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성도의 모습 (로마서 1:1-17)

새벽지기1 2018. 1. 3. 07:12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각이 있기를 원하노라.』(롬1:7)

로마에 있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에게 이와 같은 축복을 하였습니다. 로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여기에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로마에 있던 교인들뿐만 아니고 고린도에 있던 교인들도 고린도 전서와 후서 첫 장에 읽어보면 똑같이 성도라고 하는 말로 불렀습니다. 에베소서에도 그렇게 불렀고, 빌립보서에도 그렇게 불렀고, 골로새 서에도 역시 골러새에 있던 모든 교인들을 성도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성도라고 하는 뜻은 무엇이며 우리가 과연 성도가 되었을진대 성도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이냐? 이런 문제를 간단히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성도라고 하는 말은 헬라 원어로 좀더 쉽게 번역한다고 하면「거룩한 이들」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문자 그대로 번역한다고 하면 이렇게 성도라고 즉「거룩한 무리」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성자들」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성도라고 즉「거룩한 무리」혹은「성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뜻은 무슨 뜻인가? 과연 그 때에 모든 교인들은 그 성품과 생활이 거룩하게 변화가 되었든가?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니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성도라고 부르기는 불렀지마는 고린도 전서와 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 교회에는 당파를 일으킨 사람도 있고 칠계(七戒)를 범한 사람도 있었고 송사를 한 사람도 있었고 여러 가지로 범죄한 사람들이 그 가운데 사실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불구하고 그 때의 교인들을 성도라고 불렀은즉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이미 말씀한 대로 그 뜻은 죄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죄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또는 완전하여졌다고 하는 뜻도 아닙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의미에서 그들을 성도라고 불렸는가?


여러분이 얼른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지은 예배당을 보통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집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집을 지은 돌이나 나무가 다른 집을 지은 돌이나 나무와 다른 것이 있습니까? 사실상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의미에서 이 집을 성전이라고 부르느냐고 하면 이 집은 모든 다른 집과 온전히 구별해서 성별해서 하나님께 바친 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집은 세상 사람에게 속한 집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하는 집입니다. 따라서 이 집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그 목적에 의지해서 사용하는 집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 집을 선전이라고, 거룩한 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성도라고 부르느냐? 거룩한 이들이라고 부르느냐? 그것도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불완전하고 우리가 아직도 때때로 죄를 짓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거룩히 구별해서 불러내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불완전한데도 불구하고 실상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뜻대로 사용하시고 그의 목적대로 우리를 쓰실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다 거룩한 무리라고, 성도라고 혹은 성자들이라고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 천주교에서는 성도라고 하는 말, 성자라고 하는 말을 좀 다른 의미에서 쓰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교회에서는 옛날부터 이 성도를 좀 국한해서 어떤 특수한 이에게만 성자라고 하는 이름을 주게 되었습니다. 가령 신약의 여러 사도들과 유명한 분들에게 특별히 성자란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래서 성 베드로, 성 바울, 혹은 성 마가, 이런 이름으로 부릅니다. 또는 교회 사상의 유명한 교부들이나 유명한 순교자들에게 특별히 성자의 이름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이라 한다든가 성 폴리갚이라 한다든지 이런 이름을 특별히 주어서 부릅니다. 또한 그 다음에 교회 역사를 내려오면서 그들의 성품이나 생활이 특별히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한 생활을 한 까닭으로, 특별히 교회 위원회가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과연 그들이 성자라고 이름 불리우는 사람들을 심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복자라 하는 이름도 주고, 어떤 사람은 성자라 하는 이름도 주어서, 가령 성 프랜시스니, 혹은 성 캐더린이니 하는 이들은 교회에서 특별히 성자라고 하는 이름을 주어서 그런 성호를 가지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풍속이 괜찮은 줄 생각합니다. 그렇지마는 본래 우리 신약에 나타나는 성도라고 하거나 혹은 성자라고 하는 뜻은 어떤 특수한 사람만을 가르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온전히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다 성도, 혹은 성자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앉은 여러분은 다 성도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세인트(Saint)입니다. 성자입니다.


여러분, 성 프랜시스, 혹은 성 캐더린, 성 바나바, 성 바울 하는 것처럼「성」자를 하나 붙이고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보세요. 가령 여기 김순복이라 하는 이가 있다고 하면 성 김순복, 김순이라고 하는 사람은 성 김순이,……이것이 신약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택한 아들과 딸 하나 하나를 성자라고 부르는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 하나가 과연 성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뜻을 고요히 생각할 때에 과연 이와 같이 귀한 이름을 받았은즉 이 이름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 이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15-16절에 이와 같은 말씀으로 권면하였습니다.『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예수님께서 모든 오고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요한 복음 17장 17절에『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기록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는『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이와 같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권면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귀한 성도의 이름을 받았으면 그 이름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전에 어떤 경관이 거지 통에 가서 거지들을 전부 조사하는데 제일 먼저 있는 거지를 만나서,『네 이름이 무엇이냐?』물어 보니까 얼른 대답하는 말이『내 이름은 김백억 이올시다.』순경이 그 말을 듣고『김백억 이야, 금백억이 거지 통에서 사나?』아마 아버지는 그 아들을 낳은 다음에 너무 기뻐서 이 다음에 돈 많이 모으고 잘 살라고 이름을 백억으로 지은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이 백억이라고 하는 녀석이 마지막에는 거지 통에서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아름다운, 보배로운, 거룩한, 이름을 부었으면 이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될 것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속도」의 생활을 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우리는 성경이 교훈을 통해서, 또한 과거 2천 년 동안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특별히 거의 완전한 자리에 갔다고 하는 여러 정자들의 생활을 통해서, 이 성도의 생활의 모습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대강 짐작해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들의 생활의 첫째 특색은 성경이올시다. 거룩하고 깨끗한 것이올시다. 시편 24편에『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 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虛誕)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다시 말하면 손이 청결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뜻이 청결하고 입이 청결합니다.


전에 어떤 성자는 정한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추운 겨울에 얼음 구멍에 그 몸을 던진 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떠한 성자는 자기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옷을 벗고 가시덤불에 뒹굴어서 자기 몸을 괴롭게 함으로 자기의 마음에 깨끗한 것을 회복한 성자들도 없이 않아 있습니다. 산 물고기는 짠 바닷물에서 살지마는 그 실은 짠물에 배지 아니합니다. 참 성도는 더러운 속세에 살지마는 더러운 물이 그 마음에 배어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에베소서 5장 3절에 사도 바울은 이런 말로 에베소 교인들을 권면하였습니다.『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이것은 성도의 마땅한 말입니다. 성도의 모습의 첫째 특색은 성결함에 있습니다. 그 마음이 성결하고 그 입이 성결하고 그 뜻이 성결하고 그 행실이 성결해서 더러운 세상에 살지마는 그 생활을 깨끗이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성자들의 생활을 살펴볼 때에 둘째 특색으로 나타나는 것은 화평(和平)이올시다. 시편 34편에『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詭詐)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화평을 구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도 산상보훈(山上寶訓)에『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모습의 둘째로 뛰어나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화평입니다. 그 마음속에 화평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평이 있고,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평이 있으며, 그 말이나 성품에 화평이 있고, 그 생활이 화평을 구하는 생활, 이것이 특별히 뛰어나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하며 어떠하든지 악을 선으로 이기는 이러한 사실입니다. 분한 마음이 나도 그 마음을 참고 원한을 마음가운데 오래 품지 않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 주는 그 화평의 마음이 곧 성도의 마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전에 성 프랜시스가 자기의 제자들과 같이 어떠한 산간에 살 때에 어느 날 저녁 프린시스가 잠깐 나간 사이에 그 산중에 있던 도둑 몇 사람이 들어와서 그 제자들을 보고 먹던 떡이 있으면 좀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제자들이 대단히 노해서『너희 도둑놈들아, 너희들이 일해서 먹지 아니하고 도둑질 해다 먹다가 마지막에는 우리 선생님의 마른 떡까지 뺏어 먹으려고 너희들이 여기 왔느냐?』단단히 책망해서 쫓아버렸습니다. 프랜시스가 돌아 왔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를 다 듣더니 프랜시스가 오히려 자기 제자들을 책망하면서『도둑이건 도둑이 아니건 배고픈 사람에게 떡을 주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인데 너희들이 왜 떡을 주지 아니했느냐?』떡을 내어주면서『이제 이 떡을 가지고 산에 가서 그 도둑을 찾아서 이 떡을 꼭 먹이고 돌아 오라.』그래서 이 제자들이 밤새도록 찾아다니다가 마침 내에 도둑들을 만나서 그 떡을 다 먹였다고 했습니다. 그 도둑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이 제자들과 같이 프랜시스에게 와서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서 그 가운데는 프랜시스의 유명한 제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화평을 사랑하고 죄를 용서해 주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아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올시다.


지금 아프리카에 가 있는 슈바이처 박사가 이런 말을 한 번 했습니다. 자기가 본래 자라난 교회에 어떤 잘 믿는 교인이 한 분 계신데 이 분은 아주 귀가 멀어서 설교는 전혀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예배당에는 꼭 출석합니다. 한 번은 물어봤다고 합니다.『당신은 설교 한 마디도 듣지 못하면서 뭘 하러 예배당에 늘 옵니까?』『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그 사도신경에 있는 성도의 교통을 믿는데 내가 비록 설교는 듣지 못하지마는 성도들이 모이는데 같이 가서 성도와 교제를 가지고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마땅히 내가 성도로서 할 것이 아닙니까?』성도의 교통을 중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이 성자들의 생활을 살펴보면 셋째 특색은 무아의 봉사입니다.「내」가 없는 봉사입니다. 말없는 봉사입니다. 지금도 프랜시스 이야기를 했지마는 왜 프랜시스를 성자라고 합니까? 그는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병자를 도와주고 문둥이를 치료해 주고, 김 못매는 이 있으면 김 매주고, 추수 미쳐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추수해주는 등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하와이에 문둥이들만 사는 섬에 가서 일생을 바친 다미엔을 왜 성자라고 합니까?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아나 20세기에서 우리 기독교도들 가운데 성자라고 이름을 들은 이는 제가 기억하는 대로는 아마 서양에는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 일하는 슈바이처 박사이고 동양에는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일본의 하천풍언 목사일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다「내」가 없는 말없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봉사가 귀하지마는「나」라고 하는 것이 들어가면 봉사의 가치가 없어집니다. 성경의 말씀과 같이 향기로운 기름에 죽은 파리가 빠진 것과 같습니다. 내가 모르는 봉사, 내가 없는 봉사, 이것이 성도의 모습의 특별한 특색인 줄 생각합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아프리카 카메룬에 가서 순회할 때에 어떤 곳에 가 보니까 전부 흑인만 있고 선교사는 지금 두 집밖에 없는데 그 중 한 가족은 안식년으로 미국에 들어갔고 그 흑인만 사는 동네에 미국 여자 선교사 혼자서 병원을 차려놓고 의사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들으니까 본래 그 여자의 아버지가 개척 선교사로 그 곳에 와서 의사 활동을 하다가 열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도 이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딸 하나만 남았습니다. 이 딸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미국에 돌아와서 의학 공부를 하고 자기가 의사가 되어서 아버지의 사업을 계속해서 그 흑인들만 사는 그 곳에서 홀로 그들을 봉사하는 광경을 볼 때에 제 마음 가운데 과연 여기에 성도의 모습이 있구나 하고 큰 감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과거 두 주일 동안에 우리 교회에 큰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본 교회에서 전국 교역자 수양회를 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 산상에 가서 산상 기도를 했습니다. 이 전국 교역자 수양회와 산상 수양회를 통해서 우리 교회 가운데 어떤 장로님들, 몇 분 집사 님들, 몇 분 권사 님들이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밤도 여러 날 남모르게 세웠습니다. 이렇게 남모르는 가운데 봉사하였습니다. 산간의 백합은 사람이 보든지 안 보든지 아름답게 피고 그 향기를 온 골짜기에 채우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이 이러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든지 못 보든지, 알든지 모르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며 봉사하는 것이 성도의 생활인 것입니다. (1960년 8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