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단상

백두산을 가다(1) 황해를 가로지른 긴긴 항해

새벽지기1 2016. 11. 17. 09:13


몇몇 신학교 동기들과 함께 꿈에 그리던 백두산, 한민족의 후예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백두산에 갔다. 마음 같아서는 판문점을 통과해 개성과 평양을 거쳐 한 걸음에 가고 싶었으나 남북분단이라는 현실을 뛰어넘을 방법이 없는지라 황해를 가로질러 중국을 경유해 갔다. 그것도 항로가 아닌 뱃길로.


가는 길은 멀고도 지루했다. 6월 3일 낯 12시 20분에 집에서 나와 용인버스터미널에서 1시에 출발하는 인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인천버스터미널까지 꼭 1시간 30분이 걸렸고, 국제여객터미널까지는 택시로 25분을 달려 약속한 3시에 정확히 도착했다. 여객터미널에 도착하니 친구 2-3명이 보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성경 번역 선교사로 일했던 친구도 수십 년 만에 만났다. 잠시 또 다른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목이 탔다. 다른 친구들도 나처럼 먼 길을 달려 왔을 걸 생각하니 목이 탈 것 같아 시원한 팥빙수 5개를 주문해 나눠 먹었다. 곧이어 비자발급 신청서를 작성하고 출항 2시간 전인 오후 4시에 탑승 수속을 밟아 배에 몸을 실었다.

 

난생 처음 타보는 국제여객선의 내부가 궁금했다. 이번 여행을 총괄하는 총무 말로는 티켓 구매가 늦어진 탓에 6인실을 얻지 못했다는데 하룻밤을 묵을 객실이 어떨지 궁금했다. 승무원은 우리를 3층으로 안내했다. 3층으로 가는 자들은 우리 외에도 굉장히 많았다. 앞선 자들을 따라 올라가니 150명은 족히 들어갈 큰 방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는 매트리스가 깔려 있고 매트리스마다 베개와 이불이 놓여 있었다. 꼭 군대 막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객실에 들어가 대충 살펴보니 남은 자리가 거의 없었다.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북적대는 곳에서 밤새, 그것도 16시간을 항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까마득하기만 했다.


그런데 친구 목사님은 자리를 잡자마자 누울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반색하는 거였다. 비행기는 꼬박 자기 자리에 앉아 가야 하는데 배는 이동 공간도 넓고 편히 누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몇 번을 되뇌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예전에 독일에 갈 때 14시간을 비행한 적이 있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이동 수단이 비행기라는 건 매우 역설적이지만 진실이다. 나도 자리에 누우며 ‘아! 누울 수 있으니 정말 좋다’고 친구의 말에 거들었다. 정말이었다. 집보다야 못하지만 누울 수 있어서 편안했다.

 

배는 정확히 6시에 출항했다. 배의 엔진이 가동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갑판으로 나갔다. 나도 따라 갑판으로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점차 멀어져가는 인천항의 모습과 가까이 다가오는 인천대교, 그리고 갈매기와 바다 풍경을 찍느라 분주했다. 나도 인천 대교 밑을 지나며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7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원탁이 20여개 정도 놓여 있는 식당에서 친구 한 명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같은 식탁에 앉은 중국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자기는 단동에서 사역하는 중국 지하교회의 영적 지도자이며, 온누리교회와 새문안교회에 와서 중국 선교와 관련된 일을 추진하고 가는 거라고 했다. 이 사람이 한국말을 할 줄 알아서 약간의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중국의 3자교회가 허울만의 교회가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고백하는 교회라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단동이 인구 300만 정도의 작은 도시라 했다. 인구가 300만이면 한국에서는 부산 규모의 큰 도시인데 중국에서는 작은 도시라고 하니 인식의 차이가 크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다시 객실로 돌아와 주변을 둘러보니 일찍이 누워서 잠을 청하는 사람, TV를 시청하는 사람, 바삐 왔다 갔다 하는 사람,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 뭔가를 꺼내 먹는 사람 등등 제각각이었다. 우리 일행도 그들 틈에서 앉거나 누워 향방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부담 없는 동기들끼리인지라 내용도 형식도 없이 자유롭게, 각자가 편안한 몸으로,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가볍게 대화를 이어갔다. 물론 꽤 유익한 대화였다. 하지만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 하는 대화이기도 했다.

 

그렇게 대화가 익어갈 무렵 초저녁인데도 피곤이 밀려왔다. 나는 이내 곧 잠에 떨어졌다. 아마 한 시간쯤 잤을 것이다. 다시 깨어난 나는 몸의 활력이 살아난 것을 느끼며 유쾌한 마음으로 다시 친구들의 이야기 마당에 참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친구들이 한 사람씩 잠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대화도 점차 잠잠해졌다. 말이 멈추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책을 꺼냈다. 오래 전에 읽었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레슬리 뉴비긴)을 꺼내 ‘다원주의의 근원’, ‘아는 것과 믿는 것’에 대한 부분을 읽었다. 다양성을 보편 원리로 존중하는 다원주의 사회의 위험성과 모순이 잘 드러나 있었고, 믿는 것이 아는 것보다 어리석은 짓이라는 통념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매우 중요한 지적임을 공감하면서 진실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기쁨을 맛보았다.


갑자기 깊은 밤중의 항해가 보고 싶어졌다. 책을 덮고 갑판으로 나갔다. 온통 어둠이었다. 안개 또한 짙어 습한 바람이 온 몸에 닿았다. 배가 바닷물을 가르는 소리와 출렁이며 부딪치는 파도소리만이 귓가를 스칠 뿐 어둠과 적막만이 세상의 전부였다. 망망대해 깊은 어둠 속을 홀로 달리는 배 위에서 나는 한 동안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집에서도 종종 어둠을 바라보곤 했는데, 어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든 존재는 사라지고 나만 홀로 남는다. 어둠과 나, 그것이 세상의 전부다. 배에서는 더 그랬다. 망망대해의 어둠 속에 홀로 숨어 있는 나는 너무 작았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상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럴 즈음 추위가 몸 안으로 들어왔다.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후다닥 객실로 돌아왔다. 환하게 불 켜진 객실로 돌아오자 어둠속을 찾아온 상념이 순식간에 달아나버렸다. 어둠 속에서 마음의 불이 켜졌던 게 빛 속으로 돌아오자 마음의 불이 꺼져버렸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깊은 잠을 자지는 못했지만 자가 깨다를 반복하면서 아침이 밝았다. 객실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비몽사몽간을 헤매다가 아침을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아침을 먹고 나서도 2시간여 항해를 해야 하는데 계속 서른 잠에 빠져 들었다. 배가 입항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창밖을 보니 컨테이너 박스를 싣고 내리는 부두가 보였다. 그런데도 배는 멈추지 않고 15분 이상을 계속 전진하는 거였다. 비록 컨테이너 박스가 인천의 부두만큼 쌓여 있지는 않았지만(인천 부두에는 컨테이너 박스가 입추의 여지없이 쌓여 있었던데 비해 동항은 대부분 비어 있었음) 미래를 위해 거대한 스케일의 부두 시설을 해놓은 거였다. 아마도 북한과 한국을 겨냥한 것일 것 같은데 항구의 규모가 정말 컸다. 넓고도 넓었다. 내 눈에 들어온 중국의 첫 인상은 거대함이었다. 16시간이라는 긴긴 항해 끝에 첫 발을 디딘 그 땅은 거대함의 땅이었다.

 

 

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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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을 신세진 배의 객실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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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항의 부두 - 멀리 쌓여있는 석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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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공항과 송됴 국제도시를 잇는 인천대교의 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