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은 가까운데 마음은 멀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마음은 하나님과 멀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외식이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건다.
그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공경한다는 자들이다.
제자들이 떡 먹을 때에 왜 손을 씻지 않느냐는 것이다.
제자들도 옛날 같으면 그들이 무서워서 손을 씻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이 있어 그러한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모르면 당하지만, 알고 나면, 담대해진다.)
주님은 제자들을 옹호하시면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대답하신다.
그들은 항상 겉이 문제이다.
겉만 보이고 속은 보이지 않는다.
속에 탐욕은 괜찮고 겉에 더러운 것만 문제 삼는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속을 아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도다
입술로는, 외관상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같은데,
마음은 온통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가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경배는 헛것이다.
그리고서 사람의 계명으로 그것을 합리화하고 그렇게 남을 가르치면 그것은 헛된 경배이다.
엄연히 하나님의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교훈으로 계명을 만들어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성전과 제사장에게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자기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다.
성전과 제사장에게 재물을 바치면 부모공경은 안해도 된다는 것이다.
성전과 제사장의 탐욕이 들여다 보인다.
또한 그 핑계만 대면 부모공경의 의무를 회피할 수 있는 행악이 보인다.
종교는 항상 하나님의 계명보다는 종교특권자들의 이권의 배를 불리기 위해
나름대로의 교훈들을 만들어 합리화하곤 하였다.
하나님의 계명을 그대로 지켜서는 특권층들의 탐욕을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후진국일수록 법은 엄하고 특권층은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자기들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합리화와 교훈들이 전통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법과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고 무시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태는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겉만 포장하고 속은 탐욕과 위선으로 가득차 있는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24:19-20)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잠4:18-19)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게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통치가 살아 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잠21:2)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
하나님은 안 보고 세상만 보면 당장 뛰고 나는 놈이 최고이고 소위 장땡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보고 역사를 보면, 사필귀정이요, 화무십일홍이다.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사람의 전통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것이다.
제도권과 특권층의 논리가 항상 그러하다. (그러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자업자득, 자승자박)
항상 피상적인 것이 문제이고 본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의 구도가 변하지 않아야 내 특권과 탐욕이 지켜지기 때문이다.
그럴려면 그것을 합리화하는 많은 논리들이 등장하고 그것이 그들의 계명이 되고 전통이 된다.
그쯤 되면, 본질과 그에 따른 행위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명은 온데 간데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깨끗함을 원하신다.
마음이 깨끗해야 행위도 깨끗해지기 때문이다. ,
사람의 전통으로 계명을 삼아 가르치는 사람들은 먹기 전에 손을 씻기만 하면 거룩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거룩하라는 하나님 계명을 어긴 것처럼 야단을 한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저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이 안식일 날 병자들을 고쳐서 안식을 주는 것은 보이지 않고
형식적으로 그들이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죽일려고 하였다.
자기들의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안식일날 두 말 않고 건져내는 자들이
예수님이 병으로 오랜 고통 속에 살아온 사람들을 안식일날 고쳐서 안식을 취하게 하는 것은
안식일 계명 위반으로 몰았다.
내 유익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도 괜찮고
남이 그들이 정한 규칙을 위반하면 그것은 죽여 마땅한 듯이 흥분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정말 부모를 공경하였다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만 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전통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면서도 마음은 멀기에, 헛된 전통을 만들어 형식화하는 것이다.
카톨릭은 로마가 국교를 삼은 때로부터 천년 동안 기독교를 이렇게 바리새화했다.
사람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자리 잡고 탐욕과 방탕을 누렸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이제 5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우리는 복음이 들어온지 100여년 밖에 안됐지만, 5백년 역사를 압축해서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카톨릭처럼 순전한 말씀 위에 사람이 만든 전통들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잘못된 성경해석과 가르침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부패시키고 있다.
세상의 지혜와 방법들이 여과되지 않은 채 마치 성경의 교훈인냥 전파되고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몰라,
그들이 전하는 설교와 가르침에서 문제와 위험성을 보지 못하고 끌려간다.
카톨릭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고 접근 못하게 해서 성도들의 눈과 귀를 막은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교리와 순전한 말씀을 가르치지 않아서 모르게 하고,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방법들로 성도들을 우중화하고, 세속화하고 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우상섬기는 회중들로 만들고 있다.
심리학 방법으로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하고, 경영학 방법으로 교회를 성장시킨다고 하고 있다.
하나님 없이 사람을 치료하고 조직을 키우는 세상 방법과 지혜들이 난무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 서적들의 베스트 셀러들이 이러한 것들이다.
“긍정의 힘”이니, “목적이 이끄는 삶”이니, “리더십”과 “자기개발”의 책들이 믿음의 이름으로,
뉴에이지 신비주의 책들이, 기도와 영성의 이름으로, (금방 뭐가 된다고, 체험한다고 하니---)
교회 안에서, 유명 목사들의 추천으로 날개 돋히듯 팔리고 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들이 게으른 성도들의 마음과 삶에 퍼져들어가고 있다.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점점 소수가 되고 세력을 잃어가고 있다.
손만 씻으면 깨끗해졌다고 하는 다수의 바리새인들의 농간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마음을 깨끗이 해야 겉도 깨끗해진다는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이고 지켜야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들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23:25-26)
이어진 말씀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23:27-28)
무릇 지킬만한 것이 마음이지 겉이 아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마음을 살피시고 그 마음을 요구하신다(잠 23:26).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바리새인들은 손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지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왜 마음에서 이런 악한 것들이 나와서 더럽히는가요?
하나님이 자리 잡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 잡아야 할 마음 속에
세상과 악한 것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하나님과 먼 사람들이 얼마나 감언이설로 자기들의 불법과 위선을 합리화 하는가?
하나님을 주일 날 예배도 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자들이
꼭 자기의 더러운 습관들을 합리화하고 회개할 줄을 모른다.
그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만들고 하나님과 참된 거룩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들이야말로 마음과 입술이 따로 노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마음과 입술이 따로 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잘 지켜야 할 것이다.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마음에서는 멀어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의 행위의 동기들을 살피시고 판단하신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은 저주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여호와에게서 떠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17:5-11)
이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고 신뢰하시기 바란다.
사람을 믿고 육신으로 자기 힘을 삼는 사람들의 운명은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물 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결실이 그치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나의 마음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마음을 지키고 생명의 근원이 거기서 남을 믿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이 두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법을 다 지킨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우리의 모든 불행과 비극들이 바로 이 두 계명을 지키지 않음으로 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로마서는 그 원인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1:18)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진노나 저주는 없다고 하는 사람의 교훈과 전통을 믿지 마시기 바란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나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이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심으로 일차적으로 심판하신다고 하신다.
이것이 오늘 우리 인류의 모든 불행과 비극의 원인과 실재를 설명해주는 말씀이다.
왜 세상이 악하냐고 하기 전에 나부터 내 마음을 지키고 거룩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거기에 하나님의 복이 있고 영원한 생명의 길이 있다.
세상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을 따라 그분의 법도를 따라 사시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 인생은 언제 갑자기 끝날지 알 수가 없다.
인생의 끝을 생각해야 하고, 영원한 운명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부끄러움과 후회가 없도록
오늘 현재의 우리 마음을 지키고 깨끗하게 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의로움과 교만을 버리고 죄의 습관과 게으름을 버려야 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자취를 따라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매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사도 바울처럼 내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우리 죽을 몸에 죄가 왕노릇하지 않게 하고
우리의 정욕과 사욕에 순종치 말아야 한다.
우리의 지체를 죄에게 드리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
탐욕과 달음박질이 복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거룩함이 성취와 영광의 복을 이루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요셉과 다윗을 우리의 거울과 본으로 삼자.
불같은 연단을 거쳐 온전한 성품, 곧 거룩을 이룬 후에 그들은 높임과 영광의 복을 받았다.
그들을 보며, 우리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위해 힘써야 할지를 결단해야 한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도록, 입술과 마음이 따로 놀지 않도록
항상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자.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근심케 말고 그 인도와 조명을 받아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고 간구하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성실하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의 남은 인생과 영원한 운명의 성패가 오늘 여기서의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되, 마음은 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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