의 소음만 남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인간의 전통이 판을 치게 된다. 말씀의 적실성을 살리되 성경에 정초한 적실성을 살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교자가 진리를 전할 때에는 ‘손에 잡히는 진리’(Hands-on-Truth)를 전해야 하는 것이다.

 

5. 사회 이슈 설교

사람은 사람들의 공동체, 즉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사람들이 살아가다가 보면 이런저런 이슈들에 부딪힌다. 이슈란 그때그때 풀어가야 할 사회적인 숙제이다. 숙제는 해야 속이 후련하다. 숙제를 하지 않고 사는 것은 늘 빚쟁이에게 쫒기는 기분이다.

 

설교의 청중은 사회 속에서 살면서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궁금증과 답답함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그것을 풀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청중에게 있다. 사회적인 숙제를 하지 않고 갑갑하게 살아가는 청중이 설교를 들으러 나온다.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 그 분야 전문가들의 말은 신문이나 TV나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서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를 통해서 들어야 한다. 청중은 설교자의 입을 통해서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한다.

 

청중이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설교를 듣고 싶어 한다고 해서 설교자가 사회적인 모든 이슈를 다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가 사회적인 이슈를 다 다룰 수도 없다. 사회적인 이슈를 다룰 때에 그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이 다루면 청중이 설교자를 오히려 무엇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으로 얕잡아 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설교자가 사회적인 이슈를 다룰 때에 진보적인 성향과 복음적인 성향으로 대별되는 것 같다. 진보적인 설교자는 사회적인 이슈 중에 이념, 대북문제, 민주화, 노사분규, 문화, 예술 등을 다루는 경향이 있다. 복음적인 설교자는 사회적인 이슈들 중에 성경과 관련된 이슈들, 즉 주로 도덕적인 이슈들을 중심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요즈음 청중은 교파와 교단에 의해 교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와 자녀 교육 면에서 교회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교인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설교자의 입장이 어떤가에 따라 교회를 결정하기도 한다. 교파나 교단이라는 제도보다는 이슈에 관심을 더 두는 것이 현대의 청중이다. 이런 때에 설교자는 각 분야 전문가가 다루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설교자가 사회적인 이슈들을 다룰 때에 예수님의 모델과 성경의 모델을 따라가야 한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의 식민통치라는 사회적인 이슈가 강하게 제기되어 있었다. 로마가 세금을 포탈하는 것도 사회적인 이슈로 강하게 부각되어 있었다. 노예제도도 당시의 청중이 풀어야 할 사회적인 숙제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사회적인 이슈들을 어느 정도 어떻게 다루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분하시면서 말씀과 행동과 생활로 메시지를 전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의 질서가 이 세상 나라에 침투해서 세상의 질서를 변화사키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신 것이다. 가령 형제와 재산을 나누게 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은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는 말씀을 하시는 방식으로 재산분배라는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셨다. 노예제도라는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노예를 형제처럼 대하라’ ‘상관을 주님처럼 대하라’는 식으로 다루었다. 예수님과 바울이 사회적인 이슈를 다룰 때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복음화와 사회 변화의 시각에서 다루었다.

 

예수님과 바울은 기독교의 정체성과 복음화와 사회 변화의 사명 면에서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신 것이다. 좌우 이념의 충돌이 있는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정체성과 복음화와 사회 변화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상생 공동체 발전에 협력하는 길은 무엇인가?

 

성경은 어떤 특정한 이념과 제도만을 고집하지 않고, 어떤 제도 하에서든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나눔과 섬김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문제는 어느 이념과 제도가 창조 질서 면에서 정의와 평화의 국가 공동체를 발전시키는데 가장 적합한가 하는 것이다. 어느 이념이 절대적으로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이념이 상대적으로 적합하냐의 문제이다.

 

이 문제 대해서 이념의 스펙트럼이 이념의 적합성을 고려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자유와 성장을 상대적으로 강조하고, 평등과 분배를 상대적으로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이념의 스펙트럼(spectrum)이 형성되어 있다. 극좌와 극우가 있고 중도가 있고 중도 좌와 중도 우가 있고, 그 사이에 다양한 이념적 입장의 스펙트럼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극좌는 김정일식 북한 공산주의 이념을 절대가치로 숭상하고 북한 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입장이다. 극우는 ‘빨갱이 잡아라. 우리나라에 빨갱이가 몇 백 만 명이 있다. 우리나라는 빨갱이 천국이 되어 가고 있다.’는 입장이다. 극좌와 극우 사이에 여러 이념적 입장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다양한 입장들로 구성된 이념의 스펙트럼을 보면서 설교자는 어떤 입장을 선택하고 어떤 입장들과 상생하고 교제해야 하는가? 사회주의의 강조점인 프락시스(praxis)에 있어서 김일 공산집단이 기근과 압박으로 자국민 수백 만 명을 죽게 하고도 김정일과 일부 공산당원들만 호의호식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극좌를 따라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이 다양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극우도 국론분열을 촉진하고 상생과 교제를 깬다는 점에서 적합하지 않다.

 

극좌와 극우 사이에 중도를 중심으로 세금을 좀 더 거두자, 좀 덜 거두자는 식의 논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중도를 중심으로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조금씩 치우치는 입장들은 서로 논의를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조정하면서 상생과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상생과 교제가 가능한 입장들 중에 어느 입장을 취하는 정당에 자유롭게 가담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최대한 구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설교자의 입장에서 설교 시간에 ‘좌파 정권’ ‘우파 정권’을 운운하는 것은 이념적 입장을 달리하는 교인들을 소외시키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설교자가 어느 정당의 이념을 대변하는 것 같은 발언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나라 전체가 자국민을 압박과 사망으로 몰고 가는 북한식 공산주의의 침투로 정체성 상실의 위기와 국가 존립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회자가 입을 다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짖지 못하는 경비견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가 정의와 평화를 상실하고 불의와 압박을 일삼는 제도로 넘어갈 위험에 대해서 목회자는 언제든지 경고하고 교인들의 의식을 바르게 깨우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북한을 돕는 문제에 있어서도 북한 정권이 핵 개발을 하고 인권 탄압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은 정의와 평화를 깨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북한을 도울 때는 북한 정권을 돕는 것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을 돕는 것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억압과 기근에 몰려 고통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최대한 지혜롭게 도와야 한다. 교회는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그들을 탄압하지 못하도록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설교자는 이런 식의 설교를 해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6. 하이-터치 설교

후현대주의의 한 특징은 감성 분출이다. 현대주의 시대에는 지성이 두드러졌고 후현대주의 시대에는 감성이 두드러진다. 감성이 두드러지는 후현대주의 시대에 청중은 갈등과 고민과 대립과 충돌 등 온갖 문제로 인격이 망가지고 가정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고 있다.

 

지금도 이런 상황이지만 앞으로는 이런 상황이 더 심해질 것이다. 감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상처를 많이 받는 청중을 상대하는 설교자는 지정의 중에 감성 터치를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한다. 설교자는 생활 속에서 손에 잡히는 진리(Hands-on-Truth)를 전해야 함과 동시에 감성을 깊이 터치해 주는(High-on-Touch)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자는 진리 면에서도 HOT, 감성 면에서도 HOT 설교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설교자가 감성 터지를 한다고 할 때 진리가 없는 감성 터치를 하면 안 된다. 진리가 없이 감성 터치만 하면 그것은 공허한 설교가 된다. 공허한 설교는 청중의 영성과 인격과 생활을 공허하게 해서 가뜩이나 상처가 많은 청중에게 더 많은 상처를 준다. 청중은 진리가 없이 실컷 울고 웃는 설교를 들어서 감성이 자극될 때 마치 치유와 회복을 체험한 것처럼 착각을 하지만, 사실은 상처가 덧나고 고름이 더 많이 고이게 된다. 설교자는 반드시 진리를 겸한 하이-터치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자가 진리에 관한한 차가운 얼음과 같고 감성에 관한한 뜨거운 불과 같은 설교를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불-과-얼음’(fire-and-ice) 설교를 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진리이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밝혀 주면 바른 진리를 전달하게 된다. 성경과 함께, 성경을 통해서, 성경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설교자가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설교를 하면 진리에 근거한 하이-터치 설교를 할 수 있다. 설교자가 성경을 해설해서 성령으로 변화시키는 설교를 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하이-터치 설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7. 흥미 유흥 설교

지금 우리나라에는 흥미 중심의 유흥 설교가 소위 설교 스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스타 설교자는 TV와 인터넷을 타고 자타에 의해 영웅이 되어 가고 있다. 비속어와 욕설과 반말, 망가지는 몸짓 등을 통해서 수많은 교인들로부터 인기의 스포트라이트(spotlight)를 받고 있다. 대형집회와 연합집회의 경우 스타 설교자를 세우지 않으면 교인들이 모이지 않기 때문에 올바른 의식을 가진 사람들도 그런 설교자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세우고 있다.

 

갈등과 상처가 점점 더 많아지는 세상에서 TV와 인터넷과 각종 매체가 흥미와 유흥 위주의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유흥 설교는 더욱 더 많이 나타날 것이다. 흥미 위주의 유흥 설교에 한 동안 매료되었다가 공허함을 느끼고 그런 설교를 외면하는 분위기도 나타나겠지만, 계속 유흥 설교를 따라가는 분위기도 형성될 것이다.

 

진리가 없거나 진리가 묽은 유흥 설교는 청중의 영혼으로 기갈과 기근을 만나게 한다. 많이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공복감에 시달리게 한다. 공복감 때문에 더욱 더 유흥 메시지를 찾게 되고 유흥 메시지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공허해지게 될 것이다. 마치 마약을 하면 할수록 마약을 더 찾는 마약 중독처럼 유흥 설교 중독에 걸리게 될 것이다.

 

메스미디어를 통해서 급속도로 번져나는 유흥 설교 중독증은 마약 중독증이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처럼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유흥 설교 중독자들은 중독에 걸린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은혜’를 받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착각 때문에 유흥 설교 ‘설교자 누구누구의 설교가 참 좋더라.’는 말을 퍼뜨리면서 유흥 설교 중독이 전염병처럼 번질 것이다.

 

흥미 위주의 유흥을 추구하는 시대에 설교자는 ‘재미있는 교육’(edutainment)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양분이 많은 진리를 설교하되 적절한 유머를 활용해야 한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이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은 우리가 복을 받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경박해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유머를 활용해서 진리를 전하는 것은 후현대의 물결 속에서 가라앉지(sink) 않고 수영하는(swim) 방법이다.

8. 청중 취향 설교

지금은 소비자가 왕이라는 시대이다. 생산자가 소비자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생산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대량생산보다는 소비자 각자의 취향에 따른 맞춤 생산이 히트를 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설교에 있어서 소비자는 청중이다. 청중을 무시하고 설교자 중심으로 설교할 수는 없다. 설교자는 청중을 바로 알고 청중에 맞는 설교를 해야 한다. 요즈음 설교자들은 청중 분석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영성과 감성과 체험을 중시하는 후현대주의시대의 청중의 취향을 고려해서 설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이런 현상이 더욱 더 심해질 것이다. 더군다나 교인들은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회를 쉽게 옮기고 있다. 교인들은 사욕을 충족시켜 주는 설교자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교통이 편리해서 유동성이 강한 시대에 설교자가 청중의 취향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도 우물가 사마리아 여인을 잘 아시고 그녀에게 맞는 방식으로 말씀을 전하셨다. ‘물 좀 달라’는 말씀과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을 전하시면서 자신은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제공하는 메시아이고 영생의 생수라는 말씀을 전하신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의 취향을 중시하고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청중의 사욕을 충족시켜 주는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 청중이 가려운 귀를 긁어줄 설교자를 찾는다고 해도 설교자는 청중의 귀를 긁어주는 설교를 할 것이 아니라 청중의 영혼을 치료해 주는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자는 청중의 상황을 고려하면서도 청중의 관심과 욕구를 초월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 물 길러 온 여인에게 물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영생의 생수를 전해주셨던 예수님처럼 설교해야 하는 것이다.

 

9. 다양 퓨전 설교

지금은 퓨전 시대이다. 학문도 학문과 학문의 퓨전(multi-disciplinary)이 일어나고 있다. 성경해석학을 전공해도 언어학과 문학과 역사학과 사회학과 신학과 철학을 무시할 수가 없다. 문맥을 살리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언어학과 문학을 알아야 하고, 사맥을 살리기 위해서는 역사학과 사회학을 알아야 하고, 경맥을 살리기 위해서는 신학과 철학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학문만이 아니라 음식도 퓨전, 패션도 퓨전, 문학 장르도 퓨전--퓨전이 유행어가 될 정도가 되었다.

 

이런 흐름에 걸맞게 지금 구설교학에 따른 명제 설교와 신설교학에 따른 이야기 설교가 적절하게 혼합된 퓨전 설교가 유행하고 있다. 핵심명제를 전달하면서도 이야기들을 가미해서 전달하는 시대가 되었다. 단순히 이야기 설교만 하기에는 설교자도 설교 준비에 한계가 있고 청중도 듣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명제 설교에 길들여진 청중이 이야기 중심의 설교를 계속 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명제 설교와 이야기 설교의 퓨전이 앞으로도 계속 유행하게 될 것이다.

 

명제와 이야기의 퓨전만이 아니라 귀납과 연역의 퓨전, 감성과 이성의 퓨전, 언어와 영상의 퓨전, 예화와 동영상의 퓨전 등 다방면에서 다양한 퓨전 설교가 나타날 것이다. 청중의 관심이 다양하고 전문분야가 점점 더 세분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가 퓨전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명제 설교만 고집하는 설교자도 서론도 다양하게, 본론의 대지도 다양하게, 설교의 방식도 다양하게 설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같은 교회에서 장기간 머무는 설교자는 같은 청중을 식상하게 할 가능성이 많다. 설교자가 청중을 식상하게 하지 않고 그래도 참신하게 설교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10. 성령 강해 설교

내가 이미 출간한 <성령 설교>에서 ‘성령 강해 설교’를 주장하였지만, 강해설교를 아무리 잘 해도 성령의 능력으로 하지 않으면 청중을 변화시킬 수 없다. 본래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이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으로 설교해야 성경의 생명력이 살아난다. 설교자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살전 1:5)으로 설교해야 설교를 통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깊은 강해설교’를 해도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청중은 공허감을 느낀다. 신설교학이 성경 본문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강해설교가 성경 본문을 강조하여 살리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강해설교를 잘 한다고 해서 청중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변화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강해설교자가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가 하는 강해설교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 설교자들 중에는 성경 본문만 강조하는 설교자들이 있다. 성령의 능력만 강조하는 설교자도 있다. 전자는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되 기도의 무릎은 매우 약하다. 후자는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다. 성령의 감동만 받으면 강단에 올라가서 바로 능력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기도를 많이 할 때 성령이 강력한 즉흥적인 감동을 주셔서 설교하게 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에만 의존하여 성경을 연구하지 않고 설교를 준비하지 않는 것은 성경과 성령을 오해한 것이다. 성령은 설교자의 나태를 조장하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은 나태한 설교자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성령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기도하는 설교자에게 강하게 역사하신다.

 

우리는 성경도 강조하고 성령도 강조하는 균형을 잡아야 한다. 성경 쪽으로만 치우치거나 성령 쪽으로만 치우치면 안 된다. 성경 쪽으로만 치우치는 설교자는 냉랭하고, 성령 쪽으로만 치우치는 설교자는 얄팍하다. 우리는 성경을 풀어서 성령으로 변화시키는 ‘성령 강해설교’, 짧게 표현해서 ‘성령 설교’를 해야 한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사역자들은 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사람들이다. 모세와 다윗과 선지자들이 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했던 사람들이다. 신약의 사도들과 사역자들도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했다. 예수님은 특별히 성령이 한량없이 충만하셨던 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고 하셨다(요 3:34).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신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님은 설교자들의 완벽한 모델이시다. 예수님은 ‘성령 강해설교자’이셨다.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성령 강해설교’를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성령 강해설교’를 해 보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변화가 많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복이 많이 임하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구동신교회에서 11년간 설교를 하면서 계속 ‘성령 강해설교’를 하고 있다. 나는 ‘성령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많이 체험하고 있다. 하나님이 외부적인 교세도 엄청 늘게 하셨지만, 교인들의 인격과 생활이 많이 변하게 하셨다. 성경(Bible)을 풀어서(Exposition) 성령(Spirit)으로 변화(Transformation) 시키는 설교, 영어 첫 글자만 따서 BEST 설교가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나는 ‘성령 설교’가 미래 한국교회 설교의 모델이 될 것으로 본다. 내가 하는 설교이기 때문에 그것이 모델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 사역자들이 한 설교이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설교이기 때문이다.

 

나는 위에서 한국교회 설교의 10대 트렌드를 밝혔다. 이야기식 설교, 성경 강해 설교, 성경 장르 설교, 생활 적용 설교, 사회 이슈 설교, 하이-터치 설교, 흥미 유흥 설교, 청중 취향 설교, 다양 퓨전 설교, 성경 강해 설교. 설교자는 성경을 풀어서 성령으로 변화시키는 ‘성령 강해 설교’, 약칭 ‘성령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성령 설교’를 하되 설화와 서신을 포함한 성경의 다양한 장르를 살리는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성경 자체가 생활의 책이니 만큼 생활 속으로 가져갈 수 있는 적용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인 이슈를 무시하지 말고 기독교의 정체성과 복음화와 사회 변화의 관점에서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후현대주의 시대는 감성의 시대이므로 진리에 근거한 하이-터치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즐기기를 좋아하는 쾌락주의 시대에 설교자는 재미있게 진리를 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청중의 취향을 정확하게 분석해서 청중의 ‘체감 필요’와 ‘실질 필요’를 다 충족시키는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다양성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단세포적 설교를 지양하고 다양한 퓨전 설교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성령 설교’를 하되, 진리도 뜨겁고(Hands-on-Truth), 터치도 뜨거운(High-on-Touch) 설교, 즉 HOT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예수님처럼 생활과 진리를 연결시키는 비유 설교(parable preaching) 혹은 은유 설교(metaphor preaching)를 개발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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