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교회의 핵심 가치 다섯 가지에 대해 계속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성경 중심의 교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며 우리의 삶에 통찰력을 줍니다. 두 번째는 복음 중심의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 복음, 은혜의 선물로 받는 복음을 믿습니다. 세 번째로 선교 중심의 교회입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선교라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받은 것을 나누는 게 선교
서울 강변북로를 타고 가다보면 서강대교를 지나 절두산 성지가 나옵니다. 천주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지 210여 년이 되었고, 개신교가 들어온 지 110여 년이 되었습니다. 한쪽으로 절두산에 천주교의 성지가 있고, 한쪽으로 양화진에 개신교의 성지인 외국인 묘지가 있습니다. 100여 년 전에 이 땅을 찾았던 많은 외국인들은 대부분이 선교사님들이었고, 그 분들이 죽어서 양화진에 묻혀 있습니다. 실제로 그 분들이 흘린 피와 기도와 헌신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십자가가 서 있고 곳곳마다 예배가 드려지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값진 것입니다. 양화진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에게 끝임 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받았으니 그 사랑을 나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목자가 찾아서 그 양을 어깨에 메고 기쁨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는 데 있습니다. 아직도 이 땅에 주님을 모르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세계에서도 주님을 모른 채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혼들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최초의 선교사는 예수님
그렇다면 선교란 무엇일까요? 첫째,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즉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가는 아버지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로 인해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세상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죄인의 특징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에덴동산에서 사람은 쫓겨 났습니다. 사람은 에덴동산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죄를 지었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최초의 선교사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게 하시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죄 지은 영혼들을 구원의 자리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3년간 사셨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3년의 공생애를 통해 사역하신 것이 사복음서에 기록돼 있습니다. 사복음서는 공히 마지막 부분에서 선교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서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7~48절에서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0장 21절에서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선교는 성령을 받고 시작함
사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주며 그들을 제자로 삼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1장 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둘째, 선교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시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다는 것입니다. 곧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선지자들이나 예언자들을 통해 다스린 때가 구약 시대입니다. 곧 성부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친히 병자들을 고치시고 기적을 베푸시며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성자의 시대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두 번째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각 개인들을 접촉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고백하게 하며 십자가의 사건을 각 사람의 사건으로 인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했던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중학생 때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한 후, 십자가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났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눈물을 흘렸지만 전혀 의미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이상한 현상은 ‘마지막 송’을 들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저에게 증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기 전에 제자들은 무서워하면서 문을 꼭꼭 잠갔습니다. 그러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시자 제자들은 닫아걸었던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외쳤습니다. 베드로의 외침에 많은 사람들이 찔림을 받고 3,000명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선교는 성령을 체험하고 그 능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는 것입니다.
셋째,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증거하고 죽음을 증거하며 부활을 증거하고 구주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어떤 교회나 교파를 전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고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섬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려면 세 가지를 해야 합니다. 먼저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선교는 섬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였던 예수님, 그 밖의 수많은 선교사들이 가르쳐 주고 보여준 것이 섬김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기기 위함입니다. 군림하러 오신 게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으신 것입니다.
실제로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 가면 자신이 잊혀져간다는 것에 대한 아픔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제가 중국에 선교사로 있을 때 교회에서 매월 잡지를 보내줬는데, 잡지가 도착하면 가장 힘든 날이 되었습니다. '목회와신학' 잡지를 받는 것은 너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분이 박사학위를 받고 인터뷰하는 기사를 읽으면 축하해 줘야 하는데, 자신은 잊혀 가는 사람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처음에 선교 편지도, 선교비도 많이 오더니 1년쯤 지나니까 반으로 줄어들더라고요. 특히 IMF 체제에 들어가니까 거의 없더라고요. 저는 점점 잊혀 가는 존재 같더라고요. 사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선교지에 있는 분들도 우리의 마음을 몰라줍니다. 그래도 선교사님들은 괜찮은데, 그들의 자녀들은 어려움이 많습니다. 낯선 문화와 음식 그리고 환경에 적응하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섬기러 오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리셨던 것처럼, 선교는 남을 섬기는 것입니다.
선교는 헌신
둘째, 선교는 헌신입니다. 선교는 헌신 없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만약 열을 갖고 생활했다면, 그 중에 하나나 둘을 드려서 여덟이나 아홉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헌신입니다. 우리가 선교비를 보낼 때 넉넉한 중에 여유분을 드리는 게 아니라 불편함을 감수하고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희생하지 않고선 선도사님들도 선교 현장에서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윌리엄 케리도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갖고 선교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개신교는 초창기에 잘못된 예정론으로 인해 선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윌리엄 케리는 선교의 장도에 오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 윌리엄 케리는 정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먼 길을 돌아서 인도에 갔습니다. 현지에 도착하자 그의 아내는 정신병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선교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주위로부터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41년 동안 한 번도 안식년을 갖지 않고 그 땅에 묻히기까지 주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의 내지로 들어갔습니다. 어떤 분은 허드슨 테일러에 관한 전기를 쓰면서, 그가 기도하지 않으면 중국에 태양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만큼 허드슨 테일러가 기도를 많이 했다는 뜻입니다.
선교는 순종
선교는 순종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외국인 선교사로 온 사람은 언더우드입니다. 그도 원래 인도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선교를 준비하던 중에 동경의 명치학원에서 선교하던 앨버트 울트만스라는 선교사님이 귀국해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선교 보고를 하던 중에 한 나라를 소개했습니다.
“아주 작고 힘이 없지만 그 안에 희귀하고 값진 무엇이 있으리라고 기대되는 코리아입니다. 국민은 총 1,200만 명에서 1,300만 명이고 정부는 부패해 당파 싸움은 극에 달했으며 귀족 사회의 횡포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독특한 문화와 민족적 자존심이 있습니다. 조선은 이웃나라의 야만적인 침략과 수많은 형태로 짓밟힌 역사를 갖고 있기에 나라의 문을 굳게 닫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문호가 개방되기를 계속 기도해 왔고 이제 그 땅의 1,300만 민족은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 나라가 문을 열었습니다. 누가 이 조용한 나라에 복음을 안고 가겠습니까? 주님께서 기다립니다. 조선을 위해 선교하러 갈 사람은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울트만스와 함께 곳곳을 다니면서 조선에 대해 소개하면서 선교하러 가라고 했지만 아무도 가지 않았습니다. 언더우드는 졸업한 후배에게 조선에 가지 않겠느냐고 권했을 때, 그 후배는 안가겠다면서 오히려 언더우드에게 갈 것을 권했습니다. 그래서 언더우드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버마(지금 미얀마)에 가 있던 아도리노 저드슨이라는 선교사님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저드슨도 인도에 가려 했지만, 동인도회사의 방해로 버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언더우드의 마음에서 ‘너는 왜 못 가느냐’는 음성을 계속 듣고 조선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선교는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사모하며 나가야 합니다. 저도 1993년에 신대원을 졸업하고 온누리교회에 왔을 때 인도에 가고 싶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인도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하 목사님이 중국으로 가라고 말씀하셔서 순종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중국으로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인도를 두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어디든지 가고자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중국에 가서 마음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선교지로 인도하셨음을 이제야 알 수 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을 전하자
선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하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에 ‘보내든지 떠나든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머릿돌에 마태복음 28장 19~20절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선교는 예루살렘에만 있고 나의 가족만 구원받으면 끝나는 게 아닙니다.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ACTS 29의 비전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 현재까지 선교사님으로 해외에 나가신 분이 892명이고 선교 사역하시는 분이 591명입니다. ‘해외 선교사 2,000 파송’이 채워질 때까지, 그 이상으로 채워질 때까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썼던 기도문이 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하나도 시원하게 자라지 못하는 이 땅에 주님은 옮겨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님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은 듯한 이곳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인들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의 대신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이라 손가락질을 받고 있지만 저들이 우리의 영혼과 하나인 것을 알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깨달으며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을 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기도대로 하나님께서 이 땅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 일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언더우드의 그 기도를 받으사 이 땅에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교회를 세우신 아버지 하나님,
이제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만방으로 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 열방으로 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 힘에 지나도록 선교하기를 원합니다.
‘보내든지 떠나든지’ 결단하고 선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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