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주 너를 지키리 (시편121:1-8)

새벽지기1 2017. 12. 13. 06:43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

오늘 아침에 읽은 시편은 121편은 제1편이나 제23편과 같이 사람들이 특별히 애송하는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설에 의하건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받아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올 때에 어떤 무명 시인이 이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올라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121편은 여행의 노래라 하는 부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길을 따나기 전에 이 시를 읽고 기도하는 풍속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도 홀로 자기의 고향을 떠나서 흑암(黑暗) 대륙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가족과 같이 이 시편을 읽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먼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 시편 121편은 우리 한국에서도 찬송가 21장에 편곡되어 자주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매우 단순합니다. 이 시인이 눈을 들어 산을 봅니다. 산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산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천지를 지으시고 온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켜주시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은 실족하지 않게 하신다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특별히 길을 갈 때에(옛날은 거의 다 걸어 다녔는데)실족하지 않게 하는 것은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항상 택한 백성을 돌보아 주시는 것을 찬송하였습니다. 또한 이와 같으신 하나님은 우편 그늘이 되셔서 낮에 해가 아무리 뜨거울지라도 길가는 사람을 좋은 그늘로 덮어주는 것처럼 그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여러 위험한 지대를 지나올 때에도 모든 환난 가운데서 건져 주었습니다.
육신만 지켜 주신 것이 아니고 영혼도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여호와께서 너희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이와 같은 승리 적 말로서 이 노래를 마친 것입니다.「너희 출입」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인간 생활의 전체를 가리켰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활은 아침에는 집을 나가고 저녁에는 집에 다시 들어오는 것입니다. 농부는 밭으로 나갑니다. 학생들은 학교로 나갑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상점으로 나갑니다. 직공들은 공장으로 나갑니다. 나가서 일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그 뿐만 아니고 또한 들어오는 것도 지켜주십니다. 저녁이 되면 다 집을 향해 돌아옵니다. 가정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지켜 주십니다. 밤에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어서 평안히 쉴 수 있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일상생활 전체를 향상시켜 주시는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 시편 가운데 특별히 여러 번 반복되어서 나온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너희를 지키시는 자시니라.』『너희의 출입을 지키시리로다.』 이「지킨다」로 하는 말이 거의 일곱 번이나 반복되어 이 시편에 나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을 지키어줍니다.
이런 시편을 읽을 때에 어떤 분 가운데 이런 생각이 나실 분이 간혹 계실지 모르겠습니다.『아! 이 시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귀한 노래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마는 사실 인간생활이라는 것이 어디 다 이럴 수가 있겠는가? 이 세상에는 얼마나 천재지변이 많고 질병과 고통이 많은가?』이런 생각이 한편 염두에 들어오는 이도 없지 않아 있을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기 대해서 한 두 가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밤과 낮으로 지키어주시겠다고 약조하신 것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 뜻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의 백성과 그의 기르시는 양에게 대하여 특별히 이와 같은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택함을 받은 그의 국민에 대하여 이와 같은 언약을 주었습니다. 시편 91편에는 이와 같은 사상의 노래가 있는데 거기는 첫 절에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라야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살수가 있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자와 은밀한 교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택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의 보호의 그늘이 항상 같이 있겠다고 하는 말씀을 분명히 기록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와 같은 시를 읽을 때에 우리 믿는 사람도 또한 환난을 당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도 들어옵니다. 우리 믿는 사람도 여러 가지 질고와 여러 가지 염려에 싸이게 되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한 두 가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는 견지와 사람의 보는 견지가 다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언제든지 육신을 먼저 보고 육신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참 사람이 되는 우리의 영혼을 먼저 보시고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먼저 생각합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더욱 더 축복하시기 위해서 우리 육신에게 재난을 더하실 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 같은 이에게도 그 육신의 가시가 허락되었습니다. 성 프랜시스 같은 이도 중병을 당하지 않았던들, 우리가 오늘날 아는 성 프랜시스가 되었을는지 의문인 것입니다. 파스칼 같은 사람도 그이가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너 가다가 말이 갑자기 뛰면서 다리에 떨어지고 강에까지 떨어져서 중상을 입는 체험을 가지지 아니했던들, 오늘날 우리가 읽는 파스칼의 명상록을 남겨 놓을 수가 있었을는지 의문인 것입니다. 사실 밀턴이 실명하지 아니하였던들 그이가 실낙원이란, 성경 다음에 간다고 하는 책을 우리에게 남겼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람은 언제든지 육신 편을 먼저 복 그 편을 생각하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의 편을 먼저 봅니다. 그런 까닭에 사실 우리가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볼 때에는 로마서 8장 28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모든 일들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택함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람의 눈에 재난으로 보이는 것도 심령의 축복인 것을 우리가 차차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사람은 항상 현재를 보고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재와 미래를 같이 보십니다. 우리 사람은 항상 현세를 보고 내세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현세와 내세를 같이 보십니다. 전에 요셉이 형들에게 억울하게 팔려서, 약관으로서 멀리 애굽으로까지 종으로 팔려 갈 때에,『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요샙을 이렇게 지키시는가!』불평한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 된 일을 보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갈 때에도 하나님께서 꼭 같이 지며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아기 모세가 난 지 석 달이 되자마자 갈대 상자에 넣음이 되어서 나일 강변 갈대밭 속에 버림을 받을 때에 혹 그 광경만 보고『아 하나님께서 어떻게 택한 백성을 이렇게 지키시는가!』낙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우리가 된 일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때에도 모세를 지킨 것이 분명합니다.
다니엘이 양심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기로 애쓰다가 사자 굴로 끌려갈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니엘을 이렇게 지키시는가 의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보면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지키신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골고다를 향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올라가시고 마지막에 골고다 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실 때에 하나님께서 그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어떻게 이렇게 버려 두시는가, 왜 지키시지 아니하시는가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마는 우리가 끝까지 보면,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그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을 지키신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사람들을 언제든지 지키십니다. 평안할 때에도 지키시고, 곤란할 때에도 지키시고, 순경에서도 지키시고, 역경 중에서도 여전히 지키십니다.
혹 어떤 분이 생각하기를『그거야 하나님께서 큰 사람들, 위대한 사람들은 물로 그렇게 지키실 것이지마는 나 같이 작은 사람이야 하나님께서 지키실 리가 있나?』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나 같이 미미한 사람, 창해일속과 같은 사람, 이런 사람도 하나님께서 지키실 까? 이 의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말씀했습니다.『너희들이 참새 다섯 마리가 엽전 두 푼에 팔리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그러나 이 참새 한 마리도 내 아버지께서 잊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참새보다 얼마나 귀하냐? 너희의 머리털까지도 내 아버지께서 다 헤 시나니 그런고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염려하지 말라고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는 큰 자가 없습니다. 작은 자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그 자녀이면 누구든지 귀하고 누구든지 위대하고 누구든지 보배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지키십니다.


이 지키신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선 지키는 사람은 자세히 봅니다. 지키는 사람은 살핍니다. 지키는 사람은 그 대상을 언제나 잊어버리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택한 백성을 지키시는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언제든지 그 택한 백성을 돌보시고 잘 살피시고 잊지 아니하신다고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암탉이 병아리를 항상 품듯이 어머니가 아기를 항상 지키듯이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지키십니다.
우리 찬송가에『온 세상 다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온 세상 사람이 나를 버리고 나를 잊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를 잊어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슬픈 가운데 있을 때에도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가 괴로운 가운데 있을 때에도 우리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고독과 우리의 유혹과 우리의 투쟁과 우리의 당면하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잊지 아니하시고 살피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이런 때에 더욱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지키신다고 하는 말은 둘째로 인도하신다는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시편 23편을 읽었지마는『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는 도다.』목자가 양을 지킬 때에 그냥 보기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살피기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는 그 양의 길을 인도합니다. 어디에 좋은 풀이 있는가? 어디에 맑은 시내가 있는가? 어떤 곳에 위험한 일이 있는가? 어떤 곳이 이리가 오는가? 모든 것을 살펴서 그 양을 인도하여 줍니다. 어떤 때에는 캄캄한 골짜기 같은 데를 지나가게 인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잡혀갈 때에도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아기 때에 나일 강변에 버림을 받은 것도 이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잡혀간 것도 하나님의 인도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것도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의 갈 길을 항상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키신다고 하는 말씀은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같이 계심이라. 주의 막대기와 그 지팡이가 나는 안위하시나이다.』목자가 양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양을 보호합니다. 원수가 올 때에 물리치십니다. 사자가 가까이 오려고 할 때에 사자를 쳐서 물리칩니다.
지킨다고 하는 것은 방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보존하여 준다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보호하시고 보존한다는 뜻을 여러 가지 상징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니…』그 말도 보호한다는 뜻입니다.『여호와는 나의 피난처니…』그 말도 보호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 여호와는 나의 방패, 여호와는 나의 구원의 불, 여호와는 우편 그늘, 여호와는 날개, 이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여 주신다는 뜻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뿐입니다.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지킨다고 하는 것도 우리를 보호하여 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무엇 하러 양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합니까? 양은 푸른 풀을 먹어야 살이 찝니다. 무엇 하러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합니까? 양은 물을 마셔야 잘 길러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굶주릴 때에 만나를 주시듯이 광야에서 목마를 때에 반석을 쳐서 샘물을 주십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겨서 멀리 광야로 도망갈 때에, 심히 피곤하여 로뎀 나무 아래에서 기진맥진하여 누워 자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떡과 물을 주셨습니다. 이렇듯 우리 믿는 사람들이 괴로운 광야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갈 때에 어떤 때는 우리의 심령이 기갈 하여지고 기진맥진하여 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때에도 그 택한 백성들에게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를 마실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4장 19절에 이런 말씀으로 기록하였습니다.『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나의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풍성하신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시겠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을 지키어 주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의 교훈만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성도들의 경험이 이와 같습니다. 가령 아브라함에게 물어 보십시오,『아브라함이여, 과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생을 지키어 주었습니까?』그렇게 물어 보면 제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은『아멘, 과연 그렇습니다. 내가 나의 일생을 돌아 볼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셨습니다.』이렇게 곧 대답할 줄 생각합니다. 이삭에게 그 질문을 해 보십시오, 야곱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요셉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모세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다윗에게 물어보십시오, 엘리야, 엘이사, 이사야, 예래미야, 모든 선지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이구동성으로『과연 그렇습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과연 내 일생을 지켜 주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만 그렇게 대답할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모든 성도들도 꼭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베드로 혹은 야곱, 요한 사도 바울 등 모두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도 모두 꼭 같이『과연 하나님께서 내 일생을 지켜 주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 성도들뿐만 아닙니다. 온 교회의 2천 년 역사를 통해서 과연 참된 신앙 생활을 한 모든 성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어거스틴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은 루터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혹은 다마스 에콰이너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혹은 칼빈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구동성으로『과연 내 생활을 지금까지 일생토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역사적 인물에게까지 갈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우리 가운데 과연 오래 참된 신앙 생활을 한 성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이들도 역시 꼭 같이『과연 내 일생을 돌아보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은혜로 지나옵니다.』이구동성으로 대답할 줄 생각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들을 지켜 주십니다.


어머니가 어느 때 아이들 잘 지키지 않으리오마는 아이가 위험한 곳에서 놀든지 아이가 무슨 병이 나게 되면 더 가까이 지켜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위험한 때에 살거나 우리도 무슨 병이 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더욱 가까이 지켜 주시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지켜 주시는데 우리는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근심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하나 하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켜 주신다고 하면, 무슨 까닭으로 염려하겠습니까?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여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과연 이 세상은 위험한 세상입니다. 과연 이 세상에는 불안과 공포가 가득히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라도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태할 때일수록 하나님께서 그 선민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내가 이렇게 젊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잘 지켜 주시고 잘 믿을 수 있지마는 이 다음에 늙어지면 어떻게 될까? 늙은 다음을 염려하는 양반들이 없이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사야 46장 4절을 읽을 때에 잘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염려가 없기를 바랍니다.『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백발이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우리가 죽을 때에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이 있으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가서 너희 있을 곳을 예비하면 내가 와서 너희를 영접해서 나 있는 곳에 있게 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더 기억하십시다.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이 되었는가? 과연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되었는가? 과연 우리가 그의 흰옷을 입었는가? 이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과연 그의 양이 되었으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과연 그의 흰옷을 입었으면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오순절에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베드로에게 와서 하는 말이『아! 우리가 어찌할꼬?』이렇게 물어 볼 때에 베드로의 대답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그 대답입니다.『우리가 어찌할꼬?』우리가 어찌하면 이와 같은 생활 가운데 들어갈 수 있을까? 대답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다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는 것, 이것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 학습도 세우고 세례도 베풉니다.
그러므로 항상 회개하고 온전히 죄에서 떠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여 주십니다.『여호와의 은밀한 곳이 거하는 자는 그의 그늘 아래 영원히 거할 것이니라.』여호와는 우리의 출입을 영원토록 지키시는 하나님이올시다. (1960년 7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