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진희사모

부활의 증인은 문제 안이나 밖이나 똑같다. (빌4:4~6)

새벽지기1 2017. 11. 8. 15:00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자가 이미 승리한 자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4:4~6절)


빌립보서4장 4~6절말씀은 성도들에게 참으로 많이 암송되는 말씀 중에 하나로 나 역시 이 말씀이 은혜가 되고 좋아서 익히 암송하고 있던 말씀이었다. 하지만 '항상, 모든 사람에게, 아무 것도, 오직 모든 일에'와 같은 말씀은 지키려고 하니 힘겹고 부담스러운 말씀이기도 했다. 나는 항상 기뻐할 수 없었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알게 할 수 없었으며 염려하는 것이 어떠한 죄인지도 모르고 염려했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하기보다는 내 생각에 기도할만한 것에만 기도했었다. 결국 '나'에 초점이 맞춰 있고 내가 하려고 하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나'가 아닌 '주 안에서'로 보게 되니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으면 되어지는 것이었다. 주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기뻐할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으며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정말 내가 해야만하는 율법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였다.


주일 말씀의 제목은 '꽃은 감옥 안이나 밖이나 똑같다'라는 것으로 사도행전 16장 16절 이하에 있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도 기뻐하며 찬양하고 복음을 전한 말씀이 전해졌다. 보이는 환경은 분명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인을 고쳐주었는데 그로인한 결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갖혀 있는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바울과 실라는 불평과 원망은 커녕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신들을 지키던 간수에게까지 복음을 전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부활로 영원한 나라에 눈이 떠졌기때문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주인되심이 너무나 선명하기에 감옥 안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간에 자신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죄인취급을 받으며 감옥에 갖혀 있어도 눈에 보이는 상황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했다. 잠깐 뿐인 이땅에서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옥문이 열리는 상황에서도 달아나지 않았다. 그랬더니 자신들을 지키며 지켜보고 있던 간수의 마음이 열리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의 가족과 종들에게까지 예수님을 전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놀라운 복음의 통로가 되었다. 정말 세상이 감당 못할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지식이냐 실제냐?...
그림의 떡이냐 내입속에 떡이냐?...
부활이 실제이고 영원한 나라가 실제이며 예수님의 주인되심이 실제인 바울과 실라였기에 보이는 사람과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힘든 상황을 기쁘게 넘어갈 수 있었으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통로로 사용되어질 수 있었다. 감옥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바울과 실라는 기쁘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지식적인 믿음, 그림의 떡인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는 실제를 누리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하심은 어떤 상황에서나  똑같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시기에 내가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흔들릴 수 없는 것이다. 나에게도 수없이 많은 문제의 파도가 밀려왔다가 가곤한다. 예수님이 주인이면 그러한 우리의 문제는 예수님의 문제이다. 즉, 예수님이 주인이시기에 내가 염려할 것이 빌립보서 말씀에서처럼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눅21:34)


누가복음21장 34절 말씀에서처럼 방탕함, 술취함, 염려는 마음을 둔하게 한다. 마음이 둔하여지면 사명감당자가 되기 어렵다. 그런데 많은 경우 방탕함이나 술취함은 있는 그대로 나쁜 것이라 여기지만 염려에 대해서는 합리화를 하려한다. 상황이 이런데 염려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남편이 이렇게 하고 자식이 이렇게 하는데 어떻게 걱정과 염려를 안할 수 있냐고 생각한다. 사람이니까 누구나 조금씩은 염려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방탕함이나 술취함보다는 나은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왜 염려하나? 염려의 뿌리는 주인되시는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 하는 것이다. 주인을 주인으로 믿지 못하는 것이다. 보이는 현상은 술취함, 방탕함, 염려라는 것으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그 뿌리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예수님의 주인되심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말씀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마귀가 말씀을 빼앗아 간다.(눅8:12) 이생의 염려, 재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게 한다.(눅8:14) 다시 말해 염려는 방탕함이나 술취함과 같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결과물인 것이다. 마귀가 보이는 현상을 통해 너무도 쉽게 근심, 걱정, 염려를 하게 하지만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내안에 함께 사시는 예수님만 바라본다. 그러면 전능자가 이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 앞에 모든 문제는 구석으로 찌그러져 작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4:18)

마귀는 보이는 문제들로 염려하게 하며 마음을 둔하게 만든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천국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너무나 선명하다. 그러하기에 영원한 것으로 소망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 중심을 나와 동행하시는 예수님께 맞추며 나아가는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옥안에서나 밖에서나 어디에 있든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복음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다. 오늘도 예수님의 승리하심을 믿고 나아간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