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영원히 거하는 생활 (요한1서2:12-17)

새벽지기1 2017. 12. 5. 06:38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다른 곳에 있는 성경 중 몇 곳을 보겠습니다.『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 후서 4장 18절이올시다.『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베드로 전서 1장 24-25절인데 본래 이사야 40장 8절의 인용이올시다.
이 세 성경 구절 가운데서 우리는「영원」이라고 하는 말 또는「세세토록」이라는 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같은 말씀이올시다. 잠간이라고 하는 말과 영원이라고 하는 말, 마르고 혹은 떨어진다고 하는 말과 세세토록 있다고 하는 말, 지나간다고 하는 말과 영원이라고 하는 말이 대조되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잠깐 되는 것도 있는 반면에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마르고 떨어지는 것이 있는 반면에 세세토록 있는 것도 있습니다. 지나가는 것이 있는 반면에 영원히 있는 것도 또한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 선생이 고린도 후서 4장 18절에서 교훈 한 말씀을 생각해보면『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이 우주에는 보이는 존재가 있고 보이지 아니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해는 볼 수 있습니다. 밤에 달도 볼 수 있습니다. 무수한 별들도 볼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대 자연계는 볼 수 있습니다. 산도 볼 수 있고 바다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 있는 것만 우리가 볼 줄 알면 아니 됩니다. 이 볼 수 있는 것 배후에 볼 수 없는 이가 계십니다. 곧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물질 세계와 하나님을 비교해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물질 세계보다도 먼저 계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는 시작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셔서 무시무종(無始無終)하신 하나님이올시다. 이 물질 세계는 끝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끝이 없습니다. 무종 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올시다.
세상 나라와 그 권세와 그 영광은 사람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나라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영원한 무궁한, 시간에 비하면 잠깐 있다 없어지는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있습니다.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 보이는 부분이 있고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입은 옷은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사람의 그 속에 있는 영혼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아는 것은 보이는 육신은 잠간이요,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은 영원히 불멸한다고 하는 것도 우리는 잊지 아니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거하는 생활을 하려면 보이는 것만 돌아보아서는 되지 않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돌아 볼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찾을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성경은 하나님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나 온 우주에 충만하시고도 남으시는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우리가 과학만 공부할 것이 아닙니다. 종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바라 볼 줄 알아야 영원히 거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님께서는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영원히 있는 하나님의 나라, 영원히 있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한 것입니다.


영적 생활을 돌아 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육신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衣食住)만 볼 줄 알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의 심령의 생활에 필요한 소망, 사랑도 있어야 할 것을 우리가 알고, 반드시 영적 생활을 위해서 없으면 아니 될 이 세 가지를 북돋우기 위해서 각별한 노력을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실재를 찾고 실재를 구하려고 노력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 또한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거듭 주시는 이 말씀,『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나니라.』우리가 이 교훈도 반드시 받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옛날 애굽의 권세와 영광을 읽은 바 있습니다. 그 모든 찬란한 문화와 영광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보면 그 찬란한 문화와 그 굉장한 권세도 지금은 다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페이지를 통해서 옛날 바벨론의 권세와 문화와 찬란한 영광을 또한 읽는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와서 보면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는 고적 몇을 내어놓고는 다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떨어진 것을 우리는 목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옛날 로마의 권세와 그 문화와 그 영광을 또한 읽고 기억하는 바입니다. 그렇지마는 오늘날 보면 역시 다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외국 역사를 살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고구려의 권세와 그 문화와 영광의 시대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백제의 권세와 그 문화와 영광의 시대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통일한 신라의 그 권세와 문화와 영광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고려조의 찬란한 문화를 또한 기억합니다. 우리는 이조의 권세와 문화와 영광도 다 기억합니다. 그렇지마는 오늘날 와서 보면 거의 다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떨어진 것을 우리는 목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주님 말씀은 세세토록 또한 있는 것을 우리는 목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산 것을 우리는 목도합니다. 공의는 나라를 흥하게 하고 죄는 나라의 수치가 됩니다.『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스스로 속이지 말고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심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흥망성쇠의 인간 역사 위에 무지개와 같이 옛날이나 오늘이나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니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라.』『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잊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이 천년 전이나 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고 죄 있는 인간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이 아닙니까? 과연 육신에 속하는 모든 것은 풀과 같이 마르고 육체에 속하는 모든 영광은 꽃과 같이 떨어지지마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주님의 말씀은 시대가 변하였지마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지나가지마는 지나가는 바가 없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변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히 거하는 생활을 하려고 하면 꽃과 같이 떨어지는 이 세상에 근거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히 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생활의 근거를 두어야 될 것입니다. 일시 일시 변하는 인간의 명상이나 인간의 사상에 두지 말고 변하지 아니하는 우주의 지표적 진리가 되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생활의 근거를 두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북경 구경을 한번 했습니다. 고궁을 구경하고 별궁도 여러 곳에 가서 구경하는데, 한 곳에 가니까, 그 안내자가 하는 말이 아름다운 궁궐 가운데 어떤 한 방을 가리키면서 그 방이야말로 청조 말기에 가장 사치하고 호화롭고 세도를 부리던 서태후(西太后)가 살던 방이라고 합니다. 그 방에 들어가 보니, 아무 것도 없고 낡은 침대 하나 있고 그 위에 베개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안내자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렇게 호화롭고 그렇게 사치하고 그렇게 세도하던 서태후가 마지막에 남기고 간 것은 그 베개 하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갑니다. 세상의 권세도 지나갑니다. 세상의 영광도 지나갑니다.


제가 이번에 미국에 가서 30여 년 전에 제가 졸업한 대학을 한번 더 방문하는 혜택을 가졌습니다. 집은 여전합니다. 캠퍼스도 여전합니다. 오히려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집도 여러 개를 더 지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가운데 한 가지 섭섭한 것은 30여 전에 저를 가르쳐 주던 은사는 볼 수 없고, 다만 이 도회에 아직까지 살아 남아 있는 은사는 80노인 벤더벨드 박사라고 하는 한 분뿐이었습니다. 여러 은사들은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은 지나가는 세상입니다.
제가 이번에 석 주일 남짓하게 한국을 떠나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다녀온 셈입니다. 돌아와서 서울을 들어오게 될 때에 한 가지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상은 삼각산은 여전합니다. 한강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정계를 보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옛 정부는 지나갔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정권뿐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와 같이 자나갑니다. 권세도 지나가고, 일대의 문화도 지나가고, 예술도 지나가고, 주의와 사상도 지나가고, 모든 유행도 지나갑니다. 너무 유행만 따르지 맙시다. 시국도 지나갑니다. 너무 시국에 들떠서 부화뇌동하지 맙시다. 어떤 이들은 요즘 데모만능인 줄 생각합니다. 청춘도 지나갑니다. 청춘을 자랑하지 맙시다.


제가 6·25때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한 두 곧 따라갔습니다. 저는 서성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라고 그래서 서성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며 설교를 했습니다. 옛날 이야기니까 이런 말해도 괜찮을 줄 압니다. 예배를 다 보고 여러분을 인사하는데 좀 알 분도 있고 모를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캄캄하고 자그마한 어떤 할머니가 저한테 인사를 하면서 목사님 절 알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좀 많이 당합니다. 암만 생각해야 생각이 안 납니다. 그래서 미안하지마는 저는 정신이 없어서 미쳐 생각이 안 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하는 말이『저를 모르겠어요? 저는 저 남산 모루, 전에 목사님이 남산 모루에 와 계시지 않았습니까? 거기 있을 때 그 교회에 다니던 아무개올시다.』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40년 전에 그 남산 모루에서 알던 그 아무개는 얼굴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얼굴을 한 잘 생긴 여자 가운데 하나로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그랬는데 3, 40년 후에 보니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청춘도 지나갑니다. 세상만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정욕도 지나갑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욕망도 연령을 따라서 지나갑니다. 어릴 적에 있던 욕망이 좀 크면 사라집니다. 청년 시대의 욕망이 노년이 되면 지나가고 맙니다. 우리의 정욕도 환경의 변함에 따라고 또한 변합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세상에서 지나가는 욕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나가지 아니하는 것을 여기에 한 가지 말씀했습니다.『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인간 역사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개인 생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가운데도 창천이 유의 생남자(蒼天이 有意 生男子)란 말이 있습니다. 푸른 하늘이 뜻이 있어서 남자를 내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우리를 이 땅에 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을 찾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경륜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고 거하겠다고 여기에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전에 제가 평양에서 학교에 다닐 때에 흔히 대동강변 그 청루벽 아래와 모란봉과 을밀대와 그런 곳이 자주 산보하였습니다. 산보를 할 때에는 가끔 이런 생각이 납니다. 대동강의 물결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또 항상 끊임없이 아래로 흘러갑니다. 그렇지마는 한편에 높이 속은 모란봉이나 을밀대 청루벽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냥 우뚝 서서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물결과 같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이 만세 반석 위에 생의 근거를 둔 사람은 영원히 거하는 것이올시다.
그래서 영원히 거하는 생활의 비결은 첫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바라 볼 줄 알아야 됩니다. 둘째는 영원한 주의 말씀에 근거를 두어야 되겠습니다. 셋째는 영원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되겠습니다.
제가 벌써 20세기 초엽에 나서 거의 반세기 이상을 살았습니다. 시대의 변천도 무수히 제 눈으로 목도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물론 일본 시대에도 살았습니다. 해방된 다음에 잠깐 동안이나마 공산당 시대에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그 다음에 남한에 내려와서 군정 시대에 살았습니다. 또 이승만 박사 정권 시대에 살았습니다. 지금, 이 과도 정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일본 시대에 살면서 보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 시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할 수 있는 대로 일본 사람처럼 살려고 하고, 말도 일본말만 자꾸 하고, 풍속도 일본 풍속을 따르고, 의복도 일본 의복을 자주 입고, 이렇게 살던 사람들을 상당히 많이 보았습니다. 일본 시대가 지나갈 때에 일본시대와 같이 그런 사람도 다 지나갔습니다. 몰락되었습니다.
이북에는 아직까지도 공산당 시대입니다. 공산당 하는 대로 살아야 하겠다고 거기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을 따라가고 그들에 아부하며 그들의 뜻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는 줄 압니다. 분명히 알 것은 공산당 시대도 반드시 지나갈 터인데 그 때에 그들도 지나갈 것뿐입니다.
군정시대에 더러 보았습니다. 군정시대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대단히 분주하게 다니던 사람을 보았습니다. 군정 시대가 지나갈 때에 그런 사람도 함께 지나갔습니다. 이승만 씨 정권 시대에 또한 보았습니다. 그 때에 세상을 바라보고 어떻든지 여기 맞기 위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살던 사람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이 시대가 지나갈 때에 그들도 방금 지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 앞에 무슨 시대가 오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 것은 하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이 세상에 있어서, 그 시대에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그 세상과 그 시대가 지나갈 때에 함께 지나갈 것입니다. 어떤 시대에 살던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을 해야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지 지나가지 않습니다. 또 우리 육신 시대가 다 지나가고 하늘 나라의 시대가 올 때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된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세세토록 있느리라.』
(1960년 5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