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제 2 기회 (요나3:1)

새벽지기1 2017. 12. 31. 15:22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욘3:1)

여러분께서 아시는 대로 요나에게 이미 첫 번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너는 일어나서 저 큰 성읍(城邑)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처서 외치라. 그 악독(惡毒)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 명령을 순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우선 니느웨 성은 유대 나라에서 거리가 매우 먼 성입니다. 사막 길을 멀리 가야하고 그 길은 험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 때에 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니느웨 성을 수도로 하는 앗수르는 그들의 원수 되는 나라였습니다. 사실 그들의 북편 나라인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아주 멸망을 당한 것이 사실이올시다. 그래서 니느웨가 복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멸망을 당하는 것이 국가적 견지에서 나으리라고 하는 이와 같은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진 것입니다. 요나도 그 시대, 그 나라 백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편협한 민족주의를 가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냥 자기 나라에 있자니 마음은 불안하고 그래서 결국은 그 반대 방향인 서편으로 발길을 돌이켜서 항구 욥바 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욥바에 가면 물론 여러 나라의 배가 와서 기항하고 있는 곳입니다. 아마 제 생각에 이 요나는 어떤 배를 탈까 하여 여러 배에 다니면서 어디 가느냐고 물어본 줄 생각합니다.『이 배는 어디 갑니까?』『아, 이 배는 저 두로에 갑니다.』『그건 안돼.』또 다른 배를 만나서『이 배는 어디로 갑니까?』『이 배는 저 구브로로 갑니다.』『아 그건 좀 괜찮지만 너무 가깝군.』또 다른 배로 가서『이 배는 어디로 가려합니까?『이 배는 저 애굽에 있는 알렉산드리아로 가려합니다.』『그거 조금 멀지마는 그렇게 멀지 않군,』그 다음에 또 다른 배를 만나서『이 배는 어디로 갑니까?』물어보니까『이 배는 먼 스페인 다시스라고 하는 데로 갑니다.』그 때에야『이게 꼭 맞는 배로군, 난 멀리 가기를 원하니까.』그리고서 선가를 내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니느웨로 가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기 원해서 배 밑으로 들어가 어떤 구석에서 잠이 들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시편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내가 주의 길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타고 저 먼 바닷가에 갈지라도 거기 또한 주님께서 계시나이다.』하나님께서 배 가운데도, 바다 위에도 역시 계신 것입니다. 얼마 가지를 못해서 우리가 요나 서를 읽는 대로 지중해의 큰 풍파가 일어났습니다. 멈추지 않습니다. 파도는 더욱 높아갑니다. 모든 선원들은 어찌할 줄 모릅니다. 배는 깨어져 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선적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배에 실었던 모든 물건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여객들은 당황해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각각 믿던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면서 야단이 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보니까 그냥 배 밑창에서 잠만 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모습을 볼 때에 대단히 성이 났던 모양입니다. 가서 그 사람을 깨우면서,『잠자는 자여 이 어찜이뇨, 너도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때 요나가 깨어 보니 배 안이 말이 아닙니다. 풍랑은 그냥 심하고 하니까 그 때 사람들 생각대로『아 이건 필연 어떤 죄인이 우리 배를 타서 이와 같은 풍랑이 이는 거니까 이 죄인을 잡아서 처치할 수밖에 없겠어. 우리 부득이 제비를 뽑자.』제비를 뽑는데 금방 요나가 제비에 뽑혔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이 요나를 둘러싸고 묻는 말이『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며,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느 민족에 속하며, 무엇 하는 사람이며, 무엇 하러 가는지 다 자복(自服)하라.』그 때 자복하지 않게 되었습니까? 

 
사실대로 말했습니다.『나는 이스라엘 사람이요. 나는 요나 라고 하는 사람이요. 내 직업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로 가서 전파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거기로 가기가 싫어서 지금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하던 길이올시다.』그렇게 자복을 하니 여러 사람의 말이 그러면 그렇겠지, 긴 이야기 다 할 필요 없겠습니다. 그만 요나는 도망하다가 바다에 던지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셔서 아주 멸망시키지는 아니하시고 큰 물고기를 준비했다가 요나로 하여금 아주 죽는 것은 면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깊은 물 속에서 자기의 가던 길을 통회하고 잘못한 죄악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회개하고 자복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오늘 우리가 읽은 대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해서『너는 이제 일어나서 저 큰 성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라고 외쳐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40일 이내에 그 온 성이 무너질 것을 경고하여라.』 이 때에는 요나가 서슴지 아니하고 곧 일어나서 아무리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지체하지 아니하고 빨리 그 성에 가서 사흘길이나 되는 성을 두루 다니면서 하나님 말씀 그대로 외친 것입니다.


그 결과는 그렇게 악하던 니느웨 성이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시작해서 서민에게 이르기까지 온 성이 금식을 하며 회개하며 새로운 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쳐서 그 성에 내리려고 하던 재앙이 내리지를 아니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한 번 주님의 명령을 배반했던 요나를 구약 성경 가운데 제일 위대한 전도자로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구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실패를 하고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하지마는 그 가운데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때에 제 2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의 생활에도 이와 같은 경험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님의 수제자로서 마지막 날 저녁에도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자기는 생명을 버릴지언정 절대로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대 제사장 앞에 끌려갔습니다. 멀리서 심문 받으시는 것을 봅니다. 혼자서 많은 원수들 사이에 같이 불을 쪼이면서 멀리 그 광경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 약한 틈을 타서 갑자기 어떤 비자가 하는 말이『너도 역시 갈릴리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니냐?』갑자기 겁이 나서 베드로는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한번만이 아니고 세 번째까지 부인하며 결국은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그 때 닭의 울음을 들었습니다.『네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곧 그 자리를 뛰어 나가서 바깥 어두운 곳에서 통곡을 하며 하나님 앞에 그 죄를 자복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베드로는 매우 약한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힘이 없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예수 님을 만나 보기는 하였지마는 아직까지도 용기는 다시 얻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할는지 몰랐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디베랴 바닷가에 다시 나타나서 그 때 베드로를 다시 불렀습니다.『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만일 그때에 주님께서 시몬에게『네가 담대하냐? 네가 믿음이 남보다 나으냐?』라고 물어 보았던들 베드로는 대답할 말이 하나도 없었겠습니다. 그러나『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볼 때에 중심에 더듬어 보지 주를 사랑하는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담대히『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예수님 말씀이『그러면 족하다. 네가 내 양을 먹여라.』이렇게 베드로에게도 두 번째 예수님께서 요나의 아들 시몬을 부르시고 그에게 양을 먹일 위대한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베드로에게도 둘째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모른다고 하는 큰 죄를 지은 베드로이지만 회개할 때에 두 번째 기회를 주어서 주를 섬길 수 있고 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신약 가운데 나타나는 귀한 청년,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 요한  이 비슷한 경험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첫 전도 여행을 떠날 때에 젊은 사람으로서 그 두 사람을 여러 가지로 심부름도 하고 시중하기 위해서 바로 바나바의 생질이 되는 마가 요한이란 젊은 사람을 택해서 같이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구브로라고 하는 섬에 가서 전도를 잘 했습니다. 거기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 더베까지 갔습니다. 거기 가서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이 마가 요한은 더 따라가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마는 좌우간 바울이 보기에는 못마땅한 일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여행을 떠나게 될 때에 바나바는 다시 이 마가 요한 이 이제 같이 가기를 원하니 데리고 가자고 했지마는 사도 바울은 절대로 거절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다시 데리고 가서 뭘 하겠는가? 다른 사람 신라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베드로 전서와 후서(後書)를 읽어보면 베드로가 여러 흩어진 열두 지파(支派) 믿는 사람한테 편지할 때에 내 사랑하는 아들 마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마가 요한 이 그 후에 베드로를 따라 다니면서 베드로를 잘 수종(隨從)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서 예수님의 행적을 자세히 듣고 우리가 읽는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바울의 가장 마지막 편지라고 하는 디모데 후서를 보면 디모데에게 부탁하면서『너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겨울 전에 나에게 오너라.』그러면서『혼자 오지 말고 네가 올 때에는 꼭 마가 요한 을 데리고 오너라. 이 요한 이 우리 주의 일을 하는데 매우 필요한 청년이다.』그것을 보면 마가 요한도 첫 번에는 실수했지마는 다시 재기한 청년이올시다. 한 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라고 하는 우리 한국의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실수와 실패는 곧 인간이올시다. 그렇지만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제二의 기회를 주십니다.


운동경기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선수가 달리다가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경주를 계속하는 사람이 최후의 승리를 얻습니다. 전쟁도 그렇습니다. 첫 번 전투에 패전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2차 대전의 역사를 지금도 여러분께선 생생히 기억하시지마는 연합국 측에서 처음에는 다 패전했습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영국 할 것 없이 독일에게 첫 번 전투에서는 전부 패전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다 쫓겨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유럽을 점령하고 히틀러도 온전히 굴복시킨 것입니다. 태평양전쟁도 역시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일본에게 영국과 미국이 아주 참패를 당했습니다. 진주만이 다 부서지고 말레이시아를 다 빼앗기고 싱가포르를 다 점령당하고 필리핀도 다 점령당하고 마지막에 맥아더도 쫓겨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최후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뿐 아닙니다. 사업도 그렇습니다. 사업도 우리가 실패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마지막에 성공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어 나아갈 때에 나는 원하지 아니하지만 모르는 가운데 유혹이 들기 쉽고 지옥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시험에 드는 것을 아는 대로 곧 뉘우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은혜를 주시고 두 번째 기회를 주어서 그런 사람을 통해서도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를 했거나 시험에 들었을 때 기억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낙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시험에 들기 전에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조금 지어도 괜찮다면서 더러 시험에 들기를 권면 합니다. 하지마는 정작 시험에 한 번 듭니다. 그 다음에는 마귀의 말이 변합니다.『옳지, 너 죄 지었지? 이젠 소망 없어. 누가 다시 너를 신용 할 테야? 누가 너를 다시 사람으로 볼 태야? 누가 너를 용납 할 테야? 넌 아주 절망이야.』이렇게 마귀가 시험합니다.
죄 지었을 지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둘째 축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탕자가 탕자로서 갖은 죄를 지었습니다. 허랑 방탕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마는 돌아올 때에는 아버지께서 두 손으로 영접해서 환영했습니다. 삭개오 같은 사람이 민족을 배반하고 요즘 말로 부정축재를 하였고 여러 가지 죄를 지었지마는 온전히 회개할 때에 주님께서 영접해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렸던 살인 강도가 죽기 전에 회개할 때에 주님께서는 그 강도를 낙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시험에 들어 한 번 죄 지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은혜를 주시고 두 번째 축복을 반드시 주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한 번 돌아온 다음에는 다시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라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하라고 우리에게 권면 했습니다. 만일 요나가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미칠 때에 전에 실패한 것을 다시 돌아보고 용기를 잃었다고 하면, 어떻게 니느웨 전 성을 회개시킬 수가 있었겠습니까? 만일 베드로가 자기가 예수를 세 번씩 모른다고 한 그 참패한 것을 잊어버리지 못하였다고 하면 어떻게 오순절 날 담대히 서서 3천 명을 회개 시켰습니까? 존 웨슬리 같은 사람도 처음으로 미국에 가서 전도하다가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큰 은혜를 받아서 주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우리가 다 잘 압니다. 다만 한 가지 조심할 것은 내가 다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죄를 다시 짓지 않기 위하여 우리가 물론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자를 다 구원해 주시고 마지막으로『나도 너를 정죄(定罪)하지 아니하니 평안히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면서 한 마디 더 했습니다.『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누구나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빠졌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죄는 짓는 것도 몰론 안 된 일이지만 죄는 짓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더욱 큰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실수를 하였을지라도, 한 번 실패를 하였을지라도 다시 돌아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는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 메어 주실 것임이라.』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셨지마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 다시 우리를 낫게 해 주시고 싸 메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가 주홍 같을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흰 눈과 같이 희게 하여 주시고 흰 양털과 같이 희게 하여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이든지 실패한 분이 계십니까? 혹 시험에 든 이 계십니까? 낙심하지 마십시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셔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제 3의 기회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내일이 바로 해방 15주년 8월 15일이올시다. 지금 우리 민족은 국가적으로 제 2공화국을 건설하는 중에 있습니다. 슬픈 일이지마는 하나님께서 한 번 우리 민족에게 해방을 주시고 제1 공화국을 건설하는 기회를 주셨지마는 우리는 첫 번 나라를 건설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개인이나 한 정당에게만 책임을 돌리 수는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 민족 전체가 연대적 책임이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 민족에게 제2의 기회를 주십니다『두 번째 너희는 나라를 바로 세워 보아라.』둘째 번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이 두 번째 주시는 기회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렵니까? 전에는 부정을 행하였지만 다시는 부정을 행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전에는 불의를 행하였지만 다시 불의를 행하여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전에는 뇌물을 주고받고 돈을 주고받고 무엇을 했지만, 이 앞으로 그런 일을 다시 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전에는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법을 안 지켰지만 이 앞으로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귀중한 둘째 기회를 주실 때에 우리 민족 전체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정신을 가지고 이 두 번째 주시는 은혜를 감사히 받고 이 나라를 바로 건설하도록 총진군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1960년 8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