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아버지께로 돌아오라 ―간증주일― (누가복음15:11-24)

새벽지기1 2018. 1. 20. 07:40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15:18-20)

오늘 아침 읽은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하고, 또 어떤 분은 잃은 아들의 비유라고도 하고, 또 다른 분은 두 아들의 비유라고도 말씀합니다.
이 비유는 매우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심오한 종교적 진리를 간단한 이야기를 통해서 가르치는 것이 우리 주님의 교훈 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을 사랑하시는지 그 깊은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며 타락되는 그 모습, 어떻게 그와 같은 가운데서 돌이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 모습,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을 기쁘게 영접해 주시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는 그 여실한 모습을 이 간단한 이야기 가운데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 간단한 비유를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난 동기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요즘말로 쉽게 말하면, 이 아들은 자유를 동경한 것 같습니다. 독립 해방을 원한 것 같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 보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습니다. 자유를 동경하는 마음이 물론 그릇된 마음은 아닙니다. 누구나 자유와 독립과 해방을 원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의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의로운 길을 떠나서, 하나님이 만드신 생의 법칙, 곧 인륜과 도덕의 법칙을 떠나서의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와 같은 자유가 과연 있을 수 있는가? 공중에 나는 새가 공기와 공기 가운데서 운행되는 자연 법칙을 떠나서 자유가 있겠는가? 물 속에서 사는 물고기가 그 물과 물 속에서 운행되는 자연 법칙을 떠나서 자유가 있겠는가? 그것을 떠난다고 하면 그것은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자유는 사망을 의미할 것입니다.


제2공화국의 해방을 받았다고 하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하나님의 법에서도, 도덕의 법에서도, 국법에서도 자유를 얻은 줄 아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분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고 방종입니다. 자유는 풍부한 생명을 가져오나 방종은 사망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 도덕의 법, 국법을 떠나서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는 하나님의 경륜과 법 아래에서만 있는 것입니다. 국민의 자유도 국가의 법률을 지키는 안에서만 향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분간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청년이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자유를 행하여 본 결과는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여기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청년이 부모에게서 자기 것으로 오는 재산을 다 청구했습니다. 자유가 있으니까 그 재산을 다 아버지께서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재산을 다 받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자유가 있으니까 물론 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재산을 가지고 허랑 방탕하여 허비하였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자유가 있으니까 허랑 방탕하게 쓸 수가 있습니다.


여기 재산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영적, 육적 모든 은사 곧 모든 능력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육적으로 거기 속한 모든 능력, 건강, 체력 같은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는 거기 속한 모든 능력, 지력, 사고력, 창조력, 감정, 의지입니다. 영적으로는 그의 성품과 거기 속한 모든 능력입니다. 이런 지적, 육적 , 영적, 모든 은사에서 따라오는 물질이나 지식이나 지위나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산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재산을 가지고 멀리 가서 마음대로 사용하려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먼 나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도 바로 세계가 자유와 독재, 양대 진영으로 갈려 있지마는 영적 세계에도 나라는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선의 나라와 악의 나라입니다. 여기 먼 나라는 사탄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을 떠나면 자연히 사탄의 나라의 영역에서 살게 됩니다. 여기 멀다고 하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영역이 아니란 뜻입니다.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역을 떠날 때에는 그 때부터 벌써 사탄의 영역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이와 같은 먼 나라 사탄의 나라로 갔습니다. 거기 가서 허랑 방탕하게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쉽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중심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재물을 사용했습니다. 욕심대로 자기 본능의 순종대로 이렇게 하니 많던 재산은 어느덧 다 없어졌습니다. 이렇게 살면 돈도 그렇거니와 무엇이나 오래 가지 못합니다. 건강도 그렇고, 지위도 그렇고, 권세도 그렇고, 직업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고, 오래 가지 못해서 망하는 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향락은 잠깐 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재산을 가지고 마음대로 허랑 방탕하게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뿐입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마지막에는 다 없어지고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 어떤 백성의 집에 가서 붙어살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 백성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탄의 나라의 백성이니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귀신밖에 무엇이 더 되겠습니까? 귀신같은 사탄의 부하의 집에 가서 거기서 붙어산다고 하는 것을 보니까 종노릇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돼지 치는 업을 합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기탄 없이 돼지고기를 먹습니다. 또 돼지 치는 사업도 정당한 사업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옛날 유대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돼지고기는 절대로 먹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돼지를 친다고 하는 것은 거기서 더한 모욕은 없습니다. 사람은 돼지 치지 않는 줄 압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 중 하나인 이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돼지 치는 사람의 종이 되어서 직접 돼지를 같이 치고 있습니다. 남까지 더럽게 만드는 죄의 장사꾼이 된 모양입니다. 죄는 혼자서는 못 짓습니다. 남까지 돼지우리에 몰아 넣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먹을 것이 아주 없어졌습니다. 그 나라에는 사람 먹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돼지 먹는 것만 있는데 여기 신 역대로는 쥐엄나무 열매라고 그랬고, 구역대로는 팥 껍질이라고 그랬습니다. 사람은 사실 못 먹을 것입니다. 돼지나 먹을 것인데 그것밖에는 없으니까 귀한 부자의 아들이 돼지나 먹는 그런 팥 껍질을 먹으면서 연명하게 되었습니다.
돼지 치면서 돼지가 먹는 것을 먹으면서 죄를 지으며 죄를 먹고 마신다고 하는 그 뜻입니다. 이렇게 먹을지라도 오히려 쥐엄나무 열매도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흉년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나라는 언제나 흉년 드는 나라입니다. 사탄의 나라에는 풍년이 없습니다. 사탄의 나라에 사는 사람은 언제든지 그 영혼이 굶주릴 것뿐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하나님을 떠나서 자유를 찾아온 이 청년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가? 자유를 찾아갔더니 결국은 죄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잘 살 것 같아서 떠나갔더니 결국은 돼지 먹는 팥 껍질밖에는 먹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동무가 많은 것 같더니 이제는 뿔뿔이 다 달아나고 자기 홀로 외로운 나라에 남았습니다. 동무가 있다고 하면 돼지뿐입니다. 큰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이런 먼 나라에 가기는 갔지마는 결국은 절망, 공포, 사망의 위협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모든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죄의 종이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매우 외롭습니다. 고독합니다. 살 때에도 외롭고 죽을 때에는 더욱 외로운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절망과 암흑과 고통과 사망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데 이렇게 참혹한 상태에 빠졌던 이 청년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습니까? 여기 보니 이 청년이 이렇게 참혹한 형편에 빠져서야 스스로 돌이켰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 전에 돌이키면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할 수 있으면 여러분, 이렇게 되기 전에 돌이키십시오. 그러나 이렇게까지 된 다음에라도 돌이키게 된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 돌이킨다는 원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자기 자신에 돌아왔다는 듯입니다. 지금까지는 딴 정신에 미쳐서 살았습니다. 우리 한국말대로 제 정신은 나갔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참혹한 형편이 되고 보니 제 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정신이 돌아온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남의 정신에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 정신에 돌아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무엇이지요? 아버지의 집이올시다.『우리 아버지의 집은 품꾼 먹고 남는데…』


여러분, 하나님아버지를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아버지에게는 모든 것이 풍부합니다. 은혜가 풍부합니다. 사랑이 풍부합니다. 긍휼(矜恤)과 자비가 풍부합니다. 생명이 풍부합니다. 화평과 은혜가 풍부합니다. 풍부한 하나님의 집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니 헐벗었습니다.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종이 되었습니다. 고독합니다. 절망에 빠졌습니다. 암흑에 헤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이와 같은 형편이 됩니다. 세상의 모든 향락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즐겁다고 해도 일시적이요, 돼지 먹는 팥 껍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이제라도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 아버지 앞에 가서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러 달라고는 못하겠지마는 품꾼의 하나라고 불러 주지 않겠느냐?』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사실 이 생각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성신의 감화로 일어난 생각인 줄 압니다.『내가 잘못했다. 내가 이런 자리에서 떠나야 해.』그와 같은 생각은 성신의 감화올시다.


우리도 어떤 때에든지 무슨 일을 하다가 이와 같은 생각이 날 때가 있는데 이것은 성신의 감화이니까 성신의 감화를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대로 꼭 실행해요. 그래서 이 청년은 이와 같은 생각이 날 때에 20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그 자리에서 곧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자세히 들으세요. 생각만 할 것도 아니고 후회만 할 것도 아니고 결심만 할 것도 아닙니다. 결심할뿐더러, 생각할뿐더러, 후회할뿐더러, 그 자리에서 곧 일어나서 돌아갔습니다. 동작입니다. 행동입니다. 일도양단(一刀兩斷)이란 말이 있지요? 단행입니다. 사실 탕자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면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가 그릇된 줄 알 때에 그 자리에서 곧 일어나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삼손의 이야기를 다 알지요? 삼손이 블레셋 땅에 가서 아름다운 여자 들리라의 무릎에 드러누워서 잠을 잡니다. 제 상상이지마는 한잠 자고 일어나선『이젠 일어나야 되겠군.』그 같이 생각났을 거예요.『아무래도 무릎이 따스한 걸, 조금 더 자야겠군.』또 잡니다. 그러다가는 또 깨어『아무래도 일어나야 되겠는데.』그런 생각났을 줄 알아요. 그래도 또 좀 잠이 들었습니다. 일어날까 말까, 날까 말까, 이렇게 자는 동안에 마지막에는 머리를 다 깎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힘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마지막에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죄 가운데 있는 것을 뻔히 압니다.』내가 안 돼. 내가 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돼. 내가 일어나야겠어.』일어날까 하다가는 삼손처럼 다시 털썩 주저 않고 맙니다. 탕자는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탕자가 만일 그렇게 했다고 하면 구원은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그릇된 줄 알고 깨달을 때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돌아갔습니다. 행동, 실행입니다.


여러분, 롯이 소돔 성에서 떠날 때에 돌아다니면서 인사하고 떠났다는 말이 있습니까? 돌아다니며 인사했던들 아마 롯도 그 유황불에 같이 멸망 받았을 겁니다. 인사할 사이도 없습니다. 여기 탕자도 보니까 돼지 주인보고 인사하고 떠났다는 말은 전혀 없어요. 돼지 주인한데 인사할 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내가 오는 주일은 꼭 예배당에 가야 되겠는데, 예수를 꼭 믿어야 되겠는데, 오는 주일에 예배당 가기 전에 토요일 저녁쯤 우리 술친구들을 다 모아놓고 인사를 해야 되겠군.』술친구에게 인사할 필요 없습니다. 돼지 치는 사람들 다시 만나볼 필요 없습니다. 그냥 돌아올 것이지, 돼지우리 다시 봐서 무엇합니까? 냄새나 나지요. 죄는 더럽습니다. 죄에서 돌아올 때에는 단연 일어나서 아예 끊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아버지 앞에 돌아 오야 됩니다. 이렇게 탕자는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면서 자기 집이 멀리 보일 때에 혹 조마조마한 마음이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조마조마한 마음이 나기 전에 벌써 멀리서 아버지가 미리 기다리고 계시다가 버선발로 뛰쳐나오면서『아, 네가 이제 오느냐.』고 하면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영국의 어떤 번역된 성경을 보면 입을 맞추어도 많이 맞추었다고 그랬습니다. 아마 여러 번 맞춘 모양입니다. 이것은 반가이 영접하는 뜻입니다.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는 뜻입니다. 사랑의 표현입니다.『네게 과거를 묻지 않노라. 과거의 네 죄를 다 용서한다.』우리가 아무리 과거에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 때에는 하나님께서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입은 옷은 돼지 치던 옷 그대로입니다. 그 더러운 냄새나는 누더기 그대로 입고 왔습니다. 종을 불러서 얼른 옷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과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진정으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고 그 다음에는 새 옷을 입힙니다. 새 마음을 주십니다. 새 성품을 주십니다. 새 행실을 주십니다. 새로운 생활을 주십니다. 어떤 분은 예배당에는 나오지마는 아버지께는 온전히 오지 못해서 아직도 돼지 치는 옷 그대로 입고 오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 안에서도 창피한 일, 냄새나는 일이 더러 생깁니다. 여러분 교회까지 온 바에는 아주 아버지 품속에 오면 좋지 않습니까? 왜 교회에 들아 왔다갔다하면서도 냄새 피웁니까? 온전히 하나님 앞으로 와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곧 반지를 가져 오라 해서 반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이 반지 위에는 흔히 동장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들로 회복해 준다는 표시입니다.『너는 품꾼으로 삼아 달라고 하지마는 그 무슨 말이냐? 너는 내 아들이야.』
보니까 맨발로 다 부르텄습니다. 좋은 신발을 가져다 신겨 주었습니다. 화평의 예비한 복음의 신을 신겨주었습니다. 이 앞으로는 인생 길을 평안하게 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와서 새로운 옷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인생의 험악한 길이라도 평안히 갈 수 있습니다. 그 신을 신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을 봉사하고 인간을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입니까? 이 아버지는 너무 기뻐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하고 온 이웃을 청해놓고 즐거운 잔치를 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후한 잔치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때 우리는 후한 잔치를 먹습니다. 이 청년은 후한 잔치를 먹습니다. 온 이웃이 기뻐합니다.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찬양하며 기뻐합니다. 모든 성도들도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는 할렐루야 찬송과 아멘 을 항상 부릅니다.
여러분, 오늘 뜻깊은 간증 주일에 우리 심령을 가만히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이 어떤 자리에 있는가? 내 영혼이 어떤 나라에 있는가?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까? 혹은 아직도 먼 나라에 있습니까? 일어나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께서 돌아오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천군 천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천천만(千千萬) 성도들이 여러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날에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십시다. (1960년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