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에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독특한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꾼,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을 ‘종’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에게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며, 둘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셋째 하나님께서 택하셨으며, 넷째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첫째 조용하고 겸손합니다. 시끄러운 사람은 종이 아닙니다. 떠드는 사람도 종이 아닙니다. 종은 언제나 조용하고 침묵하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둘째 어떤 고난도 이겨냅니다. 종은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넘어지는 것 같은데 일어서고, 포기하는 것 같은데 다시 일어서고, 지는 것 같은데 이깁니다. 종은 자기의 꿈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꿈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새 일을 합니다. 우리는 땅의 일, 익숙한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새 노래가 있습니다. 천국의 노래를 부릅니다. 영원한 노래를 부릅니다.
종에게 주시는 ‘새 노래’
오늘 이 노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0절입니다.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저는 오늘 여러분 안에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니라 새 노래, 미래의 노래, 희망의 노래, 꿈의 노래, 기적의 노래가 새롭게 싹트기를 바랍니다. 이 노래가 있는 사람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이 노래가 있는 사람은 권태롭거나 지루하거나 인생이 허무하지 않습니다. 흥분과 감동이 있습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노래, 비전을 향한 노래, 꿈을 향한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새 노래라는 독특한 개념, 독특한 단어는 시편과 요한계시록에 특히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입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말씀을 보면 새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노래는 땅에서 부르는 노래도 아니요 죄인들이 부르는 노래도 아닙니다. 대중가요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과거의 상처를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다 이루지 못한 사랑 같은 상처를 건드리기 때문에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납니다. 그것은 다 땅의 노래, 세상의 노래, 육체의 노래, 신음하는 노래입니다. 우리는 그런 노래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의 노래입니다. 영원한 노래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방의 환호성
이 노래를 누가 부릅니까? 10절과 11절에서 여섯 종류의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른다고 했습니다.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광야와 거기 있는 성읍들과 게달 사람의 거하는 촌락들은 소리를 높이라 셀라의 거민들은 노래하며 산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항해하는 자, 바다 가운데 만물, 섬들과 거주민, 광야와 성읍들, 게달의 촌락, 셀라의 거민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한다고 했습니다. 게달은 아라비아의 유목민들을 지칭합니다. 셀라는 에돔의 거민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족속과 이방인, 광야와 바다의 모든 사람들이 인 맞은 십사만 사천의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새 노래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소리쳐 찬송하고 크게 외치라고 했습니다. 시편 96편 1절에도 새 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찌어다.”
땅이 노래하고 하늘이 노래합니다. 예수 믿고 나서 성령을 받으면 산천초목이 노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1965년에 처음 성령 받았을 때 하늘을 보니 하늘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뭇잎들도 춤을 추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나뭇잎들이 갑자기 춤을 추겠습니까? 내가 변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맘이 새로워지니까, 내 맘에 감동이 있으니까 온 땅이 춤을 추는 것 같은 것입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고, 꽃 한송이 나무 한그루가 예전과 달리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마치 좋은 꿈을 꾸다 깨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성령을 받으니 예전처럼 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으로 들어오니까 내 마음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머리를 굴리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 감각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영이 눈을 뜨는 것입니다. 영의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새 노래의 주인공 ‘하나님’
시편 98편 1절입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시편을 보면 계속해서 새 노래로 찬양하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이 노래를 불러보지 않은 사람은 이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모릅니다. 이 노래는 눈물이요 감동입니다. 기적입니다. 승리의 개선가입니다. 그래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근심걱정이 사라집니다. 세상에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다 쉬워 보이고, 모든 것이 다 편안해 보입니다. 충만해 보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환경이 여러분을 속일지라도, 불치병에 걸렸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록 죽음이 오더라도 걱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실패를 걱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실패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공하면 됩니다. 좌절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희망을 가지면 됩니다. 그러면 새 노래를 받으실 분은 누구십니까? 12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선전할찌어다.”
찬송을 받으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찬송을 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찬송을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예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행위는 예배입니다. 인간이 예배를 드릴 때 비로소 가장 위대해 집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이사야 42장 8절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도 이름이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원수를 무찌르는 강한 용사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니 13절부터 17절까지 하나님에 대한 다섯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첫째, 하나님은 전쟁에서 용사, 투사, 전사 같은 분입니다. 그분은 용사같이 나가시며 전사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쳐부수는 강한 용사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죽게 되었습니다. 당시 최강이었던 바벨론 군대를 무찌를 수 있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바벨론 제국을 쳐부수는 용사와 전사, 어떤 원수도 어떤 적도 다 파멸시키는 강력한 힘을 가진 용사로 표현합니다. 용사, 전사라는 말에는 남성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아버지와 같은 부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성도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내가 오래 동안 고요히 하며 잠잠하여 참았으나 이제는 내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둘째, 하나님은 해산하는 여인과 같은 분입니다. 해산하는 여인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여자가 임신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침묵과 기다림으로 태중의 아이를 키웁니다. 이 아이가 자라 해산할 때가 되어 이 여인은 해산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아이는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진통과 산고를 거쳐야 비로소 아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해산의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성입니다. 13절은 아버지이고 14절은 어머니와 같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침묵을 깨뜨리시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 고통 속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구원의 길로 이끄는 인도자
셋째, 하나님은 원수들을 무찌르시는 분이십니다. 15절입니다.
“내가 큰 산과 작은 산을 황무케 하며 그 초목을 마르게 하며 강들로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것이며.”
여기 큰 산, 작은 산, 강, 못 등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강대국과 세력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다 쓸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산도 아무리 험한 산도 하나님께서 다 쓸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16절입니다.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흑암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넷째 16절에서는 하나님은 소경을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에 대해 네 가지 구체적인 상황이 나옵니다. 첫 번째, 소경은 앞을 보지 못하기에 안내자와 인도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소경 같은 이스라엘, 소경 같은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안내하십니다. 하나님은 도서관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나야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지름길로 인도하십니다. 길을 인도하실 때 멀리 돌아가지 않고 첩경으로 가게 합니다. 세 번째는 흑암 같은 내 인생에 불빛이 되어주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불이 켜진 것입니다. 흑암은 죄악, 절망, 무지를 상징한다면 광명은 자유, 해방, 구원, 진리를 말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반전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굽은 길을 곧게 만드십니다. 잘못된 관행, 잘못된 습관, 잘못된 문화, 잘못된 철학을 가지고 우리는 힘겹게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이것들을 다 펴주십니다.
우상을 물리치시는 참 하나님
17절입니다.
“조각한 우상을 의뢰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다섯째, 하나님은 우상을 물리쳐주시는 분입니다. 조각한 우상, 부어 만든 우상은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에 사용하는 상징물입니다. 인간은 자기나름대로 우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짜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흉내를 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하나님 대신 가짜를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처럼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성공이라는 우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돈 벌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복권에 당첨되면 삶이 나아질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돈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습니다. 목사인 제 경험에 의하면 오히려 돈이 많을수록 불행지수가 높습니다. 감사도 없습니다. 돈은 많이 가진 것보다 잘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돈은 허상입니다. 신기루입니다. 건강하면 행복할까요? 제가 아파보니까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악한 사람이 더 건강합니다. 나쁜 사람들은 잘 아프지도 않습니다. 건강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을 어떻게 쓰느냐 입니다. 머리가 좋다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자기기만입니다. 인간은 가짜를 진짜로 믿고 삽니다. 진실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우상을 멸할 것이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결국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습니다. 가짜는 가짜입니다. 요즘 가짜 논문 때문에 얼마나 우리 국민이 상처를 받았습니까.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진짜입니다. 가짜 메시아가 아닙니다. 천국도 진짜입니다.
기쁨으로 충만하십시오
하나님은 전장의 용사, 전사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해산하는 여인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원수가 만들어 놓은 것을 다 평정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소경의 인도자와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상을 물리치시는 분입니다. 가짜를 들추어내시는 분입니다. 이분이 새 노래로 찬양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이분에게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행복입니다. 인생의 행복을 말할 때 첫 번째로 꼽는 것이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행복이란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많이 소유한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인생의 불행은 목마름 때문에 생깁니다. 성공에 대한 목마름, 사랑에 대한 목마름, 인정받지 못한 데서 오는 목마름, 존재의 목마름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문제는 이것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충만해집니다. 충만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찬송입니다. 충만하니까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충만하니까 자꾸 쏟아내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이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주고 또 주고, 베풀고 또 베풀기를 바랍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십시오. 새 노래로 여호와를 예배하십시오. 당신 삶에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 기적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때문에 세계가 행복하고 대한민국이 행복하고
나 때문에 죽은 자가 살아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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