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일편단심의 신앙 (빌립보서1:12-21)

새벽지기1 2018. 1. 8. 07:39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1)

빌립보서는 특별히 인정이 깊은 서신입니다. 갈라디아서 같은 서신은 그 교회에 이단 사상이 들어와서 그런 사상을 시정하기 위하여 기록된 까닭으로 자못 격분된 가운데 기록한 편지입니다. 그런 자취를 우리가 갈라디아 서신에서 더듬어 알 수 있습니다. 또 지금 우리가 수요일 저녁마다 공부하는 고린도 전서나 후서 같은 서신들은 그 교회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많아서 그것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기록한 서신으로 그 배후에는 많은 근심과 염려 가운데 기록된 자취를 우리가 또한 더듬어 살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그 일부를 읽은 빌립보서는 그런 자취가 전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운 여러 교회 가운데 특별히 빌립보 교회는 화평한 교회로서 유명합니다. 평안한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처음에 설립하고 계속해서 도와주고 있는 사도 바울을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어디 가든지 그들의 기도가 따라 가고 물질도 또한 따라 가면서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업을 후원하여 준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그만 수감된 이후에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이나 아무 것도 하는 것 없이 갇혀 있게 되었고, 그 다음에 가이사에게 송사 받기 위하여 로마로 올라오게 되었지만 별로 송사 받는 것도 없이 쇠사슬을 손에다 매고 옥중에 그냥 있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은 것입니다.
이런 소식은 물론 빌립보 교인들에게 들렸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위하여 항상 기도라고 특별히 옥중에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 그들은 기도만 할 수 없었습니다. 헌금도 하고 좋은 예물을 준비해 가지고 특별히 사람을 파송(派送)했습니다. 에바브로 디도라고 하는 좋은 교인 하나를 택해서 먼길, 뱃길, 육로를 다 지나서 로마로 사람을 보내어 사도 바울을 문안하고 사도 바울을 위로해 올리고 또 정성껏 모아 가지고 갔던 예물을 사도 바울에게 드린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예물을 받고 사도 바울의 마음은 심히 감격하였습니다.


우리가 빌립보서를 보면 감격과 감사의 분위기로서 충만합니다. 이렇게 감격과 감사한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게 됩니다. 우리가 이 빌립보 서신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심정을 우리가 살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기쁨이 무엇이었는가, 그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이었는가, 그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는가? 이런 모든 것을 이 빌립보 서신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읽은 말씀을 가만히 보면 먼저 문안이 있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를 드렸고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 자기의 마음을 내 놓습니다. 자기의 사정 이야기를 합니다. 12절에『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는 말로 시작합니다.『너희들이 내가 감옥에 있으므로 말미암아 걱정하는 줄 안다. 염려하는 줄 안다. 그러나 과히 염려할 것 없다. 왜 그런고 하니 나의 매인 것이 오히려 복음 전파의 진보함이 되었느니라. 그것을 너희들이 알기를 원한다.』그러면서 어떻게 복음이 잘 전파가 되었는지 세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는 내가 이렇게 매임을 당하였지마는 오히려 매임을 당한 것을 통해서 온 시위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시위대에 있는 군인들이 아마 바울의 파수를 본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다른 시위대 사람에게 또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여러 죄수가 많지마는 바울은 특별한 사람이야, 그 사람이 무슨 죄진 것은 없고 말을 들어보니까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로 말미암아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라고 그래.』이런 말이 온 시위대 사람에게 다 펴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그 후에 교회 역사를 보면 이렇게 펴진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이사의 궁중에 침투해 들어가서 마지막에는 로마 황제의 어머니가 믿게 되었고 마침내는 수 백년 후에 로마 황제까지 그리스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된 사정을 우리가 압니다. 그가 매임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렇게 펴졌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의 형제 가운데 다수가(그 형제는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가 이렇게 매임을 당한 것을 보고 오히려 더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되어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어서 더 담대해졌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어요. 아마 사도 바울이 이렇게 사슬에 매여서도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는 여기에 감격해서 열심이 낫는지, 혹은 사도 바울이 저렇게 옥에 있어서 자유로 전도도 못하는데 자유로 전도할 수 잇는 그들이 가만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였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마는 하여간 열심히 전도해서 복음이 잘 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아닙니다.『또 너희들 아는 바와 같이 예수를 믿기는 믿으면서도 공연히 교회에서 당파를 짓고 특별히 내게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도 있지 아니하냐? 그런 사람이 로마에도 더러 있어. 그런데 그런 사람은 내가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오히려 기뻐서 이제야 그들이 전도를 많이 해서 그들의 당파를 많이 만들 기회구나 하면서 열심이 나서 또 복음을 전파한다. 또 사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를 좀 괴롭게 할 줄 생각해.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한 거야.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든지 전파되는 것을 그리스도야.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니 나는 그저 기뻐할 것 뿐이야. 이 앞으로는 계속해서 기뻐할 것밖에 다른 것이 없다. 이렇게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여 있지마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가까운 친구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내 반대하는 사람을 통해서도 이렇게 복음이 전파되니 내 마음은 기쁘다. 내가 비록 쇠사슬을 차고앉았지마는 이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기쁘다.』


여기에도 사도 바울의 넓은 마음, 관용 심, 또 여기에서 그의 생각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에 온전히 사로잡혔는지, 그 심정이 어떠한지, 우리가 엿볼 수 있잖아요? 이런 말을 하면서『이렇게 너희들이나를 위해서 기도도 해 주고 그리스도의 힘이 항상 나를 도와줄 줄 안다.』그러면서 계속해서『나의 간절한 기도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이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尊貴)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가슴을 헤치고 자기 가슴속에 깊이 숨은 일편단심을 적나라하게 빌립보 교인들에게 헤쳐 주십니다.
음침한 감방에 사슬을 차고앉은 노 사도의 모습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의 머리는 이미 백발이 되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더 깊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여전히 혁혁합니다. 그의 음성은 여전히 쟁쟁합니다.
이 편지를 받아쓰는 제자에게 쟁쟁한 그 어조로「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불러줍니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위하여」계속해서 말합니다.「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왜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게 일을 하려 합니까? 그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되게 하기 위하여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왜 담대 하려고 합니까?「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 위하여」한 마디 더 합니다.「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 위하여」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비록 나이는 많이 늙었지마는, 비록 감옥에 있지마는「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함이라.」계속해서 하는 말이『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무슨 뜻입니까?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첫째 뜻은 이런 줄 압니다.『내게는 사는 목적이 오직 그리스도요, 생의 목적도, 생의 의의도 오직 그리스도다. 오직 그리스도를 내 몸에서 존귀케 하는 것이야. 그러니 내가 죽어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할 수 있으면 그것도 내게 유익함이다.』제일 첫 뜻이 이런 줄 압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두 가지를 힘썼습니다.
첫째는 자기 몸을 성결(聖潔)히 가지도록 했습니다. 온전히 자기의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렸습니다. 문자 그대로 제단 위에 자기 몸 전채를 올려놓았습니다. 그의 생활을 거룩히 하고 깨끗이 하고 아담하게 하고 화평하게 하고 온전히 사랑의 생활하기를 힘썼습니다. 항상 죄를 멀리 했습니다. 왜?『내가 죄를 지으면 그리스도에게 욕이 가게 돼. 내 몸으로 그리스도를 경배하려고 하면 먼저 내 몸이 성결해야 해.』그래서 그는 항상 육체와 싸웠습니다. 계속해서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달려갈 길을 다 갔습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 어떻든지 자기의 생활을 근엄히 하고 성결히 해서 자기의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를 힘썼습니다.


둘째로 그는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방법은 이 귀한 십자가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그리스도께서는 만민을 죄 가운데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자기 몸을 던진 이 귀한 사실을 내가 어떻게 홀로 가질 수 잇느냐?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 되지 않겠느냐? 땅 끝까지 가서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그래서 그는 스페인까지 가기를 원했습니다. 도처에 여행을 했습니다. 바다에 위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유대 사람에 위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방 사람들로 말미암아 위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환난과 고난이 도처에서 기다렸지마는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도처에 다녔습니다. 옥중에 있게 되면 옥중에서 역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왜?『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야.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내 몸에서 존귀하게 하는 것이야. 존귀하게 하는 데는 내 생활을 먼저 성결하게 하고, 둘째로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다. 그러니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도 유익한 일이다.』스데반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음으로 복음이 더 많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 될 줄 안다는 그 뜻인 줄 압니다.


그러나 둘째 뜻은 다른 내용이 포함됩니다.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게는 죽는 것도 그리스도처럼 죽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내 생의 표준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와 같이 살지 못하면 의미가 없어. 그리스도와 같이 거룩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깨끗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온유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겸손하고, 그러나 그리스도와 같이 담대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의를 위해서 핍박이라도 받고, 그리스도와 같이 살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돼. 이렇게 살지 못하면 내게는 생의 의미가 없어. 무얼 하려고 살아? 그리스도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말을 내 말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내 성품으로, 그리스도의 사업을 내 사업으로, 그리스도의 눈으로 나도 같이 보고, 그리스도의 귀로 나도 듣고, 그리스도의 손으로 할 일을 내 손으로 하고, 그리스도의 발로 걸어갈 곳을 내가 걸어가고, 그리스도와 같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갈보리 산상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는 것, 이것이 내게는 사는 것이야. 그러니 내게는 죽는 것도 유익해. 왜 그런고 하니 그리스도께서 죽었으니 나도 죽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부활했으니 나도 부활할 줄 알아. 그러니 나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 곧 내가 사는 것이야. 그러니 나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그 뜻이 여기 있는 줄 압니다.


셋째 뜻은 이렇게 그리스도처럼 꼭 살려고 하면 여러분도 스스로 깨닫고 저도 깨닫는 바요, 사도 바울이 이미 깨달은 바이지만 내 힘으로는 이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다 찾아보세요. 그가 그의 힘으로 이렇게 살았다고 한 편지가 하나라도 있습니까?「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무슨 뜻이지요?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이니,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음이니,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계심으로 말미암음이니,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네게 능력을 주시는 까닭으로 사는 것이니,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열매 맺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의 주시는 생명수를 내가 마시고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셔서 그리스도의 생명 양식을 내가 먹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계시고 나와 동행함으로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는 것은 유익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죽으면 그리스도와 영원히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영원히 같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영원히 동락(同樂)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죽는 것은 유익합니다. 사도 바울의 일편단심은 오직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여러분, 우리도 이 말을 능히 할 수 있습니까?「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이 말을 능히 할 수 있다면「죽는 것도 유익함이 되느니라」, 이 말도 할 수 있습니다.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면 어떻게 말할 것 같아요? 내게는 사는 것이 무엇이라고 할 것 같아요?「내게는 사는 것이 돈이니」아마 이렇게 말할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내게는 사는 것이 세상의 향락이니」이렇게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 사람들은「내게는 사는 것이 그저 영화 구경하는 것이니」이렇게 말할 것입니다.「내게는 사는 것이 세상 부귀 영화니」이렇게 말할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죽어도 유익함이 되느니라.」란 말은 못할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죽은 다음에야 돈이나 세상의 향락이나 부귀나 무슨 쓸데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이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편단심의 신앙을 가진 사람을 요구하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일편단심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 교역자와 장로들을 요구합니다. 일편단심의 신앙을 가진 권사들을, 남녀 집사들을 요구합니다. 신앙에는 절반은 없습니다. 온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면 신앙이 아닙니다. 일편단심의 자녀를 요구합니다.
오늘 아침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 각 사람에게 주셔서 사도 바울과 같이,『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60년 8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