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새 존재, 새해 (고후 5:17)

새벽지기1 2017. 6. 30. 07:01


새해를 새해답게 맞이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정동진까지 가서 새해 돋아오르는 해를 본 사람도 아니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많이 받은 사람도 아닐 것이다.

 

새해를 새해답게 살려면 사람이 먼저 새로워져야 한다.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새해를 맞이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야, 그분과 연합이 이루어져야, 새로운 존재가 된다고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처리해 주셨기 때문에

이를 믿고 그분을 우리 마음 가운데 영접할 때에 새로운 존재가 된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썩지 아니할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새로운 존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말씀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복된 새해를 살 수 있을까?

새롭게 결단하여, 세 가지를 살아야 한다.

순전한 말씀, 성령의 권능, 성결한 삶이다.

이 셋을 중심으로 살 때 새해는 물론, 남은 생애에 가정과 일과 교회가 복되게 될 것이다.

 

1. 순전한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요즘은 순전한 말씀이 희귀한 시대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혼잡함으로 영적인 기갈의 시대가 되었다.

설교도, 주석도, 휴메니즘적 지식으로 채워지고 있다.

 

종교개혁은 천년동안 말씀을 혼잡한 카톨릭으로부터

순전한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조심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율법화의 대표)과 사두개인들(세속화의 대표)의 누룩을 조심해야 한다.

 

말세에 귀신의 가르침을 많이 좇을 것이라고 했다.

자기의 귀를 즐겁게 할 스승을 많이 둘 거라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나 아비는 적다고 했다.

 

사도와 선지자가 전한 순전한 성경 말씀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은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

말씀을 더하는 자도 빼는 자도 저주를 받는다고 계시록은 말씀하고 있다.

 

영과 진리(순전한 말씀)으로 드리는 예배만을 받으신다.

섞이지 않은 순전한 말씀만이 성령이 역사하시고 검으로 사용하신다.

(순전한 말씀을 전하는 곳(시대)에 참된 회심과 부흥이 많이 일어났다.)

제도권을 장악한 사람들은 항상 순전한 말씀을 버리고 자기들의 철학들을 섞었다.

 

사울왕도 솔로몬왕도 망한 것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과 그 왕들과 귀족들과 제사장들이 망한 것도 순전한 말씀을 버려서이다.

세상의 악한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한다.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 속에는 애굽이 살아 있다.

옛 사람의 사고방식과 습관, 하나님보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더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사랑하는 육체의 마음이 우리 몸에 베어 있다.

이런 것들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광야 길을 걷게 하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면서 낮추기도 주리게도 하시는 것이다

 

고난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 방법이다.

“고난 받은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시편은 고백한다.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광야 길을 거치면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배우고 살게 된다.

 

아브라함도 요셉도 모세도 다윗도 험난한 고난의 세월을 살고서야 말씀의 사람이 되었다.

성경은,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준다.

성경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한 것인 줄 알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고 지켜 행하는 자에게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형통케 하신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새해에는 성경을 사랑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순전한 말씀의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2. 성령의 권능으로 살아야 한다.

 

말씀이 머리의 돌비에 새겨진 지식만으로는 행하지를 않아서

마음의 심비에 새겨서 살게 하는 새언약의 시대를 여셨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인준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이 일을 이루셨다.

 

성령은 우리 속에 위에 영원히 함께 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인치고 보증하기 위해 오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안에 거하시는 성전이 된 것이다.

또한 성령은 우리 위에 부어짐으로써 충만케 하셔서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내적인 역사하심과 외적으로 역사하심을 다 필요로 한다.

 

우리 주님도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예수 믿고 성령이 내주하는 제자들도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을 받고서

그들이 획기적으로 달라지고 사역에 능력이 부어졌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내주하는 성령의 조명과 인도함을 받던 사람들이

어느날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경험하고서 삶과 사역이 달라졌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이 성령의 사역을 말한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은 우리가 구한다고 오시는 성령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오셔서 거듭나고 믿게 하시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말씀하고

또한 위로부터 임하셔서 영으로 충만케 하시고 회심과 권능을 주시는 성령을 말씀한다.

 

성령이 외적으로 임하실 때 내적으로도 더욱 충만해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역사가 시들해지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도 시들한 것을 본다.

토레이 목사님은 기도 제목의 첫째가 항상 성령을 구하는 기도였다고 한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지 않을려면 성령을 구하고 사모하고 의지해야 한다.

왜 말씀과 멀어지고 혼합하고 살지 못하느냐?

가장 큰 원인이, 성령을 구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보면, 진정한 부흥과 회심은 항상 성령의 부어주심의 결과였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인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와 집사들은 반복해서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경험했다.

우리도 반복해서 성령을 구하고 충만할 수 있기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순전한 말씀을 사랑하고 살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우리도 말씀과 성령의 균형을 살았던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들을 본받아야 한다.

순전한 말씀과 교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지적이고 스콜라적인 데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우리를 붙잡아 주는 진리”에 대해서보다 “우리가 주장하는 진리”에 치우치는 수가 있다.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들은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기도회는 뜨겁고 감동적이었고, 몇 시간씩 계속되었고, 큰 체험을 하게 되었다.

결국 메소디즘이 없는 칼빈주의는, 거칠고 냉랭한 신앙은 말할 것도 없고

기쁨이 없고 딱딱한 신앙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주지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순전한 말씀은 불이 붙어야 하고, 불은 순전한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순전한 말씀과 함께 항상 성령을 구하고 사모하고 의지하시기를 바란다.

말씀을 사랑하고 사는 비결도, 우리의 성품과 삶의 변화하는 비결도 성령께 있다.

시기하기까지 사모하는 성령의 내적 역사, 외적 역사를 다 구하고 의지하시기 바란다.

 

로이드 존스는 말한다.

“교회가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는데 관심을 쏟기만 한다면!

성령께서 어떤 개인의 마음이나,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권능으로,

기이한 방식으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임할 때,

그 소문은 퍼져나가 마음들이 불붙게 되고

그들은 그 부흥에 참여하고 싶어할 것이며 그것에 동참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서는 항상 잘못된 신비주의와 영적인 광신이 있어 왔다.

오늘날에도 성령을 빙자하여 쓰러트리고 병고치고 귀신을 좇는다는 역사들이

미혹의 영들의 장난인 것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이 성경의 말씀들을 얼마나 왜곡하고 제멋대로 해석하는지 알게 되면 놀라게 된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해야 한다.

영을 다 믿지 말고 하나님께로 온 영인지 미혹의 영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성경을 쓰신 성령은 결코 성경을 왜곡하거나 적 해석을 하는 영이 되실 수 없다.

 

보고 듣고 에너지를 느끼고 신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다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이다.

초대교회를 괴롭히던 영지주의가 현대에는 뉴에이지와 관상기도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이 미혹의 영들의 연원과 정체들이 밝혀지고 있다.

 

힌두교와 동양의 신비주의가 하던 도닦고 신체험하는 방식들이 사막의 교부들을 통해

경건주의로 이어져 왔고, 지금은 침묵기도 관상기도란 방법으로 교회들을 미혹하고 있다.

 

여기 화성 한 구석에 고난의 둥지를 틀고 있으면서도,

기도와 성경연구와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능히 분별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에겐 성경과 기독교의 역사에 대한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고,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3.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왜,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귀신의 가르침과 미혹의 영들에 미혹되느냐?

죄와 사탄이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도록 내버려 두고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정욕과 사욕에 순종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이다.

거룩은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온전한 성품을 말한다.

바리새인의 의가 거룩이 아니고, 거룩은 생명이고 활력이고 온전함이고 성숙이다.

 

거룩은 유일한 행복의 길이고, 영원한 행복의 길이다.

많은 소유와 좋은 환경이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거룩과 성결만이 행복을 가져오는 유일한 길이고, 영원한 행복을 보장한다.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는 거룩해져야 한다.

거룩한 자에게 하나님은 가나안 기업을 주시고 능력과 지혜를 부어주신다.

고난의 훈련 없이, 거룩의 연단 없이, 왕이 되었던 사울과 솔로몬,

많은 왕들과 제사장들, 또 역사상 세상의 왕들과 지도자들이,

현재 우리의 거울과 경계로 교훈과 책망으로 본이 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신다.

 

성령으로 말씀을 살게 하시는 목적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데 있다.

그분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온전함 같이 우리도 온전하시기를 원하신다.

 

(벧후 3:10-14)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말씀을 따라서, 죄와 육체와 사탄과 세상과 싸워 이겨야 한다.

영과 말씀으로 거듭나서 새로워진 존재 영혼만이

우리 죽음 몸에 남아 있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다.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사탄과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다.

 

우리 죽을 몸에 남아 있는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고 사욕에 순종치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의 지체를 죄에게 불법의 무기로 주지 말고 의에게 드려

우리는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우리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

회개하는 자에게 천국을 주신다.

성취과 성공이 아니라 성결을 이루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사용하신다.

죄와 육체와 사탄과 세상과 싸워 이기며 거룩함에 이르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죄와 더불어 살고 말씀과 성령과 멀어진 사람이 일시적으로 형통할 수 있다.

성경은 그것을 악인의 형통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은 말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대로 산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이 귀족들이 제사장들이 악인의 형통을 누리다가

돌이킬 수 없는 멸망과 저주에 이르렀다.

성전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지고 포로로 잡혀가고 온 세상에 흩어지고 말았다.

 

우리의 형통은 요셉과 다윗의 형통이어야 하고, 아브라함과 모세의 형통이어야 한다.

우리가 순전한 말씀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거룩한 삶으로 새해를 살 때

새해는 형통한 새해가 될 것이다.

우리의 남은 생애도 형통한 생애가 될 것이고, 가정과 일과 교회도 형통하게 될 것이다.

 

새해를 살면서, 남은 생애를 살면서, 말씀! 성령! 거룩!

이 세 단어가 푯대의 깃발이 되고, 그루터기와 기초 반석이 되시길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