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희망의 믿음이 있습니다. 둘째는 약속의 믿음입니다.
이 두 가지 믿음은 언뜻 보면 비슷하지만 내용은 굉장히 다릅니다.
희망의 믿음은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그럴듯하고 화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약속이 아니라 단순한 희망에 근거하기 때문에 아무런 내용이 없습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고 꿈꾸고 소망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착각은 아마도 믿음을 착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 잘못된 것을 열심히 믿는 것 이런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내가 희망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희망일 뿐입니다. 희망이라는 말이 멋있기에 믿음과 착각하기 쉽니다. 그러나 희망은 내가 그렇게 원한다고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단지 희망한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은 희망에게 속는 것입니다.
그러면 약속의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희망은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약속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희망보다 화려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별 볼일 없고 시시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요 예언이요 말씀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렇듯 내 희망에 근거하는 믿음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에 근거한 믿음과는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믿음이 개인의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에 근거한 믿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상식이냐 믿음이냐
부활은 희망의 사건이 아니라 약속의 사건입니다. 부활의 믿음은 희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사실 부활사건을 믿는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상식적으로 경험적으로 힘든 일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이성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기적이요 감동이요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성과 상식과 경험과 합리성에 근거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끝까지 성경의 말씀을 믿지 못해 생긴 것이 ‘다빈치코드’입니다. 요즘에 발견됐다고 떠드는 ‘유다복음’입니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이성을 기준으로 생긴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예수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느냐?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기에 고대에 나도는 이단 사설들을 스토리로 엮어서 현대인의 구미에 맞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코드에 맞게 만들어 낸 이야기 입니다. 결국 우리의 싸움은 이것입니다. 이성, 상식, 경험인가 아니면 말씀, 약속, 하나님의 사건인가 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틀릴 수도, 변할 수도 없습니다. 영적인 법칙은 한계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2천 년 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사건입니다. 지금도 부활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부활의 기적과 감동과 축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도마의 의심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시대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한 사람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도마라는 사람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믿지 못했습니다.
도마가 부활을 믿지 못한 이유가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현장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현장에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도마는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빠집니다. 시시할 때는 잘 모이다가 은혜 받을 때는 꼭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도마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현장에 없었던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둘째,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이성을 더 믿었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잘 듣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자기의 이성, 생각, 지식을 앞세우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도마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도마는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무시했습니다.
도마는 자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더라도 친구들의 증언은 듣고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두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았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마는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가 대개 위의 도마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첫째는 현장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자기 이성을 지나치게 신격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와 과학과 세상적인 지식에 세뇌가 되어있어서 영적인 세계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렇게 많은 친구들과 존경하는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
믿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한국사회가 변하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변하기를 원합니다. 내 인생이 변하기를 원합니다. 자녀가 변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율배반입니다. 태양의 존재를 거부하면서 어떻게 태양의 혜택을 받기를 바라겠습니까? 공기의 축복을 거절하면서 어떻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거절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어떻게 여러분에게 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분을 환영해야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물처럼 흐르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를 욕하면 그 사람은 절대로 내 옆에 오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 사람이 내 옆에 오지만, 그 사람의 약점만 보고 단점만 보고 계속 야단을 치면 절대 옆에 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부모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날 사랑하고 날 받아들여주고 허물을 감싸주어야 곁에 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환영하십시오. 하나님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십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거부했지만 예수님은 다시 도마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나는 그분을 거절했어도 그분은 나를 포기하지 않고, 나는 그분을 싫어할지라도 그분은 나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나는 등을 돌릴지라도 주님은 나를 다시 찾으십니다. 이것이 도마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은혜입니다.
믿는 자가 되라
26절, 27절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왜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시 찾아 오셨을까요? 물론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부활을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오신 것도 있지만 본문의 앞뒤를 잘 살펴보면 도마에게 초점을 둔 것이 확실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다 믿어도 도마 한사람 믿지 않은 것이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아흔아홉 마리가 우리에 있지만 집나간 한 마리 양이 마음에 걸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마음에 두고 가슴 아파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배워야 될 것이 하나있습니다. 인간의 배신과 불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보다 결코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내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이 위대하다, 내 판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가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배신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큽니다. 여러분의 불신은 그렇게 위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큽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난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죄보다 더 위대한 것은 은혜입니다. 내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십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예수님은 도마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부활절 아침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네 이성과 네 지식보다 위대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땅의 사건보다 더 위대한 사건은 하늘의 사건이다.”
여러분, 인간의 생각보다 더 위대한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믿음이란 희망과 기대와 신념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자기의 생각을 믿음이라 말하지 마십시오. 자기의 신념을 믿음이라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내가 믿습니다’라고 해서 믿음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철야기도해서 믿음이 생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금식해서 믿음이 생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은 그렇게 생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 자기 열심입니다. 자기 생각입니다. 진짜 믿음은 말씀입니다. 진짜 믿음은 말씀이요 약속입니다. 약속에 기초한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28절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드디어 도마가 깨졌습니다. 드디어 도마가 무너졌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이성의 벽, 상식의 틀이 깨지기를 축원합니다. 무너지기를 축원합니다. 자연조건을 다 벗어버리고 그 위에 영적 법칙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드디어 도마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새로운 안목이 생겼습니다. 29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두 가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고 믿는 믿음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 보고 믿는 믿음은 이성적인 믿음이요 합리적인 믿음이요 상식적인 믿음입니다. 보고는 누가 못 믿겠습니까?
가만히 보면 우리의 믿음은 이성입니다. 다 동의할 수 있어야, 이해할 수 있어야, 경험에 맞아야 비로소 ‘아멘’합니다. 믿음이 아니라 이성으로 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에 내가 믿을 수는 없지만, 이해는 안 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에 내가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못 믿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야단치지 않습니다. 다 보여주시면서 ‘네가 봤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약속의 믿음이요 성령충만한 믿음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은 영적인 믿음입니다. 오늘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우리 한국사회를 보는 눈, 역사를 보는 눈, 교회를 보는 눈, 자기 인생을 보는 눈이 영적인 눈이 있기를 발고 성령충만한 눈이 있기를 바라고 말씀의 눈이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교육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세상 풍조를 따라가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사십시오. 말씀대로 사십시오. 약속으로 사십시오. 새 하늘과 새 땅을 늘 바라보면서 사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믿음을 가지면 기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미래가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내 안에 상상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넘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한국사회를 보는 눈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한국 사회를 보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여러분의 자녀를 보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여러분의 미래를 볼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미래는 영원합니다. 할렐루야! 부활절 이 아침에 우리는 선포해야 합니다. 이 민족에 희망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게, 우리 사회에게, 우리 개인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이 있다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이 시간에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옵시고
예언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성령충만한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부정적인 것, 세상적인 것, 인간적인 것을 다 버리게 하옵시고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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