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에게만 허락된 영생
사도요한은 오늘 본문 13절에서 요한일서를 쓴 목적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입니까?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에 빠진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만 영생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신분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사망에서 부활로 위치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자세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14~15절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이 말씀에서 기도하는 자녀가 가져야 할 네 가지 자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한다고 해도 마음의 중심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배, 봉사가 될 수 없습니다.
둘째, 담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물쭈물 하지 말고 하나님께 분명하게 아뢰십시오. ‘우리는 죄인인데 어떻게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사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옮겨주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하지만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자세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길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지기를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쉽지 않습니다. 기도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대천덕 신부님은 평생을 하나님의 뜻을 기도하며 사셨습니다. 1965년 강원도 태백에 예수원이라는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그 예수원에 가면 ‘기도는 노동이다’라는 글이 붙어 있습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야 말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노동이다.” 이 말은 기도는 노동을 하는 것처럼 힘들다는 말입니다. 또한 기도는 노동하는 것처럼 별로도 시간을 내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너무 분주한 나머지 기도 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을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시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응답하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넷째, 응답의 확신을 갖고 기도하십시오. 두 가지를 확실하게 믿으십시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구한 것은 반드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성전에 두었습니다. 역대하 6장 13절을 보면 솔로몬이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성전 봉헌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한 밤중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응답하십니다. 역대하 7장 12~14절입니다.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솔로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응답하시는 것은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이 성전에서 기도한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옵소서. 주님께 범죄하여 적국에 패했을 때에 이 성전에서 기도하거든 죄를 사하시고 돌아오게 하옵소서. 전염병이 있을 때에 구하시고, 이방인들의 기도에도 응답하옵소서. 포로가 되었을 때도 구하옵소서’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구체적인 기도에 구체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기도 응답의 장애물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가로 막고 있는 장벽 때문입니다. 이 장벽이 무엇입니까?
첫째, 죄입니다. 시편 66편 18절에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죄를 품고 있는 사람들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죄의 본성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시편 기자가 ‘죄악을 품으면’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하십시오. 여기서 ‘품는다’는 것은 습관적이고 반복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가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는 장벽이 됩니다. 용서하지 못한 죄, 해결하지 못한 죄가 있다면 오늘 이 시간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
둘째, 개인적인 욕심, 이기심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4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이기적인 욕심과 자기 쾌락을 위해 하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리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첫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 학벌, 재능을 의지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물론 좋은 직장을 위해, 병의 치유를 위해, 자녀가 좋은 대학에 진학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
사도요한은 기도의 지경을 더 넓히라고 권면합니다. 16~17절입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기도를 하는 분들은 기도의 범위와 대상이 점점 넓어진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다가 형제를 위해 기도하게 되고, 점점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열방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이해해야할 주제가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입니다.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은 죄를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실수로 짓는 죄와 계획적으로 짓는 죄입니다. 유대인들은 부주의로 지은 죄는 제사를 통해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고의적으로 지은 죄는 그 사람이 죽어야만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사도요한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지으면 영생을 잃어버릴 수도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사도요한은 ‘그렇지 않다’고 1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로 난 자는 범죄치 않는다’는 말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0: 28) 한번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절대 영원히 멸망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는 사람이란 누굽니까? 케네스 웨스트라는 성경학자는 그들이 누구인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나갔으며,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으며, 적그리스도라 일컬으며, 단지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원수들로서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이것은 사도요한이 요한일서에서 계속 경고하고 있던 사람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결국 사망에 이르는 죄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부인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좇아 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회개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요한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을 제외한 모든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멀리하라 그렇다면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19~20절입니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요,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사람이요,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20절을 보면 우리는 영적 지각을 통해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되신 그분을 앎으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각은 무엇입니까? 20절을 보니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깨닫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가운데 있지만 죄를 좇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이 말은 사도요한이 요한일서에서 마지막으로 하는 권면입니다. 사도요한은 이 서신을 에베소에서 기록했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우상숭배가 팽배해 있던 도시였습니다. 우상 신전에서 매춘이 행해졌고, 온갖 점성술과 마술과 부적으로 우상 숭배가 만연했던 곳입니다. 사도요한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고 당부합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저와 여러분을 가로막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TV, 자녀, 돈 등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에 무엇을 하느냐가 그 사람을 말해줍니다. 여러분은 가장 중요한 시간에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요한일서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기도를 통해 성령충만하게 이 세상을 이기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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