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이후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예수님의 정체성
예수님은 개인적인 욕심, 개인적인 비전이나 꿈,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계셨기에 갈릴리로 돌아가셔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에 의지해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성령의 권능을 받고 복음을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하고 기적을 베풀고 예언을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복음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성령을 받고 해야 할 일이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자기 꿈과 비전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원숭이를 특이한 방법으로 잡는다고 합니다. 간신히 손이 들어갈 만한 항아리에 바나나를 넣어 둡니다. 그러면 원숭이가 와서 항아리에 손을 집어넣고 바나나를 움켜잡으면 손을 빼지 못하고 그만 잡힌다고 합니다. 바나나를 놓으면 도망갈 수 있는데 원숭이는 바나나를 놓지 않고 끝내 잡힌다고 합니다. 종종 우리는 이 원숭이처럼 행동합니다. 내 욕심, 내 주장, 이기적인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포기 하지 않아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가라는 곳으로 가서 주님의 삶을 삽니다. 이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취된 예언의 말씀
왜 예수님은 많은 지역 중에 갈릴리 지역으로 가셨을까요? 갈릴리는 팔레스타인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많은 이방지역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이방의 새로운 문화에 영향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이 갈릴리에서 보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갈릴리 지역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필요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마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회당은 종교생활의 중심지였습니다.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 곳곳에 회당이 있었습니다. 회당에 들어가면 개인적인 고백기도를 했고, 고백기도가 끝나면 쉐마를 낭독했습니다. 쉐마는 신명기 6장 4절에서 5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쉐마를 낭독한 후에는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 사람을 초청해서 설교를 들었고,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율법책을 읽고 헤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사나 랍비가 들려주는 말이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한 살아있는 메시아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엄있고 감동있게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렸겠습니까. 16~1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메시아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갔다’는 것은 자기 습관대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님은 어렸을 적부터 습관적으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책을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기 전에 이미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61장 1절과 2절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놀랍게도 그 말씀은 메시아에 대한 기록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를 크게 네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 메시아는 성령을 받은 분, 기름부음을 받은 분입니다. 둘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분입니다. 셋째 모든 눌린 자를 자유케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넷째 주의 은혜의 해를 전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여기서 ‘은혜의 해’란 희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년에 한 번씩 안식년을 지켰습니다. 안식년이 7번 지나면 49년이 되는데 49년이 지난 그 다음해 50년이 되는 해는 특별히 희년으로 지켰습니다. 희년이 되면 모든 종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모든 땅은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모든 빚은 없어지고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이 이사야서 말씀을 읽으시며 자신이 온 것은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죄의 노예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모든 빚은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자유케하는 복음
사도바울은 이것에 대해 골로새서 2장 14~15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여기서 ‘의문에 쓴 증서’는 노예문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노예문서를 찢어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모든 빚을 대신 갚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유하십시오. 모든 절망, 고통, 죄, 수치심, 죄책감이 사라졌습니다. 할렐루야!
실존주의 철학자 카프카(Franz Kafka)가 쓴 소설에서 아프리카 해안가에서 살던 원숭이가 사냥꾼에게 잡혀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배 위의 철창을 탈출하려던 원숭이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철창을 빠져 나가도 갈 곳이 없었습니다. 바다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숭이는 고심 끝에 배에 탄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사람들처럼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고 말도 배웁니다. 이 원숭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프리카 원숭이가 아니라 그 배안의 갇혀있는 한 인간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카프카는 여기서 철창 속 원숭이에게도 자유가 없고, 배위의 인간에게도 자유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 어떤 것도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요 8:32)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저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씀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만이 참자유와 해방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군중들
21~23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 메시아가 바로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은혜로운 말씀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을 찔렀고, 정확하고 오류가 없는 주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수군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의원아 너를 고치라”는 속담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소위 ‘너나 잘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네가 누군데 우리를 가르치려 드느냐?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들었는데 그 일을 한번 해 보아라’라고 하는구나.” 그들은 진리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설교를 그냥 듣는 것에서 그치지 마십시오. 설교 말씀을 듣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자신을 맡기십시오. 오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의 삶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마음가운데 모든 의심과 불신앙이 사라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온전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노라 결단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있는 것을 전부 드린 사렙다 과부
24절입니다.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 성도들은 설교를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책도 2~3권씩 갖고 있습니다. 말씀의 홍수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익숙하기에 자칫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강퍅한 나사렛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이야기 하십니다. 25~27절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첫째는 사렙다 과부 이야기이고 둘째는 나아만 장군 이야기입니다. 사렙다 과부는 엘리야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3년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시돈 땅으로 가서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에게 빵가루와 기름이 조금 남아있었습니다. 겨우 한번 먹을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남은 것을 가지고 떡을 만들라고 했습니다.(왕상 17:13~14) 사렙다 여인에게는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와 같은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순종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도저히 대접할 수 없는 여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여인은 엘리야를 위해 식사를 준비했고,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마치 과부처럼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상황은 어렵고 소유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외롭고 지쳐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여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창고 가득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순종할 수 없지만 순종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가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순종으로 치유받은 나아만 장군
둘째 이야기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사 시대에 나아만 장군이 있었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을 위해 나아만의 종은 엘리사를 찾아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을 나와서 맞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만 말합니다.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씻을 곳이 없어 이곳까지 찾아왔는지 아느냐며 화를 냈습니다. 그 때 나아만의 종이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사가 더 큰 일을 하라고 해도 했을 텐데 이것보다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나아만은 자기 생각과 고집을 꺾고 몸을 씻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문둥병자처럼 죄 많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면서 병에도 많이 걸립니다.
오늘 이야기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면 질병도 치유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에게, 오늘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에게 그분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유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한 과부에게, 이방 땅의 한 문둥병자에게 전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내가 선택받은 사람이냐 구원받은 사람이냐 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갈릴리로 가셔서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의 능력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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