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누가복음 12장1-11)

새벽지기1 2017. 12. 28. 06:52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4-5)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올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올시다.「하나님을 경외하라.」이 말씀은 단순히 주님께서만 가르쳐 주신 교훈이 아닙니다. 온 성경을 통해서 제일 먼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올시다. 신명기(申命記) 10장 12절에『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여호수아 24장 14절에『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충신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전도서 12장 13절에『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이사야 8장 13절에는,『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잠언 1장 7절에는『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리라.』
이 밖에도 온 성경을 통해서 우리 인생들에게 제일 먼저 주시는 말씀은『하나님을 경외하라.』그 말씀이올시다. 사람은 흔히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눈이나 귀를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말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온 성경 전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우리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십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곧 깨달을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겉만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마음속까지 보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사람은 사람의 외적 행동만 살피지마는 하나님께서는 그 행동의 배후에 숨은 동기까지 다 살펴보십니다. 사람은 겉만 보는 까닭으로 혹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친히『사람은 외모를 보나 나는 중심을 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은밀한 일까지 살피시고 인간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는 하나님이올시다. 사람의 눈은 우리가 잠깐 동안 속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올시다. 그래서 지금 읽은 본문 가운데도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라.』하셨습니다.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은밀한 곳을 다 보시고 그것을 드려내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시기해서 멀리 애굽으로 요셉을 팔은 후에 자기 아버지 야곱에게 돌아가서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생각하던 중 요셉의 채식 옷을 벗기고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묻혀서 그것을 가지고 집에 들어가서 나이 많은 야곱에게 내밀었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보더니 내 사랑하는 아들을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면서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그 아들들이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그러나 항상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 해 후에 은밀한 가운데 지은 그 죄는 많은 사람 앞에 있는 애굽의 궁중에서 환하게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여 간음한 뒤에 자기 죄를 덮기 위해서 그 남편 되는 우리아를 모함하였습니다. 우리아는 자기의 충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밀서를 자기 부하인 요압 대장에게 보내서 그 때 이스라엘 군대가 암몬 사람과 싸울 때인데 이 우리아로 하여금 최전선인 암몬 성 가까이 가서 싸우게 해서 암몬 사람의 칼에 죽게 하라는 이런 부탁을 한 것입니다. 요압은 그 부탁 받은 대로해서 우리아가 죽었습니다. 일시로 사람의 눈을 가리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험악한 죄는 오래지 아니해서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곳을 다 보셨습니다. 사람의 눈은 피하지마는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 가 예수를 몰래 잡아 주기로 약조하고 은 30 냥을 받을 때에 몰래 받았습니다. 비밀로 받았습니다. 그렇지마는 하나님은 그 모든 은밀한 죄도 드러냈습니다. 오늘날 2천 년을 내려오면서 가룟 유다 가 은 30 냥쯤 받은 것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죄까지 보시고 드러내시는 하나님인 까닭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죄를 드러내실 뿐더러 모든 죄를 죄대로 형벌 하십니다. 마귀는 항상 두 가지로 시험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니까 안만 죄를 회개해도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유혹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는『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암만 죄를 지어도 벌하지 아니하신다.』이렇게 사람을 속이려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인 까닭으로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중심으로 회개하는 자는 용서하여 주시지마는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형별을 내리십니다.
금생에도 형벌을 내리시고 내세에도 형벌을 내리십니다. 어떤 때에는 그 양심을 통하여 물론 먼저 벌하십니다. 어떤 때에는 그 육신에게 독한 병을 주시기도 하고, 모든 사업에 실패도 하게 하고, 어떤 때에는 급한 환난을 그 지방에 내려서 형벌 하십니다. 어떤 때에는 국법을 통해서 형벌 하십니다. 어떤 때에는 어떤 죄는 3, 4대에까지 내려가면서 형벌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형벌 이외에 마지막에 오는 세상에 가서 최후 심판을 통하여 반드시 형벌 하시고야 맙니다. 민수기 32장 23절에『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아무리 비밀 가운데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그 죄는 항상 그 사람의 집을 따라 다닙니다. 마지막에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것처럼 반드시 그 죄 지은 사람을 만나서 형벌을 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게 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후에 피할 자는 없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요 또 초대 프린스턴 대학의 학장으로도 잠깐 있은 조나단 에드워드라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한 번은「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잡힌 죄인」이라고 하는 문제로 설교하셨습니다. 그 설교하는 말 가운데 마치 죄인이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잡힌 것은 어떤 사람이 아주 흉측한 벌레를 손에 잡고 장차 불에 던지려고 하는 것 같은 운명에 있다고 하는 말을 우리에게 남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반드시 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육신만 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 영혼까지도 지옥 불에 던져서 형벌 하시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어떻게 세상에서 잠깐 지은 죄 때문에 영혼을 형벌 할 수가 있을까? 그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그러나 이 진리는 보통 성경에 가르친 말씀도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을 보면 얼마나 확실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0절에『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태복음 25장 41절에는『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가복음 9장 47-48절에는 주님께서 친히『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덕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두려워해야 됩니다. 참으로 두려워할 자는 하나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아니하십니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그러면 사람은 어째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잊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못 보시는 줄 압니다. 전파도 보이지는 아니합니다. 공기도 보이지는 아니합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실체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의 영혼도 보이지는 아니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모세의 신앙을 기록할 때에 이런 말로 기록했습니다.『그는 보이지 않는 자를 보이는 것 같이 하여 살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나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과 똑같이 그 앞에서 사는 것이 참된 신앙 생활이올시다.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비록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내려다보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이올시다.『눈을 지으신 자가 어찌 보지 못하겠느냐?』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하여 주십니다.
우리와 같이 성경을 분명히 배우지 못했던 옛날 사람의 말 가운데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암실 지심이라도 신목여전(暗室之心 神目如電). 어두운 방안의 속이는 마음일지라도 신의 눈이 번개처럼 밝게 본다고 하는 옛날 사람의 경고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시는 것이 제가 방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보는 것보다도 더 분명히 보십니다. 저는 여러분의 외모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외하면서 사는 것이 참된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X광선보다도 더 밝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이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생활을 하는 이에게 대하여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성경의 말씀과 똑같습니다.『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定罪)하리요.』정죄할 사람이 없습니다. 또 보세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장래에 대하여서도 두려워할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죄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은 항상 장래에 대하여 불안을 가집니다. 오늘은 평안했지마는 내일은 어떻게 되겠느냐? 오늘은 내 죄가 안 드러났지만 내일은 어떻게 되겠느냐? 항상 장래에 대하여 불안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마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죄는 멀리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안심과 화평(和平)이 있습니다. 또 보세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사실 죽는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천당 문을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죄인에게 있어서는 죽음이라는 것은 대 심판과 지옥의 형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항상 조심하는 것이 있다고 하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죄를 멀리 합니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내가 어찌 악한 일을 행할 수 있으랴.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내가 어찌 악한 일을 행할 수 있으랴. 죄를 항상 멀리 합니다. 둘째로는 혹 어떻게 잘못 되어서 죄를 지었으면 회개를 즉시 합니다. 죄를 묻어두지 아니합니다. 그 자리에서 곧 회개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항상 두려워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바라 볼 때에는 그렇게 두렵던 얼굴은 엄한 재판장의 얼굴이 아니요, 사랑이 가득한 우리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서 신앙 생활을 시작했지마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까이 보게 될 때에는, 그 때는 하나님이 두려운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사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두려운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나왔지마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를 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고 우리의 온 마음과 우리의 온 정성 다 바쳐서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까지 우리의 신앙이 올라와야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이 천상 천하에 두려워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우리를 축복 받는 눈으로 보시는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를 그냥 묻어둘 필요는 없습니다.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으면 이 두려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변해서 나타납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가 다 받기를 원합니다. (1960년 8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