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조국을 위하여 (느헤미야1:1-11)

새벽지기1 2017. 11. 30. 07:03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1:4-5)

오늘 아침, 느헤미야 1장을 읽었습니다. 모든 선지자가 다 애국자이지마는 특별히 느헤미야는 직접 조국 건설에 헌신한 애국 선지자입니다. 본래 바사 수산궁에서 높이 등용되어 있었지마는 한번은 자기의 형제 중 하나인 두어 사람들이 자기의 조국 예루살렘을 다녀와서 그 곳 사정을 전하여 준 것입니다. 그 곳에 있는 동포들이 큰 환난에 빠졌고 모든 사람들에게 능욕을 받으며 성은 훼파(毁破)되고 성문은 소화되었고 하는 비참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느혜미야가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한 것은 친히 1장 4절에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혜미야는 이와 같은 비참한 소식을 듣고 세 가지를 하였습니다.
첫째는 조국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둘째는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셋째는 느혜미야 2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조국을 위하여 자기가 할 일을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 세 가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국을 위하여 울라. 둘째는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라. 셋째는 조국을 위하여 내가 할 일을 다 하라.


먼저 그는 이와 같은 소식을 들을 때에 울었습니다. 수일 동안 슬퍼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눈물이 있습니다. 눈물은 급격한 감정에 휩쓸릴 때에 흔히 납니다. 그런고로 슬플 때에, 반면에 너무 기쁠 때에 눈물을 흘릴 수가 있습니다. 눈물은 누구나 때때로 흘리지마는 눈물은 인격의 척도가 또한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때에 눈물을 흘리는가? 장부비무루(丈夫非無漏)나 불새이별간(不새離別間)이란 옛 글이 있습니다.『장부가 눈물이 없음이 아니지마는 이별하는 사이에는 흘리지 않는다.』이런 말이 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가? 누구나 자기를 위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누구나 자기 가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민족 전체를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아니 인류 전체를 위하여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가? 느혜미야의 눈물은 나를 위한 눈물은 아닙니다. 자기의 가족을 위한 눈물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민족 전체와 조국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눈물의 예언자란 이름을 가진 예레미야의 눈물도 자기 자신을 위한 울음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조국을 위한 울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을 넘어 오시다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부르짖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눈물도 역시 조국을 위한 눈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올라가실 때에 많은 여인들과 여러 사람들이 같이 좇아오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집을 위하여 울라.』조국을 위하여 울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였습니다. 생각하면 과연 조국을 위하여 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 민족이 근 40년 동안이나 일본 민족의 탄압 아래에서 많은 애국자들이 피를 이 땅에서 흘린 것입니다. 1945년 해방을 갖는 기쁨을 가졌지마는 천만 뜻밖에 국토는 양단 되어서 많은 이북 사람들이 여러 대를 이어 살던 고향과 산천을 떠나서 피난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0년에는 6·25사변이 일어나서 악독한 공산당의 남침으로 말미암아 수백만에 달하는 아까운 젊은 생명들이 이 땅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휴전된 지 7년 되는 금년에 이 땅에 또한 이와 같은 참변이 일어나서 꽃 같은 어린 학생들이 백여 명이나 이 땅에서 쓰러지고, 여러 백 명이 부상을 당하고, 이 젊은 사람의 피가 또 한번 우리 땅을 적시게 될 때에, 생각하면 얼마나 비통하고 참혹한 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너와 네 집을 위하여 울라.」울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감정에 휩쓸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울라고 하는 말은 얼마나 아픈가를 깨달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일이 얼마나 큰 것을 깨달아서 이런 일이 다시 이 땅에 일어나지 않도록 맹세를 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울라고 하는 말은 조국을 극진히 사랑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눈물이 없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찌 이런 때에 피눈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느혜미야는 조국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그러나 우는 것만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읽어보니 느혜미야는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느례미야만 조국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도 단순히 조국을 위하여 운 것만 아닙니다.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다니엘도 조국을 위하여 망국의 설음을 표시하기 위해서 울은 것만 아닙니다.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선지자 다니엘은 자기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것은 큰 범죄로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조국을 위하여 기도합니까? 우리가 오늘 아침에 다 우리 조국을 위하여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절감한 마음으로 이 민족과 이 겨레를 위해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다른 민족과 같이 살 수 있는 민족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까? 기도를 하면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두 사람이 기도하려 성전에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세인이요,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별로 기도한 것이 없습니다. 그 엄숙한 자리에 가서도 자기를 자랑한 것밖에 별로 없습니다. 오직 세리만이 자기의 가슴을 두드리며 자기의 죄를 자복 하였습니다.


느혜미야의 기도를 1장에서 읽어보았습니다. 여기 보니 느혜미야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와 나의 아비의 집이 범죄를 행하였습니다. 우리가 다 같이 심히 악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우리는 다 계명과 율례(律例)와 규례(規例)를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이 죄는 자복 합니다.』회개와 참회와 자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니엘도 예루살렘을 향하는 문을 열어 놓고 기도할 때에 다니엘 9장 5절에 이런 말로 기록하였습니다.『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아오며』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죄를 회개할뿐더러 자기 민족 전체의 죄를 대신 회개하면서 민족 전체를 대표해서, 말하자면 민족의 대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민족의 죄를 잡고하며 용서하여 주기를 호소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 여기 특별히 무슨 죄를 자복하였습니까? 주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않은 것을 자복하였습니다. 주의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은 것을 자복하였습니다. 주의 계명과 율례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을 통하여 주신 도덕의 법과 하나님께서 그 시대 그 시대에 적당하게 주시는 국가의 법률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신 도덕의 법도 지키지 못하고 국가의 법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법을 지키지 않고 범한 것을 여기에 자복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경이 죄는 무엇이라고 정의하여 주시는지 아십니까? 요한 1서 3장 4절에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곧 불법이라.』죄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불법한 일을 하는 것이 모든 죄입니다. 불법이 많은 곳에 불평과 불만이 생기고, 불평과 불만이 쌓이는 곳에 울분한 마음과 원한이 생기고, 울분한 마음과 원한이 터질 때에 여러 가지 불상사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법과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해야 됩니다. 우리 민족은 이와 같은 비통한 사실을 앞에 놓고 위정자를 비롯해서 일반 국민에게 이르기까지 나의 불법한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깨끗한 민족이 되는 이런 계기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어린 생명들의 피 흘림이 결코 헛된 데 돌아가지 아니하고 이 흘린 피야말로 민족의 죄를 대신 속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깨끗한 희생의 제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불법의 죄를 회개하면서 우리가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더욱 중한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이 때에 반성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이 세상에 두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금으로 이 사회에 두셨지마는, 과연 우리 믿는 사람들이 정계에 갔으면 정계에서, 관청에 갔으면 관청에서, 사업장에 있으면 사업장에서, 교육계에 있으면 교육계에서, 그 자리에서 과연 빛과 소금의 직책을 하였습니까? 깊이 반성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특별히 우리 교직자들, 목사들이나 장로들도 특별히 반성하고 회개하여야 되겠습니다.
이상합니다. 1950년에 대구에서 총회가 모였을 때에 목사와 장로들이 크게 싸움을 하면서 그 후에 교회가 분열되더니 그 해로 6·25五참변이 생겨서 우리 민족에 큰 화를 끼쳤습니다. 작년에도 대전서 모여서 여러 가지로 쓸데없는 문제를 가지고 싸우며 분쟁을 하더니 결국은 도처에서 교회를 분열시키며, 이런 일이 있더니 이상스럽게 금년에 들어서 서울역의 큰 변을 비롯하여 오늘날 이런 참변이 우리 민족에게 미쳤습니다. 이것이 결코 우연하게 보이지를 아니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 민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우리 민족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자복하는 민족의 대 제사장의 직분이 있는데 이런 사명을 지닌 우리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이 민족의 살 길이 어디 있습니까? 깊이 반성하면서 우리가 회개의 기도를 들여야 되겠습니다.


셋째로『조국을 위하여 네가 할 일을 하라.』사도 바울이 다메섹에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 님을 만나 회개한 다음에 제일 먼저 드린 기도가『주여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란 그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가지고 얼마 전 게스와인 목사께서 본 교회에 오셔서 설교도 하였습니다. 회개한 사람이 드릴 기도는『주여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과연 내 죄를 회개했다고 하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 드릴 기도는,『내가 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입니다.
이 대답은 성경에 분명히 해 주었습니다. 미가서 6장 8절을 보면『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사는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은 예수 님 말씀과 꼭 같습니다. 예수 님 말씀에 마태복음 23장 23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화 있을찐져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며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의는 공의요, 인은 인자요, 신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공의를 행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회개한 사람에게는 이 앞으로는 온전히 정의대로 공의대로 할 것입니다. 상계에도 공의가 있어야 됩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도 공의가 있어야 됩니다. 정치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선거에도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공의가 이 앞으로는 있어야 되겠습니다. 인자를 사랑하라고 그랬습니다. 죄인에게는 용서로 인자가 나타납니다. 불행한 사람에게는 긍휼로 나타납니다. 피차 평신도간에는 친절과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민족이 좀더 공의를 행하고 좀더 피차에 인자하였던들 이런 일이 설마 있었을까 생각이 됩니다. 겸손히 주와 동행하라고 그랬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며 하나님과 의논해서 무엇을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겸손히 순복해서 살라고 우리에게 말씀했습니다.
조국을 위해서 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조국을 위하여 내 죄를 회개하며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조국을 위하여 내가 할 일을 다 해야 되겠습니다. (1960년 4월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