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새벽지기1 2018. 1. 4. 06:52


요한일서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도요한이 듣고 보고 손으로 만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사도요한은 다른 제자와는 다르게 하나님을 세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도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빛이십니다.(요일 1:5)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두움 가운데 다니지 말아야합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어서도 안 되고 어두움 가운데 안주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빛 가운데 거하고 빛 가운데 행동해야 합니다.  셋째는 오늘 요한일서 4장 8절이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사도요한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정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정의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요한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알 수 있는 하나님 


사도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하는 이유를 7절, 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되는 첫 번째 이유는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귀신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을 다시 보면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9절,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로 하는 사랑을 많이 합니다. 말로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삶으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로는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셨고, 때로는 직접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10절을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이유입니다.  


죄인을 사랑하신 예수님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해서’라는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나 탁월한 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는 사람은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만한 가치가 없는 죄인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 죄인이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나약하고 더럽고 추악하고 악취가 나고 보잘 것 없는 저와 여러분을 죽기까지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그 사랑의 십자가가 여러분 마음에 뜨거움으로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죽어야하는데 내가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그 큰 사랑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되는 세 번째 이유가 11절,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중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줄 수 없는 사람을 받아주고 사랑할 때 그 사랑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많은 사람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어떻게 거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사도요한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여 하나 되게 하는 신비로움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13절에서 16절의 말씀입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일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13절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15절을 보면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라는 말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16절에 보면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됨’의 비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 안에 거할수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는, 하나됨을 맛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보면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이 ‘하나됨’이 얼마나 신비한지요! 요한복음 17장 22절 23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고,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모든 것은 성령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은혜가운데 나아가고 성령의 힘에 의지하여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되는 놀라운 영광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됨의 열매 1-담대함 


사도요한은 하나됨의 열매에 대해 말합니다. 17절에서 21절입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사랑함으로 얻어지는 첫째 열매는 담대함입니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담대함이란 단어를 네 번 쓰고 있습니다. 두 번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우리가 담대함을 얻었다고 했고, 또 다른 두 번은 마지막 날 재림의 날에 누리는 담대함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담대함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이 없고 장래에 받을 심판에 대한 담대함이 있습니다. ‘담대하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죄를 범한 인간이 갖게 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운전을 하다가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그냥 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경찰차가 나타나서 제 차를 세웠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두려워서 도저히 경찰관과 눈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면 우리의 죄가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나만 아는 죄까지도 다 드러납니다. 생각으로 지은 죄까지 다 드러납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사탄은 우리의 죄에 대해 참소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담대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이미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여준 온전한 사랑이 우리의 두려움을 내어쫓고 담대함을 줍니다.  


하나됨의 열매 2-형제사랑 


둘째 열매는 형제사랑입니다. 20절, 21절을 보면 사도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형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랑의 몸부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우리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완성되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를 볼 때 사랑받을 수 없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보고, 사랑할 수 없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힘과 용기를 얻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사랑으로 완성을 이루게 하시고

십자가의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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