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성도와 그 옷 (로마서13:8-14)

새벽지기1 2017. 12. 11. 07:15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우리 육신생활에 꼭 없어서는 아니 될 것을 간단히 세 가지로 말합니다. 의, 식, 주, 즉 옷과 밥과 집이올시다. 그 가운데도 옷은 제일 먼저 꼽는 것을 보니까 아마 옷이 제일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실 옷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흔히 오늘날도 그렇지마는 특별히 옛날에 있어서는 옷을 보고 그 사람이 어느 민족에 속하는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중국 사람의 옷과 우리 나라의 옷이 다릅니다. 뿐만 아니고 옛날에는 옷을 보고 그 사람의 지위나 계급이나 모든 형편도 불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들이 입던 옷과 대신들이 입던 옷이 달랐습니다. 또 평민들이 입던 옷도 달랐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넓은 의미에서 옷은 그 사람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그 사람이 단정한 사람인지, 규모가 있는 사람인지 규모가 없는 사람인지, 그저 유행 따라 입은 사람인지 그렇지 아니한 사람인지, 그 옷 입은 것을 보면 대체로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박한 사람, 허영심이 가득한 사람, 이런 사람은 그 옷을 입은 것을 보면 그저 틀림없이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옷은 그 사람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상고해 보면 이 옷 입는데 대한 교훈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신명기(申命記) 22장 五절에 보면 이와 같은 교훈이 있습니다.『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이것을 보니 옛날에 남자들의 옷을 입고 다닌 여자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또 여자 옷을 입고 다니는 그런 남자들이 있은 모양입니다. 이것은 옛날 뿐 아니고 오늘날도 신문에 보면 어떤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고 무슨 노릇을 했다는 이런 이야기도 나고, 또 요즘 가만히 보면 여자들 옷 가운데 어떤 것은 점점 남자 옷과 비슷해 가는 모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와 남자를 구별 있게 창조하셨는데 그 옷이 분별 있는 것이 좋을 줄 생각합니다.
저 미얀마 같은 나라에 가보면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이 치마를 입고 사는데 얼른 보면 분별이 없는 것 같지마는 자세히 보면 그 치마 앞을 매는 법이 그릅니다. 조금 다른 것이 있습니다. 남양군도나 아프리카에 가 보면 이 양반들은 그렇게 옷을 많이 입지는 않지마는 그래도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 같아서는 지금도 남자는 남자의 옷을 입고 여자는 여자의 옷을 입으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교훈인 줄 생각합니다.


또 전도서 9장 8절을 읽어보면『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이러한 권면이 또한 이 말씀은 옷을 깨끗이 입으로는 것입니다. 더럽게 입지 말고 옷을 깨끗이 휘게 빨아서 입으로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교훈뿐만 아니고 성경을 보면 옛날 유대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에 병난 사람의 집에 갔다 오든지, 사람의 시체가 있는 집게 갔다 왔으면, 그 옷을 잘 빨라고 하는 교훈이 있고, 어떤 경우는 옷을 불살라 부리라고 하는 교훈도 있습니다. 옷을 깨끗이 단정히 빨아서 입으라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사치하게 입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치한 것과 깨끗한 것은 다릅니다. 검소한 의복이라고 깨끗이 입을 수 있습니다. 사치하게 입으면서도 더럽게 입을 수 있습니다. 옷은 깨끗이 입으라고 여기에 가르쳤습니다.
신약에 와서 보면 사도 바울 선생이 디모데 전서 2장 9-10절에 특별히 그 때 여자들에게 이런 권면을 하였습니다.『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닿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너무 머리를 땋거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단장하려고 하지 말고 선행으로 단장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거의 같은 말로 권면하였습니다. 베드로 전서 3장 3-4절을 읽으면『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여러분, 이사야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 때에 예루살렘에 살던 그 여자들이 옷단장을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책망한 구절이 있습니다.『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그러므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香盒)과 호신부(護身符)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손거울과 세마포(細麻布)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숫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그 때 여자들이 어떻게 단장을 하고 다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단장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교훈을 종합해 보면 옷은 단정히 입고 깨끗이 입을 것이나 사치하지 말며 옷으로 단장하려고 하지 말고 아름다운 심령과 선행으로 단장을 하라는 권면이올시다.


오늘 우리 사회를 좀 살펴보고 신문지상에도 이따금 나는 것을 보면 우리 한국에서 이와 같은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옷차림 하는 것을 보면 너무 사치하다는 그런 평판이 많이 있습니다. 또 그런 가운데 예수 믿는 여자들이 사치하다 하는 그런 말도 더러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그 까닭은 주일날 예배당에 올 때에는 할 수 있는 대로 깨끗한 옷을 입고 오니까 아마 특별히 그런 말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언제든지 옷을 단정히 입고 깨끗이 입을 것이지마는 사치한 데 흘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자로서 단장도 도무지 없을 수 없지마는 도에 지나치면 안 됩니다.
사실 심리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너무 사치하게 옷을 입거나 너무도 지나치게 단장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열등감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나는 좀 모자란다, 나는 좀 남만 못하다, 그러니까 이 모자라는 것을 보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옷에만 치중해서 보충하려고 합니다. 사실은 열등감에 이렇게 도에 넘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어떤 이가 너무 옷을 화려하게 입고 다닌다든지 무슨 단장이나 화장을 도에 지나치게 하는 것은『나는 모자랍니다. 나는 못 생겼습니다.』이런 광고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먼저 번에도 서인도 제도에 가서 일 주일 있었지마는 거기는 거의 다 흑인들이 사는데 미국에도 많이 있지마는 그 흑인 여자들이 옷 입고 다니는 것이나 화장한 것을 보면 참 대단히 민망합니다. 그 얼굴에다 아무리 흰 분을 발라야 새까만 얼굴이 희어질 리가 있습니까? 또 흑인들은 대체로(이거 미안한 말입니다. 용서하십시오,)입술이 두텁습니다. 그 두터운 입술에 새빨간 칠을 하니, 아름답다고 하는 것보다 무섭게 모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을 동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 사실은 마음속에 열등감이 있어서 도에 지나치는 일을 합니다. 내게 대해서 자신 있게 사는 사람, 내 생활에 대하여 자신 있는 사람은 이렇게 도에 지나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나라 같은데서 이와 같은 때에 도에 지나치는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참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옷은 간단하게 말하면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추울 때에는 추운 것을 막기 위해서 옷을 입습니다. 그러면 더울 때는 뭐 하려고 입습니까? 더운 때에는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몸을 가리우기 위해서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해방된 이후로 서양 풍속이 이 한국에도 많이 들어오면서 점점 여름옷은 몸을 많이 내놓는 경향으로 나가는 것이 분명히 보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한 이야기지마는, 몇 해 전에 로마에 가서 성 베드로 교회를 보려 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구경하려 오는데(그 때는 여름입니다.) 남녀노소가 줄을 지어서 예배당을 구경하려 들어옵니다. 그러나 들어올 때 좌우 옆에 꼭 두 사람이 서서 소매 없는 옷을 입고 온 여자들은 전부 못 들어가게 합니다. 그런 옷을 입고는 들어오지 못한다 하며 가서 다른 옷을 입고 오라고 충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좋은 풍속인 줄 생각해서 우리 영락교회에도 그런 풍속을 꼭 내겠다고 그 때 마음속에 작정하고 오기는 왔습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의 사는 형편을 보면 원조의 덕택으로 많은 사업이 재건되어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을 거의 다 생산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때에 어떻든지 우리는 국산을 애용하고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을 입을 것이지 이런 시기에도 불구하고 외국산을 좋아한다든지 일부러 외국 것을 더듬는다든지 하는 이와 같은 일은 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상보훈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합니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맙시다. 사람의 사는 것이 옷을 잘 입는 것이 아닙니다. 옷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 하나만 띠고도 일생을 산 모양입니다. 성 안토니오라는 성자는 일생토록 가죽 저고리와 가죽 바지만을 입고 살았다고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인도의 간디 옹 같은 분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 이도 간단히 아래 의복과 위에는 솔을 하나 걸치고 영국 황제에게까지 가서 면회했습니다.
사람의 사는 것이 옷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옷을 잘 못 입었다고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옷을 다른 사람처럼 못 입었다고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알아야 됩니다. 이와 같은 시대, 이와 같은 사회에서 옷을 너무 잘 입고 다니는 것은 그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무슨 증거인가 하면『나는 내 민족도 모르고 국내 경제도 모르고 나만 아는 사람이오.』하는 광고판을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예수 님께서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도 읽었지마는 성경을 보면 우리가 밖에 입는 옷 외에 꼭 속에 입을 옷 몇 가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첫째로는 예복을 꼭 입으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이나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꼭 예복을 입고야 들어갔습니다.
보통 옷 입고를 못 들어갔습니다. 여러분께서 예수 님의 혼인 잔치의 비유를 아시거니와 많은 사람을 청해서 혼인 잔치에 손이 가득한데 얼마 후에 임금이 들어와서 여러 손님을 돌아보다가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하는 말이『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이곳에 들어 왔느냐?』그 사람은 유구무언으로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고 그랬습니다. 그 임금은 종들을 명해서 이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사람을 바깥 어두운데 내어쫓으라고 그랬습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늘 나라의 어린양의 잔치에 들어가려고 하면 예복을 입고야 들어갑니다. 요한 계시록 7장 9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 보좌를 둘러싸고 각 나라, 각 족속, 각 방언으로 많은 사람들이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는데 그 사람들은 전부 몸에는 흰옷을 입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려고 하는 사람은 흰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이 흰 예복은 무엇을 가리켰습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어서 회개와 믿음으로 오는 그리스도로부터 죄 사함을 받은 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의 예복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이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은 흰 예복을 입지 아니하고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여기 있는 말씀과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는『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실 죄를 회개하고 참된 마음으로 세례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로 우리의 온 몸을 둘러싸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우리의 인격을 삼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우리의 성품을 삼고 그리스도의 생활로 우리의 생활을 삼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정결과 온유와 자비와 긍휼과 청렴(淸廉)과 담대(膽大)와 관용과 용서와 인내와 사랑을 우리의 것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이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으리 만큼 그리스도로 옷 입듯이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살라고 하는 그 뜻입니다.
여기에 이북에서 오신 분이 많이 있을 터이니까, 오랜 옛날 피현 교회에서 일 보신 최명준 목사님을 아마 기억하실 분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이 목사님을 믿는 사람들은 최 목사님이라고 불렀지마는 제가 들으니 안 믿는 사람들은 최 예수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그저 그 최 목사님은 최 예수로 나타난 모양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예수 님으로 우리의 옷을 삼아야 되겠습니다. 또 이 옷은 언제나 입어야 됩니다.


아마 여기에 우리도 그런 분 많이 계실 줄 알지마는 보통 서양 사람들은 주일날 입는 옷이 특별히 있어서 주일날은 깨끗한 옷을 입고 왔다가, 그 다음에는 보통 일할 때 입는 옷을 갈아입는 그런 사람 사람들이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보통 옷은 이렇게 입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입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아닌게 아니라 주일날 올 때에만 예수님 옷을 입고 오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는 모양입지다. 주일날 올 때에는 아주 거룩해 보이고 깨끗해 보이고 화평해 보이고 다 좋습니다. 그러나 다른 날 되면 예수 님을 벗어 놓습니다. 시기와 질투와 여러 가지 다른 옷으로 바꾸어 입습니다. 그렇게 입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 예수님을 입는 것은 언제든지 우리가 입어야 되겠습니다. 또 이 옷은 어떤 환경에서나 어떤 데서든지 항상 입어야 되겠습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건강할 때나 병날 때나, 우리가 사업에 실패할 때나 사업에 성공할 때나, 우리가 살 때에도 이 옷을 입어야 되고 죽을 때에도 이 옷을 입어서 우리의 생활이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는 성경에 보면 특별히 갑옷을 입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1절을 보면『마귀의 궤계(詭計)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胄)를 입으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공중에 권세 잡은 자들과 안한 영과 씨름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우리 믿는 사람은 여러 가지 악마의 세력과 부득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되겠습니다. 지리로써 허리띠는 띠고 의의 흉대(胸帶)를 붙이고 화평의 복음으로서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깨어 있어서 전신갑주를 입고 모든 악한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여야 되겠습니다.
바로 어제 우리가 6·25五 10주년을 기념했습니다. 지금은 공산 침략은 휴전 중에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이 앞으로 절대로 힘이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계속해서 깨어 있지 아니하면 안 될 것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 견지에서 이 세상을 살펴 볼 때에는 6·25는 휴전된 것은 아닙니다. 38선은 그냥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쟁은 그냥 계속됩니다. 악한 마귀는 삼킬 자를 언제든지 찾아다니는 이러한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보존하고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려고 하면, 흰옷을 입고 그리스도를 일상생활에서 옷 입듯 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전신갑주를 입어야 되겠습니다. (1960년 6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