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끝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기도하시고,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며, 홀로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교훈과 복음 전파와 치유 사역에 기도하신 것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다른 것을 하시지 않고 오직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고난이나 위기를 당했을 때, 질병을 앓거나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삶의 근간이 흔들릴 때, 전적으로 주님께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살고 기도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기도하셨을까요?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 기도하셔야만 했을까요?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과 끝임 없이 교통하기 위해서 기도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과 호흡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 있는 관계, 교통하는 관계를 유지하려면 잠을 자도 기도요 밥을 먹어도 기도요 생각도 기도요 의식도 기도라야 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했더라도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인생을 많이 살아도 하루 세 끼 식사를 해야 살 수 있듯이, 오래 전부터 예수님을 믿었고 아무리 믿음이 좋을지라도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공기로 숨을 쉬는 것처럼, 사람은 기도로 하나님과 호흡하고 의식하며 동행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그때 네 가지를 행하셨는데 첫째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성만찬을 가진 것입니다. 셋째는 다락방 강화(요 14~16장)를 주신 것입니다. 넷째는 중보 기도(요 17장)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 자리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가십니다. 기드론은 ‘어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시냇물이 검게 보였든지, 시냇가 숲이 검었든지 간에 어둠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드론 시내 저편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을 찾으십니다. 그 이유는 물론 기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절박한 상황을 앞두고 하신 일은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큰일을 앞두고 걱정만 일삼지만, 걱정과 기도는 다른 것입니다. 생각이나 고민은 기도와 다른 것입니다. 밤새 잠 못 자며 많은 생각으로 고심했다고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처 ‘겟세마네동산’
신약 성경의 4복음서는 겟세마네동산에 대해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9절 말씀에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감람산은 겟세마네동산이 있는 곳입니다. 마가복음 14장 26절 말씀에 감람산이라 했고 32절 말씀에 겟세마네라고 했으며, 마태복음 26장 36절에 겟세마네라고 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그들과 함께 성만찬을 가지시며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7장의 전체 말씀처럼 자신을 위해, 제자들을 위해, 장차 믿음을 가질 사람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신 후에 습관처럼 자주 찾으시던 기도의 동산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고난과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인생에서 고난과 위기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인생들은 고난과 역경의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생은 고난 앞에 섰을 때 염려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자학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모든 한계 상황을 극복케 하는 중요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2절 말씀을 봅니다.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예수님께서 습관처럼 겟세마네 동산을 찾으셨고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자주 그곳에 갔습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도 겟세마네동산에 가면 항상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춰 볼 때, 우리도 습관처럼 찾아가는 곳을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외로울 때 찾는 곳이 어디입니까? 배신당했을 때 찾아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위기에 닥쳤을 때 자주 찾는 곳이 어디입니까?
기도는 영적 호흡
저는 성도님들의 집에 기도방을 하나 만들었으면 합니다. 굳이 기도하지 않더라도 집안에 기도방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집안의 어느 한 공간에 어렵고 힘들 때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겟세마네동산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자주 찾는 기도원도 한 군데쯤 있었으면 합니다. 혹시 시골에 농장을 갖고 계시는 분은 그곳을 기도처로 사용하시면 좋습니다. 시골 농장에서 휴식을 취해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휴식도 공허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 마음에 주님의 평강이 임하십니다. 일전에 저는 어느 빌딩에 갔는데, 마침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든 직원들이 식사하러 가느라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한 여직원이 귀퉁이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더라고요. 그 복잡하던 빌딩 공간은 그 여직원으로 인해 기도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까이 다가가진 못하고 너무 아름다워 옆에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집안이면 어떻고, 직장이면 어떠며, 버스 안이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마음에 여유를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 주시고 불안한 믿음을 붙잡아 주시며,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고 주님의 승리를 맛보게 해 달라고 습관적으로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겟세마네동산인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이 세였을 때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유대인의 절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부모님이 어린 예수님을 찾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 가보니 성전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반갑고 놀라워 어린 예수님에게 왜 걱정하며 찾도록 만드느냐고 했더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2장 49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기도회에서 성도님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항상 만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일이 있건 없건 항상 교회에 오셔서 서로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올 때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일이 없어도 항상 교회에 왕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 아버님은 시골에서 사셨는데 볼 일이 있어서 서울에 가실 때면 교회에 들르셨다가 올라가셨습니다. 볼 일을 보신 후 기차를 타고 도착하셔서 교회에 들르셨다가 집으로 오셨습니다. 달리 할 일이 없으시면 교회의 담벼락을 붙잡고 기도하시곤 하셨습니다.
고난을 앞두고 기도하신 예수님
특히 우리는 고난을 당했을 때 주님께 엎드려 전심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에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극복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기도를 하면 고난도 쉽게 빨리 끝이 납니다. 기도를 하면 고난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하지 않으면 작은 고난도 무섭게 다가옵니다. 별 것 아닌 고난이 무거운 짐으로 여겨집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태산도, 죽음도 가볍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찬송까지 울려 퍼지게 할 수 있습니다. 3, 4절 말씀을 읽습니다.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가룟 유다가 군병들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병기들을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겟세마네동산으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모든 상황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우리도 어떤 사태에 대해 미리 알면 대처하기 쉽고 모르면 대처하기 어려워집니다. 고난이 올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하면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어려운 이유는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와 더불어 떡과 포도주를 나누셨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4절에서 예수님께서 누구를 찾느냐고 묻자, 5절에서 무리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이라고 밝혀 주십니다. 유다가 무리들과 함께 섰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여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난 앞에서 주님의 여유, 위기 앞에서 주님의 자유함입니다.
기도하는 자의 영적 권위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것이 곧 패배의 시작입니다. 사람을 무서워하고 세상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지금 지키고 있는 자리에서 밀려나 실패자가 된다는 생각으로 두려움에 떨며 괴로워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과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6절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무리들이 오히려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나사렛 예수임을 밝혀주시자, 무리들은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나 엎드러집니다. 예수님의 영적 권위 앞에, 예수님의 카리스마에 모두 지레 겁을 먹고 나자빠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영적 권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한 사람 앞에 서게 되면, 그 사람의 영적 권위에 눌리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영적 권위가 없습니다. 사회적 신분이나 세상적 권위로 억압하려 해선 안 됩니다. 교회가 갖고 있는 것이 영적 권위입니다. 만약 교회가 영적 권위를 잃어버린다면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7~9절 말씀을 읽습니다.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재차 누구를 찾느냐고 묻으십니다. 뒤로 물러나 땅바닥에 엎드려져 있던 무리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다시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는 것이라면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손대지 말고 그들을 보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의 충동적 행위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 중에 한 명도 잃지 아니하셨다는 성경 말씀을 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아랫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게 일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자들을 보호하고 배려하십니다. 곧 무리들이 찾는 나사렛 예수가 자신임을 밝혀주시고, 그 대신에 제자들을 고이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위기 앞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한없이 자유롭고 온유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위기 앞에서도 준비를 끝낸 사람은 현실을 피하지도 않고 변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위기 앞에서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잤던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이 그 사람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던 날 밤에 함께 있던 베드로가 칼을 빼들어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를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립니다. 당시 이 사건은 많은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기록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혈기 왕성하고 너무나 인간적이며 우리와 너무나 꼭 닮은, 그래서 미워할 수 없는 베드로를 만날 수 있습니다. 평소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혈기를 부리며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칼을 뽑아들게 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빼들고 순간적으로 말고의 머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고가 투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칼이 투구에 맞고 비껴 나면서 오른편 귀를 잘랐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말고의 오른편 귀가 잘려나간 것으로 보아, 베드로는 왼손잡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도저도 아니면 말고가 돌아서서 도망가다가 오른편 귀가 잘렸을 것으로 가정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버립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1절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칼은 항상 칼집에 꽂혀 있어야 안전합니다. 칼은 예리하기 때문에 칼집에서 나오면 다른 것들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칼을 갖고 다니되 항상 칼집에 꽂고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일러주십니다. 이 말씀도 중요하기 때문에 4복음서에 모두 기록돼 있습니다.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진리와 뜻은 검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무력(武力)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칼은 무력, 물질, 혈기 그리고 인간적인 생각, 열정, 충성심을 말하는데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갈 수 없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칼을 사용합니다. 언론, 문화,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력이나 압제나 불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해결되는 것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시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에 달리시는데, 감히 누가 막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하기로, 전도하기로, 민족을 살리기로 결정한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좋은 나라로 만들기로 결정한다면, 학교가 살아나고 교육이 살아나며 정치가 살아나고 경제가 살아납니다. 셋째, 칼을 사용하는 사람은 칼로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시는 것입니다. 곧 폭력보다 치유가 더욱 본질적인 것입니다. 미움보다 사랑이 해결책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랑, 용서, 치유, 화해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 때 도와줘야 합니다. 그것이 크리스천이고 예수님입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하면, 자신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보복해야 합니다. 보복하지 않더라도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해코지를 하지 않는 대신에 잘 대해 주고 싶지도 않습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그 사람이 사는 동네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런 소극적인 윤리 의식이 아닌, 적극적인 방식으로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와 고난’이라는 주제의 설교가 성도님들에게 축복의 말씀으로 다가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설교를 들은 모든 성도님들에게
성령의 은혜가 하늘에서 임하여 주셔서
예수님의 마음처럼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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