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진희사모

나를 통해 예수님만 드러나는 기쁨의 동행이 되길 원합니다

새벽지기1 2017. 7. 10. 09:57


(2017. 07.07 금요새벽예배 간증)

제목: 나를 통해 예수님만 드러나는 기쁨의 동행이 되길 원합니다.(예수님과의 동행을 전하는 야고보서)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쓴 서신서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야고보는 형을 미친사람으로 여겼다.

아무리 보아도 눈앞에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야고보가 본 서신서 서두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고백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야고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때문이다. (고전15:7)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이상 그가 육신으로 만났던 형이 아닌 것이다.

죽음을 이기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 야고보가 자신의 편지에 구약의 인물 두 사람을 등장시킨다.

한 사람은 욥이요, 다른 한 사람은 엘리야이다.

욥에게서는 인내를(약5:11), 엘리야에게서는 기도를(약5:17~18) 본받으라 한다.

고난 중에도 인내했던 욥은 갑절의 축복을 받았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 엘리야의 기도의 결과는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기쁨의 결과인가?

그러나 욥은 갑절의 축복을 바라고 인내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고 인내한 결과가 물질도 가족도 갑절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엘리야의 기도는 어떠한가?

만물의 주관자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간구하는 믿음의 기도였기에

그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는 십자가, 부활, 성령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리고는 그리스도인의 행함에 대한 부분들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야고보서를 행함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율법적인 것처럼 오해하기 쉬운 것 같다.

아니 나 역시 행함만을 강조하는 서신서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야고보서말씀을 다시 보니 이것은 그저 보여지는 행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의 믿음에 대한 말씀이었다.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는 욥처럼 여러 가지 시험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의 시련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입에 재갈을 물려 말을 제어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과 벗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인내하며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이거하라 저거하라 많은 것을 하라는 것 같지만

결국은 지금 살아서 나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동행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아멘이다.

그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니 또 다시 익숙하게 살던 내가 주인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영적전쟁 가득한 세상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은 내안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내안에 예수님이 살아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무엇으로 믿을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부활로 보이지 않는 천국이 있음을 믿게 하는 것이다.

부활로 죄, 죽음, 마귀의 종에서  건짐 받았음을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만 붙들면 욕심과 세상과 마귀와 싸움에서 승리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만 붙들면 된다.

약5:17~18에서 보면 엘리야는 기도를 통해 비도 멈추게 하고 멈추었던 비도 오게 하는 능력의 종이었다. 

기도응답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다.

그러나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엘리야가 자신과 함께하시는 주님을 놓치고

자신 앞에 문제만  크게 보며 도망다니고 그러다가 죽기를 간구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놀랍게 역사하셨는데 어찌 그리 쉽게 약해질까 싶지만

죽음 앞에서 벌벌 떨며 도망했던 제자들과 같은 모습인 것이다.

엘리야의 기도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신 하나님이 크신 능력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높아질 수 없는 것이다.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반복적으로 여러번 반복되는 말이 있다면  참고 견디고 인내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참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참아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참는 것은 내 마음의 의지로 참고 누르는 것이다.

참고 또 참는 것이 반복되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되면 그동안 참은 것까지 한꺼번에 터져 버린다.

또는 참고 참아서 밖으로 터뜨리지 않으면 이와 반대로 속으로 마음이 상한다.

그러면서 참은 것이 자신의 '의'가 된다. 곧 교만해지는 것이다.

이도 저도 모두 예수님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참아지는 것은 다르다.

내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참게 된다. 기쁨으로 참게 된다.

내안에 계신 예수님께 맡길 때 참아지도록 도우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어렵지 않다. 내안에 계신 예수님만이 드러나게 된다.


어둠인 세상에서 나를 건져주신 주님,
그 주님께서 오늘도 나와 함께하심이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다.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님과 동행할 때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기쁨의 승리자가 될줄 믿는다.

나를 통해 예수님만이 드러나고 높여질줄 믿는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