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은 3년간 동거 동락하면서 일상적 대화는 소통할 수 있었지만, 영적 대화는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영적 진리들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수 있어야 놀라운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왜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까.’라고 항변했습니다. 또 도마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 하는데 어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의 우문, 예수님의 현답
이제 세 번째로 빌립이 나타나 예수님께 또 다른 사항을 요구합니다. 이로써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 됩니다. 8절 말씀입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도 베드로나 도마처럼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그분께서 행하시는 일이 이해되지 않으며 고통을 느끼게 되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어리석은 질문에 대해 영원한 진리의 말씀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한 제자들의 질문에 놀라운 축복의 말씀으로 응해 주신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빌립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많은 질문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믿고 싶은데 보여주시면 안 될까, 그분을 만나는 길이 무엇일까’라며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때로 하나님에 대해 의심을 갖기도 합니다. 신에 대한 질문은 곧 인간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신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것이며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이 보인다’ 신에 대한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다면 인간에 대한 문제도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일에 하나님을 빼버린다면 허공에 떠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에 대한 질문을 빌립에게 명료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인간 이상의 존재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삶의 전부를 통해 이미 하나님을 투명하게 보여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난다면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 멀리서 교제하는 게 좋습니다. 가까이 있으면 서로 사람 냄새를 맡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교제를 하면 점점 더 좋아지게 되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을 바라고 믿을 것을 담대하게 외치는 겁니다. 예수님을 보면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원하신 사랑, 용서, 능력, 축복 등이 예수님 안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은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통 인간이라면 그럴 능력이 없지만, 그분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그러면 과연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한 마디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은 역사 안에 있고 하나님은 역사 밖에 존재하시며, 인간은 육체이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지만, 애당초 육이 영을 보고 만난다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일입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존재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되시면 인간은 그 하나님을 보고 느끼며 만질 수 있습니다. 그 실례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홍해를 건넌 후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본 적이 없고 그분의 음성을 통해 메시지를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모세는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랑하다가 시내산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불이 너무 신비스러워 접근을 시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거룩한 곳으로 가까이 오지 말라는 그 음성에 대해 모세는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길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보여주신 것만큼 안다
피조물이 스스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면 곧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담을 수도 없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신 범위만큼 알고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성경 말씀을 따지고 들면 안 됩니다. 오직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나아가 경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선 도서관에도 계시지 않고 인간의 지성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그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 생활, 경험만큼 하나님을 담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바닷가에 있는 모래를 쥐어보면 손바닥 크기만큼 움켜잡고 더 이상 쥘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오만하게 구는 인간은 언젠가 큰일을 당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33장 20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을 보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즉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죄인인 인간은 죄가 없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 21~2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등은 볼 수 있지만 얼굴은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성경에선 하나님의 손을, 발등상을 볼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 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선 인간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가능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다, 보다, 믿다’의 동의(同義)
‘예수님을 믿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보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은 곧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삶, 모습, 음성, 말씀, 기적, 능력 등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선 하나님의 통로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본문 7절에서 12절 말씀 사이에 세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짧은 구절을 통해 ‘알다’, ‘보다’, ‘믿다’는 말을 네 번이나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7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다’라는 말이 세 번 나오고 ‘보다’는 말이 한 번 나옵니다. 곧 ‘알다’는 말은 ‘보다’라는 말과 같은 개념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말과 영어에서 ‘보다’는 동사는 간단하지만, 헬라어에선 매우 다양하게 쓰입니다. ‘보다’라는 말은 그냥 보는 것이 있고 뚫어지게 보는 것이 있으며, 내면의 세계까지 깊이 보는 것이 있습니다. 9절 말씀에서 ‘보다’는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형상이나 사진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얼굴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는 것을 말합니다. 10~12절 말씀을 읽습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반복되는 부분에 유의해야 하고 특히 동사의 변화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야 본문의 핵심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것이 성경을 보는 방법입니다.
전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의 말씀 구절에서 ‘알다’, ‘보다’, ‘믿다’라는 세 가지 동사가 섞여서 나옵니다. ‘알다’라는 것은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을 말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사이에서 카인이 나왔다는 것은 그들의 성관계를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말씀은 머리로 진리를 안다는 게 아니라 체험으로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개인의 내면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신 것과 그 개인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와 같이 ‘보다’는 것은 ‘알다’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사용돼 개인의 내면으로 정보가 들어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부가 아이를 낳고 자신들의 아이인지 아닌지 갈등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보고 알며 믿는 전인격체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적, 이성적, 경험적으로 예수님께 의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하나님의 얼굴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바라보고 깊이 묵상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러면 두 가지 축복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축복은 12절 말씀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하십니다.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은 곧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4복음서의 공통된 말씀입니다. 더 큰 일을 하리라는 것은 사도행전입니다. 지금 온누리교회는 ‘ACTS 29’ 장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믿고 체험할 때 ‘ACTS 29’는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두 번째 축복은 13~14절 말씀에 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예수님의 이름으로…13~14절에서 거듭 말씀하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시행하리라’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기도의 최대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서 물리적, 정신적, 영적인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대해 직 간접적으로 ‘오냐’, ‘아니다’ 혹은 ‘기다려라’로 응답해 주십니다. 조지 뮬러는 일생 동안 5만 번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두 사람을 위해 기도했는데, 한 사람은 뮬러가 죽기 전에 예수님을 영접했고 또 한 사람은 뮬러가 죽은 후 한 달 만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대로 시행하시리라는 말씀은 아들로 인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결론은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가 받는 축복의 결론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에 형통함의 축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도님의 자녀들, 사업장 등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 전체에게도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 모든 축복들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들의 입술에 ‘할렐루야’와 ‘아멘’이 크게 맺히게 하옵시고
간증이 있게 하옵시며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시행하리라는 말씀대로
날마다 기도의 응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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