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라은성목사

성탄절

새벽지기1 2016. 11. 30. 07:46

‘그리스도의 오심’ 순전한 의미 되새겨야
‘태어나심’에 초점 맞추지 말고 ‘오심’의 구속사역에 초점 맞춰야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여기저기서 성탄절 캐럴이 들린다. 이런 분위기는 1월까지 이어지고, 감성적인 흥분을 부추기기에 충분하다. 이에 반해 교회는 성탄절의 순전한 의미를 되새기려고 노력한다.


이교적 성탄절

성탄절의 유래는 초대교회 역사에서 찾기 어렵다. 있다면 4세기 동방교회의 1월 6일 그리스도의 공현, 현현 또는 주현절(Epiphany) 축제와 관련을 맺을 수 있다. 303년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는 그리스도의 태어남에 관한 축제는 어리석은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성탄절을 지킨 자들은 북아프리카에서 활동하던 이단 도나투스파(Donatists)였다. 이단은 그리스도의 오심보다 인간되심에 관심을 가졌기에 성탄절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축제였던 것이다.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교도가 교회에 유입되면서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유행하던 신화, 즉 유울(Yule)과 태양숭배 사상과 성탄절을 연관시켰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오심보다 탄생 또는 인간되심과 관련시켜 축제로 지키곤 했다. 하지만 종교개혁과 청교도 시대에 이르러 성탄절 축제는 이교적이고 비성경적이기에 지키지 말 것을 명했다.

계몽운동에 영향을 받은 모더니즘(Modernism)의 시대, 즉 19세기에 이르러 찰스 딕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년)가 쓴 <성탄절 캐럴>(A Christmas Carol)이 출판되면서 성탄절과 연말 축제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여기에 영국 성공회의 예전(禮典)의 복고풍을 주도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도 큰 역할을 감당했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금지된 이교적 성탄절 나무 장식까지 등장하게 이르렀다. 1832년 영국 여왕 빅토리아는 성탄절 나무 장식을 기쁨으로 삼았고 그 이후 현재까지 성탄절 나무 장식은 축제의 절정이 된 것이다.


성탄절의 자세

성탄절은 기독교의 축제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어도 역사적이거나 성경적이진 않다. 그래서 성탄절을 그리스도의 태어나심 또는 인간되심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리스도의 오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초림은 결국 재림과 관련을 맺고 있기에 성탄절은 초림에만 관심을 갖고 기쁨과 축제는 재림과 심판에만 관심을 가지는 오류를 갖게 된다.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말고 그분의 오심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탄절 성경 본문을 택할 때에도 메시아와 관련된 본문을 기초로 하여 그리스도의 사역, 특별히 구속사역, 그분의 오심의 대망과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 그 대망이 주는 영향과 지표에 집중해야 한다.


성탄절을 위한 성경 본문

성탄절에 적절한 성경 본문들은 성육신과 관련을 맺어야 한다. 추천하는 본문은 히브리서 2장 5~18절, 빌립보서 2장 5~8절, 시편 22편 그리고 이사야 7장 등이다. 만일 주님의 탄생에만 집중하는 설교가 되면 정보 전달하는 강의와 도덕적 설교에 그칠 뿐 말씀 선포가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성탄절 성구들과 그 해석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면 그런 설교 역시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본문들 중 이사야 7장을 선택하여 함께 성탄절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7장은 찬양으로 마무리되는 12장까지 한 묶음이다. 그 역사적 배경은 열왕기하 16장과 역대하 28장 16~21절이다. 유다 왕 아하스가 16년을 다스렸던 해 북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이 동맹을 맺어 아하스를 공격하려 한다. 두려움에 싸인 아하스는 사신을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보내어 도움을 청하면서 성전과 궁전에 있는 금은 패물을 그에게 뇌물로 바친다. 두려움을 제거해준 디글랏빌레셋에 고마운 나머지 아하스는 앗수르의 우상숭배 관습을 답습하게 된다.

앗수르 왕의 도움을 청하기 전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아하스에게 보내신다. 이사야는 두려움의 대상이 단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고 하며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구하라”(사 7:4, 11)고 명한다. 하지만 아하스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12절)다고 대답하며 거절한다. 이에 대해 이사야는 징조로서 “임마누엘”(14절)을 예언한다.

어려움을 직면한 아하스에게 메시아의 예언은 무슨 의미였을까? 중요한 의미가 있었지만 무지한 아하스는 그 의미를 알고자 하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세력을 더 선호했다. 그 결과에 대해 그는 책임을 져야만 했다.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은 히스기야 왕 때에 유다를 공격한다(사 8:7~8, 36:1). 아하스 왕에게 메시아의 오심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분의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절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찾아야할까?


성탄절은 일반 성례다

한 마디로 성례다. 성례의 의미를 알면 오늘의 말씀을 푸는 열쇠를 갖는 셈이다. 성례란? “연약한 우리 믿음을 보존하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 양심에 우리를 향한 선한 의지의 약속을 인 치신 외적 상징”이다(<기독교강요> 4권 14장 1항).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두 성례, 즉 세례와 성찬보다 일반 성례로서 성경에서 가끔 연약한 성도들에게 보이시는 가시적인 일들을 의미한다(<기독교강요> 4권 14장 18항).

그러나 이런 가시적인 일들 또는 상징에 너무 매여 있는 것도 안되지만 아예 무시해서도 안된다. 균형을 잡으면서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것을 보고도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즉 부성애(父性愛) 또는 인자하심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죄성 때문이다(<기독교강요> 1권 15장 15항).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분이 계시하는 가시적 일들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하고 극단적이고 이기적으로만 해석하고 만다. 자신에는 유익하지만 가족, 교회, 사회 및 단체에는 해가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신의 의를 위한 것이 되고 만다.

가시적 사건에 직면한 아하스는 자기중심적 해석을 따랐다(12절). 이것은 그의 범죄 행위들에 기초했다. 심지어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왕하 16:3~4) 할 정도로 세속적 관습에 얽매어 있었다. 이런 범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두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임을 아하스는 깨닫지 못한다. 후에 히스기야는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간구한다(사 37장).


성탄절은 회개와 신뢰다

무지한 아하스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언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뤄진 구속사역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다. 직면한 어려움은 회개케 하시는데 목적인 일반 성례였다. 그 회개는 단순히 후회하는 차원이 아닌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돌이킴이다.

구약성경의 인물들은 (초림과 재림의) 메시아를 바라보고 그분께 모든 심판을 맡기므로 극복하고 견디었다. 아하스는 자신의 범죄로 죽으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바라봐야만 했고, 그분만을 의지했을 때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만 했다. 그러면 언제든 하나님은 18만 5천명을 죽이시는 것처럼 행하신다(사 37:36). 언제든 그분은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이시다(삼상 2:7).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오심, 즉 메시아를 바라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라는 것을 의미한다(요일 4:9). 사랑의 극치는 그분의 오심이다. 회개와 신뢰를 가지라고 아하스에게 명한 것이다.

이처럼 성탄절을 통해 어떤 일들을 직면하더라도 자신을 냉철하게 살펴보며 순전한 마음을 가지면서 그분만을 신뢰하는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성탄절을 그분의 오심을 되새기는 날로 지켰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