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여호와의 손 (이사야40:21-31)

새벽지기1 2017. 12. 20. 07:15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2:18-2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짤라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민11:23)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번은 어떤 교우가 자기 목사에게 가서 묻기를,『어찌해서 주님께서 가룟 유다 같은 이를 택하였습니까? 그건 이상하지 않습니까?』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는 곧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 생각하더니 서서히 대답하는 말이『나는 그것보다 더 이상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주께서 왜 나 같은 사람을 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누구나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반성할 때에는 오직 자기는 죄 덩어리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실 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 공통의 경험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부족을 여실히 살펴볼 때에는 과연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번 말씀한 바와 같이『누가 능히 구원을 얻으리이까?』하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줄 생각합니다. 좀더 양심이 예민하면『나는 쓸데없는 사람이야.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랴.』이렇게 낙심하기도 쉬운 줄 생각합니다. 혹은 자포자기할 수도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히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줄 압니다. 구원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주임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나는 그리스도라. 그리스도 내가 너희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 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고, 그 다음에 다시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 택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손안에 있습니다.『아무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이것은 우리가 분명히 압니다.
어린아이가 어떻게 자랍니까? 살 수 없는 핏덩어리로 세상에 나서 어떻게 자랍니까? 그것도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손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손이 이 핏덩이 같은 것을 거들어주고 젖꼭지에 물려주고 옷을 입히고 목욕해 주고 잘 때에 두드려 주면서 재워주고 모든 것을 다해 주고 보호해 주고……어머니의 손이 있는 까닭으로 장성해 갑니다. 누가 이 어린 아기를 어머니의 손에서 빼앗을 수 있습니까? 어진 어머니는 차라리 자기의 생명을 바칠지언정 자기의 아기를 배놓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어린 심령과 하나님의 관계와 같습니다.


우리의 어린 심령, 아무 힘없는 심령이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완성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손이 계십니다. 아버지의 손이 어린 심령을 붙들어 줍니다. 인도하여 줍니다. 생명수로써 먹입니다. 생명의 양식으로 공급하여줍니다. 원수가 올 때에 막아 줍니다. 시험에 빠지려고 할 때에 이끌어내 줍니다. 아버지의 손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보존하고, 우리의 연약한 심령이 아주 멸망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하늘 나라까지 능히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 기억하시지요? 한 번은 예수님께서 밤에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갔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있다가 물위에 무엇이 보이니까 처음에는 무서워서 요물인 줄 알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반가워서『아, 예수님이면 자도 물위로 걸러가게 해 주세요. 불러 주세요.』하면서 담대히 예수님을 맞아 물위로 걸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큰 물결을 보고 두려운 생각이 나서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여러분, 성구를 자세히 읽어보세요.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를 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체험이올시다.
우리는 어떤 때 이 죄악의 세상에 살 때에 무서운 죄악의 물결에 휩쓸려서 빠져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튼튼한 손이 붙들어 주지 아니하면 아주 멸망할 것밖에 없습니다. 아마 오래 믿으신 분은 이와 같은 경험을 여러 번 당하신 줄 생각합니다. 저도 여러 번 당했습니다.


예레미야를 보면 예레미야가 한 번 어떤 곳에 가니까 토기장이가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듭니다. 이런 그릇도 만들고 저런 그릇도 만듭니다. 어떤 때에는 그만 그릇이 파손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그릇을 버립니까? 아니올시다. 그것은 다시 갖다가 반죽해서 파괴한 것이라도 다시 좋은 그릇을 만듭니다. 토기장이의 손은 진흙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무 것이나 만들 수 있습니다. 파괴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신령한 토기장이가 되시는 우리 아버지의 손은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고 우리가 아무리 죄악 세상에 살면서 죄악에 부딪혀서 어떤 몸이 깨어진다고 하여도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손을 가지고 그것을 회복시켜서 온전히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좋은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격이 한 곳 파손을 당했다고, 여러분의 신앙이 한 곳 깨어졌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아버지의 손에 맡기세요. 아버지께서 다시 회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37편 24절에는 이런 말씀으로 기록되었습니다.『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여호와께서 그 손으로 붙드시는 고로 어떤 때에는 넘어지지마는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합니다.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손이 붙드시는 까닭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했습니다.『여호와의 손이 짤라졌느냐? 내가 네게 말하는 이 말이 응하는 것을 네가 볼 때가 있으리라.』하나님의 손은 짧지 아니하십니다.
멀리 천왕성, 해왕성의 운행까지도 하나님의 손이 주장하시지마는 반면에 봄 동산에 어린 싹이 나는 것도 하나님의 손이 어루만지는 까닭입니다. 아침 이슬에 장미꽃 봉오리가 점점 벌어져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도 하나님의 손이 또한 붙들어 주시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이 손은 옛날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바사 같은 큰 나라들의 흥망성쇠만 주장하시는 손이 아닙니다. 나일 강변 갈대 밭 사이에 버림을 받은 어린 핏덩이 모세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그 어린것을 친히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이올시다. 죽지 낳고 살겠다고 멀리 애굽에 갔다가 불행의 불행을 만나서 남편을 읽고 또 아들 형제 다 잃고 외로운 그림자로 돌아서는 나오미의 발길까지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아무리 높거나 아무리 깊을지라도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악의 깊은 구렁텅이에 빠졌다고 할지라도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곳까지 미칩니다. 하나님의 손은 4천여 년 전에 아브라함의 생활만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생활만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생활만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20세기의 이 남한의 이 복잡한 거리거리에 허덕이는 성도의 발길까지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이올시다. 남한의 성도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풀무와 같은 북한 공산당 정치아래에서 철의 장막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험한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을 또한 붙들어 주시는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손을 의지합시다. 

 
제가 오래 전에 당한 경험을 한 가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주저하지마는 오래 전 이야기니까 괜찮은 줄 압니다. 제가 신의주에서 교회 일을 볼 때에 무슨 일이라고 다 말할 필요는 없지마는 한 번은 크게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만 낙심이 나서 일할 마음도 없어지고 용기도 없어졌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나 혼자 있는 방에 들어와서 그저 정신없이 방바닥에 넘어졌습니다. 넘어져 있는데 이상합니다. 지금까지 생각해도 확실히 모르지요, 내가 그 동안 잠깐 잠이 들어서 꿈인지 아닌지 모르지마는 이상한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제 자신이 어떤 길을 갑니다. 길이 대단히 험합니다. 또 어떻게 피곤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상 더 갈 수가 없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오른편쪽으로 그만 쓰러졌습니다. 그러니까 난데없이 어떤 큰손이 - 30년 전에 본 일이지마는 어제 본 일 같아요 - 아마 사람의 손의 10배나 큰손이 오른쪽에 와서 넘어지는 나를 얼른 왼쪽에도 못 넘어지게 붙듭니다. 앞으로 꼬꾸라집니다. 또 두 손이 앞으로 와서 앞으로도 거꾸러지지 못하게 합니다. 그냥 계속해서 그 험한 길을 이 손이 붙들어서 가게 합니다.
그런 내 자신을 보다가 내가 깨어서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읽은 성경이 이상하게도 에스라 7장 9절입니다.『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 에 이르니라.』이것이 에스라의 이야기입니다. 에스라가 멀리 바벨론 에서 포로로 잡혀간 자기의 동포와 같이 정월 초하룻날 예루살렘을 향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먼 광야 길입니다. 원수가 많은 험악한 길입니다. 그런 길인데도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넉 달을 결려서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우리의 천성 행로가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를 믿고 주를 따라가는 길도 마치 바벨론 에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 길처럼 황막한 광야 길입니다. 때때로 험한 준령이 우리의 앞을 막습니다. 장강대야(長江大野)가 우리의 앞을 막습니다. 때때로 함정이 있습니다. 때때로 원수가 복병하여 우리를 기다립니다. 연약한 우리가 어찌 감히 이 길을 갈 수 있습니까? 이 길을 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도우심으로 승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손은 선합니다. 아버지의 손은 만 유의 손입니다.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떠나실 때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손에 여러분의 심령을 부탁하세요. 살 때에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고, 세상을 떠날 때에도 아버지의 손에 우리의 영혼을 부탁합시다. 우리 사람은 약합니다. 나를 믿다가는 실패합니다. 언제 어질지 모릅니다. 마귀는 우리보다 강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튼튼히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세례 받은 어린 학생들도 있습니다. 새로이 믿는 여러분도 많이 있습니다. 이 앞으로 인생의 험악한 길을 걸어 갈 때에 나는 믿지 말고 아버지를 믿고 그 손에 여러분의 심령을 전적으로 의탁하세요. 그러면 예루살렘에 가기까지 무사히 이룰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1960년 7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