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더니,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막달라 마리아는 즉시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와 보니 정말로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이게 부활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심한 충격에 휩싸인 채 아무 증거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저녁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면서, 아니 어쩌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지도 모른다면서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문들을 죄다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곳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가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최후 메시지 ‘용서’
이제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20장 23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것이 용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용서는 기독교의 최선이자 핵심입니다. 용서의 경험이 없거나 용서를 거치지 않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용서를 넘어서지 못하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용서를 포기한 사람도 없고 용서에 대해 침묵하는 선행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덕은 용서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최후로 주신 메시지는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용서하고 가족, 이웃, 민족을 용서해야 합니다. 남북의 가장 큰 문제는 용서이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가장 큰 문제도 용서이며,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의 문제도 용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용서에 대해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갈등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중요한 자리에 한 사람이 빠져 있습니다. 그 유명한 도마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도마에 대해 세 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도마에 대해 관심이 무척 많았던 것 같습니다. 때로 도마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도마는 이상한 소리를 했습니다. 또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다락방에 모아놓고 메시지를 전하실 때도 그는 이상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오셨는데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나중에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요한복음에 세 번 등장하는 도마의 발언은 모두 미숙하고, 어찌 보면 불신앙적인 면을 보이기도 합니다.
보고 만지며 확인해야 믿는 도마
사람들은 도마를 가리켜 회의론자, 비관론자, 실증론자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자신이 보고 들으며 만져보지 않고선 못 믿겠다는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계속 의심하고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피해 버리는 제자가 도마입니다. 24절 말씀입니다.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성경은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 가지로 추측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아마 그때 도마에게 매우 바쁜 일이 생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하나는 도마가 그런 일에 무관심해서 그 자리를 피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평소에 잘 참고 기다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빠져버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빠졌던 것을 생각지 않고 엉뚱한 주장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이 바로 도마와 같은 분류입니다.
25절 말씀을 봅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 예수님께서 세 가지 메시지를 전하셨다는 말, 예수님의 손에 난 못자국을 보았다는 말을 도마는 전혀 믿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동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고 증거해도 도마는 믿지 않겠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예수님의 손바닥에 난 못자국에 직접 손가락을 넣어보고 옆구리에 난 창 자국에도 직접 손을 넣어봐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도마는 이성, 시각, 청각으로도 안 되고 자신이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확인이 돼야 믿겠다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도마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열심히 봉사하고 직책을 맡아 잘 수행하면서도 결정적인 사안에 대해선 한 발 물러나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내가 가장 완벽하다. 나는 실수가 없다. 나는 확실하다’라고 스스로 자부합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보고 ‘저 사람들은 왜 생각 없이 믿나? 왜 쉽게 결정하나? 저들은 너무 감정적이야’라고 생각합니다.
결정적인 믿음을 유보한 도마
도마의 경우는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단정할 수 있는 것은 도마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벌써 예수님을 떠나갔을 겁니다. 그러나 도마가 예수님의 제자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도 좋고 예수님도 좋은데, 결정적인 믿음을 유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도마의 믿음 상태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굉장히 옳다는 아집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26절 말씀을 읽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는 동료들과 8일 동안 논쟁을 벌였지만 믿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더 이상 지체하시지 않고 도마를 만나주십니다. 8일 전이나 현재나 상황은 일반입니다. 제자들이 집안에 다시 모여 문들은 모두 닫아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똑같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8일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자리에 도마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을 위해 다시 오셔서 재차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는데, 한 사람 때문에 번거롭게 다시 오셔서 두 번 말씀하신 셈이 됩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의심하고 있는 도마에게 직접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깊은 애정과 긍휼의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믿음 상태가 뛰어난 사람에게만 좋은 감정을 가지시는 게 아니라, 자신을 의심하고 결정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이 비록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의심하는 도마를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8일 동안 기다리시며 도마가 믿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마가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갖지 않자, 예수님께서 직접 도마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잘 믿고 순종하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게 아니라, 따르면서도 계속 저항하고 방황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일부러 찾아오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8일 만에 나타나셔서 도마를 야단치시거나 비판하시지 않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도마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실수할 때, 예수님께서 야단치시지 않고 믿음을 갖게 되길 바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주님께서 직접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 도마가 원하던 방식대로 그의 의심을 풀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의 수준으로 내려가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너의 손가락을 나의 손에 난 못자국에 넣어 보고, 너의 손을 창에 찔린 나의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도마를 이해하시고 그가 바라던 대로 모든 것을 친절하게 행하십니다. 이것이 전도요, 한 영혼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도마의 모든 의심을 풀어주시고 하신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곧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사실 도마는 예수님을 좋아해서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료들의 말을 거절하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일에 인색했습니다. 여기서 도마에게 믿음이 없었다기보다 믿음이 점점 약해져 가고 있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믿음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오랜 세월 동안 예수님을 믿어온 크리스천들의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게 아니라, 믿음이 점점 식어간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알맹이는 모두 빠져나가고 나중에 껍데기와 형식만 남게 됩니다. 결국 열심, 봉사, 찬송, 기도 등도 사라지게 됩니다.
믿음이 점점 약해지는 현대 기독인
이번에 저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교회를 빌려서 임시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 교회는 약 300~400명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인데, 등록 인원은 5,000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종교세를 내고 있지만, 주일에 교회로 오는 사람은 고작 20~30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마저도 노인들이 주를 이룬답니다. 그래서 결국 그 교회를 팔기로 결정했답니다. 교회 안에 기가 막히게 멋진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돼 있고, 그 앞에 피카소의 작품으로 느껴지는 듯한 조각품도 놓여 있었습니다. 믿음의 형식은 있었지만 교인이 없었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와 얘기해 봤더니, 거기서 한인 교회가 와서 칸타타를 연주했다고 합니다. 독일 교인들이 그 칸타타를 다시 공연해 달라고 자꾸 조른답니다. 독일 교인들은 갈 데가 없습니다. 목사는 공무원과 같습니다. 국가에서 월급을 주기 때문에 일을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입니다. 독일에서 가장 큰 교회에 사람들이 얼마나 모이느냐고 물었더니, 잘 해야 300~400명 수준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독일은 마을마다 곳곳에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로렐라이 언덕을 따라 강가까지 가보니 곳곳에 교회들이 눈에 띄었는데, 그 안에 교인들이 없다고 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독일 교회와 같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영국 교회가 쓰러진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지난 1980년대 제가 영국에 갔을 때 교회들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결국 교회가 술집으로 팔리더라고요. 제가 아는 한 교회는 역사를 지닌 문화재급 건물이기 때문에 함부로 헐지는 못하고 교회의 모양을 그대로 갖춘 채 그 안에 디스코장과 술집을 열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교인들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믿음이 없는 게 아니라 차츰 믿음이 식어져 갔던 것입니다. 교회에 등록하고 종교세도 내지만 이미 그 마음에서 믿음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독일의 이성주의, 합리주의에 의해 남아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저는 도마를 생각했습니다. 저희는 2005 예루살렘 평화대행진에서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탄생교회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앞에 이슬람 사원에서 높은 망대를 세워 스피커를 설치해 놓고 계속해 아잔 소리를 틀어댔습니다. 그래서 예수탄생교회는 맥을 못 쓰고 눌려 있었고, 아주 비참한 지경이었습니다. 복음이 눌려 있는 현장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보지 않고 믿은 결과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있는 자가 돼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다기보다 믿음이 식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28절 말씀을 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드디어 도마가 깨어집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합니다. 십자가를 보고 깨어지지 않다가 부활을 보고 깨어집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죽음에 대해선 이해하지만, 부활에 대해선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할 때 아마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태도만 봐도 그 믿음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도마는 무릎을 꿇었을 것이고 두 눈에서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서 정말 부활하셨단 말인가요? 이성적으로, 경험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정말 주님께서 부활하셨단 말인가요?’라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녹아내렸을 것입니다. 그의 몸 안에 새로운 영이 들어오고 생각이 달라지며 형언할 수 없는 영적 감동이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믿을 것이냐, 믿지 않을 것이냐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믿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세상의 지성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수많은 변명거리를 토해냈습니다. 어쩌면 믿을 수 있는 증거와 믿을 수 없는 증거가 반반인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믿음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개인이 믿는 대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성(理性) 놀이가 아니라 자신 있는 행동입니다. 믿음은 자기 의지이고 삶의 결단입니다. 우리는 나쁜 말을 할 수도 있고 좋은 말을 할 수도 있는데, 의지적으로 좋은 말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의지적으로 선택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먹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 의지와 선택의 관계입니다.
저는 성도님들의 자유 의지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에게 의심하는 것도 있고 이해 못하는 것도 있으며 모르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선택하는 길이 좁고 외로우며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길이 옳다면 과감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29절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보고 믿는 사람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이 더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쩔 수 없으면 눈을 통해 직접 확인하고 믿으십시오. 그러나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께서 친히 집으로 오실 필요 없이 이 자리에서 말씀만 하시면 하인의 병이 낫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따져 보고 확인한 후에 믿는 것도 복이지만, 그대로 순전하게 믿는 것은 복 중의 복입니다.
자유 의지와 선택의 관계 선택의 기로에서 부정적인 것을 택하지 말고 긍정적인 것을 택해야 합니다. 안되는 것을 택하지 말고 되는 것을 택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믿음의 향방을 좇아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어렵고 직장 생활이 힘들어도 그곳을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믿음을 갖고 기도한다면, 가정과 직장에 변화가 올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변화하고 자녀도 변화하며 직장 동료들도 변화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30, 3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우리는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돼야 합니다. 보고 믿는 자가 되지 말고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돼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믿음의 승리가 꽃피우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온누리교회 성도님 모두가 믿음의 사람들로 되게 하옵소서.
보지 않고 믿게 하시고 말씀을 듣고 믿게 하시며 성령으로 믿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을 믿고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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