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언약궤와 영광 (삼상 4:15-22)

새벽지기1 2017. 3. 28. 07:26


영광은 구원과 행함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라”(롬2:6-10)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불의로 이룬 세상의 영광을 부러워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의 심판을 불러오고, 환난과 곤고가 찾아오게 된다.

악인은 등불이 꺼짐같이 망하고 풀이 시들듯이 쇠할 날이 온다.

 

영광은 겸손과 성결의 산물이지, 교만과 성취의 산물이 아니다.

스스로를 높이고, 오직 탐욕과 죄악으로, 쌓은 부와 권력의 영광은

썩어질 영광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의 패망은 인류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리비아의 카다피를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부와 권력을 좋아하고 향해 불나방처럼 달겨든다.

 

참다운 영광을 이루는 겸손과 성결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으로써 우리의 죄와 탐욕(몸의 행실)과 피터지도록 싸우는 과정이 있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광야의 훈련이요 연단의 과정이다.

 

그렇게 이룬 겸손한 성품과 거룩한 삶에 하나님은 복과 영광을 주신다.

영광을 받으려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세상에 눈돌리지 말고 이 원리를 목에 걸고 이마에 붙이고 손목에 차기 바란다.

 

비록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들은 없을지라도

내가 지금 겸손히 낮아지고 있으며 깨끗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복있는 사람이고 영광을 누리고 물려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언약궤를 빼앗겨서 영광이 떠나갔다고 한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그 떠나간 이유를 한 가지 더 들고 있다.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언약궤를 적군에게 빼앗기고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어서 영광이 떠난건가?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상징한다.

하나님이 언약궤 안에 갇히고, 사람이 만든 언약궤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다.

 

언약궤가 의미를 갖는 것은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식적이고, 말씀과 그 말씀이 명하는 삶이 무시될 때

이미 언약궤는 그 의미를 상실한 것이고, 죽은 언약궤에 지나지 않는다.

언약궤를 빼앗겨서, 시아버지와 남편 제사장이 죽어서, 영광이 떠난 것이 아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착각을 한 것이다.

 

엘리와 그 아들들이 행한 하나님 멸시와 악행이 영광을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게 했다.

그들이 행한 대로 보응하신 것이다.

그 사실을 하나님은 언약궤 빼앗긴 사건을 통해서,

‘이가봇’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의미를 종합해 보면, 언약궤를 빼앗기면 영광이 떠나간다는 것은 사실이다.

언약궤를 빼앗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엘리 제사장처럼 살고, 엘리의 두 아들처럼, 사울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언약궤를 빼앗긴 삶을 산 사람들이다.

 

언약궤를 다시 찾아오면 영광을 다시 돌아 온다는 것이다.

언약궤를 다시 찾아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나처럼 살고, 사무엘처럼, 다윗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언약궤를 다시 찾은 사람들이다.

 

두 집안의 결과를 보면서 언약궤를 빼앗기는 것과 다시 찾아오는 것의

엄청난 차이와 결과를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엘리는 제사장이자 사사(왕)로서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권력과 부를 함께 누리면서 그는 눈이 멀어졌고 귀가 어두워졌으며

몸은 비대해지고 목은 곧아졌다.

언약궤의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 결과이다.

 

그래서 그는 진리와 거룩으로 섬겨야 할 하나님도,

빛과 진리로 인도해야 할 백성들도, 멸시하게 되었고

악행을 저지르는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선지자를 보내서, 사무엘을 통해서 친히 말씀하시는데도

그는 자신과 두 아들들을 돌이킬 줄을 모르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두 아들은 언약궤를 빼앗기면서 전쟁터에서 함께 죽고

엘리는 그 소식을 듣자 마자 목이 부러져 죽었다.

어쩌면 사울왕과 세 아들의 최후와 똑같은지 역사는 왜 반복되는지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제사장과 왕들과 거짓선지자들의 악행 때문에,

그리고 그들을 좋다 하고 따르는 백성들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고, 그리고서는 얼마 후에 나라가 망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내 인생과 집안과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영광을 떠나게 하는 것은 언약궤를 버리고 우상숭배와 불의를 행하는 죄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할 때 내 인생 가정 교회 나라가 번영하고 천국이 이루어진다.

영광이 함께 하는 것은 언약궤를 되찾고 하나님 경외와 순종으로 살 때이다.

 

엘리와 두 아들과 백성들은 언약궤를 가져가면 전쟁에 이길 줄 알았다.

성전에 있어야 할 언약궤를 가져가면 그것으로 이길 줄 알고 가져왔다.

언약궤는 미신의 대상이 아니다.

 

온갖 악행은 다 저지르면서 그 언약궤만 모시면 전쟁을 이길 줄 아는 것이 문제이다.

형식적인 종교, 믿음은 미신과 같다.

필요하고 아쉬울 때만 종교적인 행위를 선심 쓰듯하면 하나님을 조종할 줄 안다.

 

다시 언약궤만 차고 앉으면 만사가 다시 형통할 줄로 안다.

‘아, 언약궤를 좀 멀리 했더니 안 좋은 일들이 생기는구나.

선심 써서 좀 가까이 해야지‘. 하는 정도이다.

 

이가봇의 원인은 그들의 죄악에 있었다.

두 아들 제사장은 어떤 짓들을 성전에서 하고 있었던가?

엘리 제사장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두 아들은 하나님의 재물과 예물을 밟고 있었고

엘리는 의자에 졸며 앉아 있었고, 그러한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중히 여겼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이것이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2:30)

내가 존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애끓며 안달박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존중하는 것이다.

자식과 배우자와 재물과 소유와 권력과 명예를 하나님보다 더 존중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보다 세상 지혜와 방법을 따라사는 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엘리는 98세를 살고 40년을 사사로 지냈다. 세상에서 얼마나 부러워하는 인생인가?

그러나 그것이 그를 살게 해주지 못하고 비참한 몰락을 가져왔다.

 

그 후손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다.

젊어서 죽게 하고, 제사장 직분을 구걸하여 떡 한덩어리를 얻어먹는 신세가 되게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요, 저주였다. 하나님이 행한 대로 보응하신 것이다.


목이 부러진 것은 우상숭배에 대한 처벌이다.

빼앗긴 언약궤를 블레셋 사람들이 다곤 신상 앞에 두었을 때 신상의 목이 부러졌다.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백성이었다.

 

목이 곧으면 부러진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목이 부드러워야, 겸손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고 영광을 가져온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리는도다”(행7:51)

 

목이 곧은 사람들은 항상 성령을 거스린다.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산다.

그들에겐 말씀이 들리지 않고 오직 육의 소리만 들린다.

그들에겐 자기 의와 자기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목이 곧았던 사울왕은 말씀을 순종할 줄을 모르다가 왕관을 잃고 말았다.

(삼상 15:22-23)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언약궤를 빼앗긴 엘리 집안은 몰락하고, 언약궤를 모신 사무엘 집안은 흥하게 하셨다.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죽이기를 뜻하셨음이라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2:25-26)

 

영광이 떠나는 집안(엘리, 사울), 죽어가는 집안이 한쪽에 있고,

영광이 찾아오는 집안, 영광으로 세워지는 집안이 한쪽에 있다.

제도권을 장악하고 온갖 권세와 부귀로 영광을 누리는 것 같은데

그들의 우상숭배와 악행으로 인하여 엄청난 비극과 몰락으로 끝장이 나고 만다.

 

왜, 그들이 그랬는가? 그들이 언약궤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

 

엘리는 눈 멀고 귀멀고 몸은 비대하고 언약궤 옆보다는 자기 자리에 눕기를 좋아하였다.

어린 사무엘은 언약궤 옆에서 자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였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3:21)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3:19)

 

하나님이 영광으로 세우는 집안은 사무엘의 집이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2:35)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언약궤의 삶을 통해, 낳은 아들인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한나를 선택하여 아들이 없어서 설움과 고난을 겪게 하셨다.

그 한나의 통곡과 눈물의 서원을 받으시고 하나님은 한나에게 아들 사무엘을 주셨다.


한나는 아들이 젖을 떼자 마자 서원을 지켜서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되 평생을 드렸다.

한나의 이러한 언약궤의 삶이 그녀의 가정과 사무엘 아들에게 영광을 가져오게 하였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살아 있는 집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집안이 한나의 집이었다.

엘리의 집안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죽어 있는 집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죽어있는 집이었다.

그 결과가 언약궤를 빼앗기는 사건을 가져왔고, 며느리가 이가봇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님은 그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심으로 복을 주셨다.

가장 큰 복은 그녀가 하나님께 평생을 드린 사무엘의 생애이다.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사무엘은 선지자 제사장 왕(사사)으로 살며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사울왕과 다윗왕을 그의 손으로 세웠다.

 

엘리의 집안과 한나의 집안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겠는가?

40년간의 부귀와 권력을 누렸지만, 하루아침에 본인은 목이 부러져 죽고,

두 아들은 전쟁터에서 죽고, 언약궤는 빼앗기고,

며느리는 이가봇을 낳다 죽고, 후손들은 구걸하는 제사장, 젊어서 죽게 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애를 못낳아 고통과 시련 속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서원하여 아들을 낳고

약속대로 아들을 젖을 떼자마자 드림으로, 언약궤 앞에서 언약궤의 삶을 살아

자기 집안과 아들의 영광, 이스라엘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오는 삶을 살 것인가?

 

우리 생애 가운데 돈과 명예와 권력은 떨어져 나갈지라도 언약궤는 떠나지 않게 하자.

자식들보다 소유와 환경보다 하나님을 더 존중히 여기자.

현재의 죄악의 누림(눈멀고 귀멀고 비대함)보다,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자.

 

영광이 없는 현재의 왕관(사사40년,98세)을 부러워하지 말자.

엘리의 집안, 이가봇의 집안을 만들지 말자.

이가봇을 낳지 말자.

목이 곧아지지 않게 하자. 그래서 목이 부러지는 일이 없게 하자.

눈멀고 귀멀고 나이 많고 비대해지지 말자.

 

자기 자리에 눕는 것을 좋아하기 말고, 언약궤 옆에 눕는 것을 좋아하자.

언약궤를 사랑하고, 언약궤의 삶을 살고, 언약궤를 미신처럼 믿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