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에스 루이스(C.S.Lewis)가 쓴 [기적]은 심오한 사색과 정교한 논리가 돋보이는 탁월한 책이다. ‘기적’에 대한 문제는 어느 시대에나 기독교 안팎의 뜨거운 논쟁점이었지만 루이스만큼 이 문제의 성격을 정확하게 짚어낸 이는 없는 것 같다. 루이스는 기적을 “자연에 대한 초자연적 힘의 간섭”이라고 규정하면서도 믿음의 문제라고 말하지 않는다. 믿음 이전에 철학의 문제(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철학적인 방식으로 하나하나 세밀하게 묻고 따진다. 하여, 책읽기가 그리 편하지는 않다. 저자의 논리가 그리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생각을 거듭해야만 저자의 논리를 따라잡을 수 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루이스가 참 대단한 변증가요 인문학자라는 사실에 감탄할 것이고, 기적 논쟁의 종결자로 추켜세우고픈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감히 확신한다.
그는 자연을 실체의 전부로 파악하는 자연주의의 문제점을 인간의 ‘의지’와 ‘이성’을 가지고 논박한다. 만일 자연만이 전부라면 자연의 한 부분인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건 존재할 수 없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행사하고 있고, 또 ‘앎’이라는 것도 뇌가 제공하는 물리적인 반응이 전부이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뇌의 물리적인 반응을 넘는 유추와 통찰을 통해 ‘앎’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한다(3장). 옳은 지적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지식을 잘 살펴보라. 모든 지식은 그 자신이 아는 어떤 대상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의 앎은 유추와 통찰이라는 초물리적인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우주적인 사슬에 매인 자연의 종속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쾌락, 고통, 두려움, 희망, 애정, 정신적 이미지 등은 자연의 부분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성은 다르다.
이성적 행위는 우리에게 ‘발생하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무엇이라고(58쪽), 각 인간 정신은 초자연으로부터 자연 속으로 들어온 것이라고(57쪽) 말한 루이스의 견해는 분명 옳다. 자연과 이성이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자연을 흡수하나 자연은 이성을 흡수할 수 없다는 면에서 그 상호작용은 한계가 있고, 또 자연이 우리의 생각을 낳고 변경시킬 수 있게 된다면 그 순간 우리의 이성은 자연에 종속되어버리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할 테니까 말이다. 사실이다. 이성은 결코 자연에 종속된 무엇일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보편적 인식에 어긋난다. 결국 자연주의적 관점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의 활동조차도 정직하게 설명할 수 없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루이스의 기적 이해는 매우 건전하고 균형이 잡혀 있다. 그는 기적을 자연의 법칙을 깨는 것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기적은 초자연적인 세력이 자연의 세계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것일 뿐 자연의 법칙을 깨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기적이란 하나님의 특별한 활동이 자연의 영역에 들어오는 순간의 사건일 뿐이고, 일단 자연의 영역에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자연의 모든 법칙에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리아의 몸에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정자가 잉태되었으나 잉태 이후부터는 다른 아이의 생명이 잉태되는 모든 과정을 똑같이 겪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의 외부 개방성을 자연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과감성을 보인다(8장).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변경되는 것은 아마 그렇게 변경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의 본질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 파악할 수 없어서 그렇지, 아마 자연이라는 전 사건의 성격 자체가 그런 식의 변경 가능성을 내포한 것일 것입니다.”(119쪽). 그러면서 기적을 굳이 기적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런 일을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일이 모순이라거나 폭행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연은 그대로 두면 자신의 혼자 힘으로는 기적을 산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119쪽). 이쯤 되면 기적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기적’과 ‘자연’의 거리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루이스의 탁견은 또 있다. 그는 기적과 마술의 차이점, 기적의 진정성 여부를 판별하는 준거점을 명백성이나 역사적 개연성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예수님)의 스타일에서 찾았다. 기적은 하나님이 하시는 다른 행위들과 동떨어진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평상시에 너무 크게 하고 계신 일, 그래서 사람들이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는 일을 바로 가까이에서 작게 그래서 또렷하게 보이도록 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스타일이야말로 기적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준거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몇 개의 빵을 여러 개의 빵으로 만드는 기적은 하나님이 평소에 하시는 번식 활동에 속한 일인데 비해, 돌덩이를 빵으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이 평소에 일하시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이다(15장). 참으로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루이스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도 이와 같은 논리적인 방식, 자연의 방식으로 설명한다. 이처럼 논리적이고 자연적인 방식으로 기적의 실제성을 변증하는 그는 기적을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제가 보는 바로는 전적으로 기적적이요 초자연적인 - 가히 미개하고 마술적으로 보일 수 있는 - 요소야말로 다름 아니라 기독교의 진짜 핵심, 모든 부차적인 요소를 최대한 벗겨낼 때 남는 진짜 정수이기 때문입니다.”(136쪽). 옳다. 오늘날 소위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 과학을 신뢰하는 그리스도인들, 과학이 신학을 지배하는 현실을 중시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성경의 기적을 믿는 자들을 문자주의자라고 힐난하고, 성경에 나타난 기적을 다양한 방식으로 희석하려 하지만 루이스는 “자연주의적 기독교는 기독교의 고유한 요소를 모조리 제거한 기독교에 불과합니다.”(132쪽)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사실 기적을 거부하는 기독교, 자연주의적 관점으로 기독교를 해석하는 신앙적 행위는 범신론적 이신론(理神論, Deism)의 옷을 입은 것에 불과하고, 기독교를 종교적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한 번 따져보라. 자연주의와 기독교가 과연 양립할 수 있는가? 신앙과 과학은 양립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자연주의와 기독교는 절대 양립할 수 없다. 그 둘은 세계관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데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초자연의 세계를 인식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초자연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주의에 설득되는 오류에 빠지곤 한다. 그 때문에 기독교는 쉬지 않고 자연주의의 공격을 받아야 했고, 기독교 안에서도 자연주의의 틀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있어 왔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기적과 은유와 신화를 구별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적과 은유, 기적과 신화는 마땅히 구별되어야 한다. 하지만 기적을 은유와 신화로 해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고, 성경적 세계관을 거부하는 반기독교적 행위이다.
기독교는 언제나 기적으로 인해 능멸을 받아왔다. 미개하고 마술적인 종교라는 오해를 받아왔다. 과학이 신앙을 지배하는 오늘 이 시대는 더더욱 그렇다. 오늘도 여전히 기독교는 자연주의와 과학적 태도를 동일시하는 시대의 유혹 앞에 서 있다. 기적을 부정하는 것이 인문학적 교양을 갖춘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조류의 위협을 받고 있다. 루이스의 [기적]은 이런 시대의 유혹과 조류를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변증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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