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가장 아름답고 귀한 단어 중의 하나가 ‘종’입니다.
종이란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순종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주인’이라는 단어가 없다면 ‘종’이라는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두 종류의 종
이사야서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께서 붙드는 종이요 택하신 종이요 기뻐하시는 종이요 성령을 부어주신 종입니다. 바로 이 여호와의 종이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고난당한 메시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택하시고, 기뻐하시고, 기름부어주신 순종하는 종, 겸손한 종, 희생하고 헌신하는 종이 있는 반면,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고 오만한 종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18절에 나타난 또 다른 종의 모습입니다.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이 말씀은 불순종하고 오만한 종은 소경과 귀머거리 같다는 뜻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누가 소경이고 누가 귀머거리일까요? 1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이 구절에서 이사야는 여호와의 종이 소경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택하시고 기뻐하시고 붙드시고 기름부으시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쓸려고 택했는데 반항하고 거역하고 불순종한 종입니다. 첫 번째 종은 메시아를 의미하고 두 번째 종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은 보이고 육신의 귀는 들리지만 영적으로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보지 못하는 자에게 보고, 듣지 못하는 자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영적으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정말 눈을 뜨고 귀를 열어서 들으라’는 것입니다.
눈과 귀를 가린 종
20절입니다. “네가 많은 것을 볼찌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찌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오래 산다고 해서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많이 배웠다고 유식한 것도 아닙니다. 경험이 많다고 성숙한 것도 아닙니다. 많이 보고 많이 들었다고 정답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껍데기만 아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알맹이를 알아야 합니다. 본질과 핵심을 뚫어야 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하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낫고, 많은 것을 아는 것보다 정확하게 하나를 아는 것이 낫습니다.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하셨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 핵심, 교훈의 본질을 가르쳐주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교회 오랫동안 다녔어도 진리에 이르지 못했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단순히 교회마당만 밟았을 뿐입니다. 교회에 수없이 들락날락해도 믿음이 자라지 않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고,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냥 세월을 낭비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21절에서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든 우리에게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주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도록,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교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여주셔도 보지 못하고, 들려주셔도 듣지 못한 이스라엘은 결국 강대국에게 포로로 잡혀가 70년 동안 비참하고 비극적인 시간을 보냅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내용의 중심입니다.
소경된 인도자
에베소서 4장 18절에는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와 같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면 된다는 희망이라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면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차라리 교회 밖에 있으면 전도를 받을 텐데 교회에 들어와 있으면서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도 부르고 기도를 하면서도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부름을 받고 할례를 받고 언약의 말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축복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의 종교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긴 비극이 오늘 기록된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신약에도 비슷한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종교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은 성전, 말씀, 종교행사들을 다 독점을 했지만 그 사람들안에는 진정한 거룩과 진리와 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소경된 인도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배척했을 뿐 아니라 메시아를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가장 메시아를 환영해야 할 사람들이 거꾸로 종교적인 이름으로 배반하고 배척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심판하시는 하나님
22절입니다.
“이 백성이 도적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도로 주라 할 자가 없도다.”
첫째 도적을 맞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모으고 권력을 쌓고 성공했다 할지라도 어느 날 다 도적맞는다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탈취를 당합니다. 소중하게 모아 간직했던 보물, 재산, 귀중품들을 강도에게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 굴속에 잡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꼭 굴속에 잡힌 것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약탈당하고, 도시가 폐허로 변하고, 부녀자와 아이들이 다 끌려갔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습니다.
넷째 옥에 갇힙니다. 귀인들은 옥에 갇혀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과 오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심판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좋은 일이든 좋지 못한 일이든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고난은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큰 고난은 고난이 해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매를 맞아도, 징계를 당해도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면 축복입니다.
감춰진 섭리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고난을 받으면서 힘들어 하고 원망했습니다. ‘왜 하나님 자꾸 나한테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라며 자꾸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23절과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장래사를 삼가 듣겠느냐 야곱으로 탈취를 당케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도적에게 붙이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백성들이 그 길로 행치 아니하며 그 율법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에서 보살펴 주신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이 해석되기를 축원합니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역사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 민족이 이런 시련을 겪는지 알아야 합니다.
둘째, 이 고난이 해석이 되었다면 이 고난을 누가 주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주었다고 하면 얼른 이해가 될텐데 성경은 이 고난을 하나님께서 허락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혼란스러워 합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셨다면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적을 공격하다가도 환경을 원망하다가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고, 생각을 바꾸고, 회개하고, 우리의 모습을 바꿔야합니다.
고난의 목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그에게 범죄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이 왔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욕먹고 맞을 만한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겉은 멀쩡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셔서 이만큼 성장했습니다. 그렇지만 시대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분열하고 싸우고 깨어졌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이고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것 등 썩어서 냄새나는 부분은 다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지적하십니다. 고치라고 하십니다. 깨끗하게 하고 투명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둘째, 우리가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된 것입니다. 25절 말씀을 하나하나 분석해서 보면 굉장히 놀라운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으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매 그 사방으로 불붙듯하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첫째 맹렬한 분노가 쏟아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강대국을 이용해서 이스라엘을 침략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제한적 허락입니다. 강대국을 심판의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둘째 아주 잔혹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상상할 수 없는 비극을 만들어냅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죽이고 죽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전쟁의 불꽃은 사방으로 퍼져서 도시전체를 불살랐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맹렬한 진노와 전쟁을 보고 몸은 불타고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몸은 불에 타면서도 마음은 동의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려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오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잘나가던 한국이 최근 이처럼 좌절과 시련과 좌절을 겪을까요. 이미 세계가 다 검증해서 쓰레기통에 버린 사회주의 이념논쟁이 왜 우리나라에서 재현되는 걸까요. 왜 우리는 북한의 핵 위협 속에 살면서 계속 질질 끌려 다닐까요. 왜 우리는 북한의 인권에 대해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내부를 성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누가 우리를 공격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우리 스스로 우리를 바꾸고 정비해야 합니다. 말씀과 율법에 맞게 거품을 다 걷어버리고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회개하는 심정으로 우리를 가다듬고 나갈 때 비로소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사야 42장 마지막부분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희망인 교회
오늘 말씀은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아, 영적으로 귀머거리 된 자들아. 다시 내면의 세계를 정리하고 거품을 걷고 깨어 기도하고 근신하고 겸손하고 자세를 낮추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 그러면 바벨론도 물러갈 것이고 핵위협도 물러갈 것이고 모든 어둠의 세력들이 다 물러갈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정말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합니다. ‘역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르다’라는 말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라는 말도 듣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이번 기회가 한국이 건강해지고 한국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그런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이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5장 3~6절에 예수님께서 복이 있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우리 온누리교회가 시대정신을 끌어가고 역사를 새롭게 하는 그런 겸손한 공동체요 다시 거듭 태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너희 소경들아 귀머거리들아’ 하신 음성을 우리가 듣고
영적으로 눈을 뜨고 귀를 열고 두발의 힘을 딛고 든든히 서서
이 세상을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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