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노동이다. 철학자 김상봉(전남대 교수)이 쓴 [호모 에티쿠스]를 읽는 것도 그랬다. 도덕이라는 무척 어렵고 고답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속삭이듯 다정하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어서 정말 즐겁게 읽었다. [호모 에티쿠스]는 인간이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탐구한 책이다. 그리스의 소피스트들로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칸트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에 나타난 도덕, 즉 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탐구하고 있다.
여기서 김상봉은 칸트 이전의 윤리학이 순수한 의미의 도덕성을 문제 삼은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칸트 이전의 윤리학이 관심을 가진 것은 엄격히 말해 행복이었지 윤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249쪽). 인간의 도덕적 현상을 행복이라는 관점, 즉 삶의 최고의 덕목이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행복에 유익한 것은 선이고, 행복에 해가 되는 것은 악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칸트는 그 한계를 발견하고 도덕의 본질을 의무라는 강제성에서 찾았다. 행복에 도움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막무가내로 명령하는 도덕적 당위의 정체를 윤리학의 근본 문제로 삼았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 까닭이 도덕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무엇을 위해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단지 선이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읽으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선을 행하는 것이 행복에 도움이 되거나 이익이 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라면, 그런 선은 진정한 선일 수 없을 테니까. 법률의 명령 때문이거나 권력의 요구 때문에 행하는 것도 진정한 의미의 선일 수 없고, 오직 의무 때문에 하는 행위, 내면에서 울려오는 양심의 요구와 명령 때문에 하는 행위만이 선일 수 있을 테니까. 하여, 칸트는 선을 행한 결과가 이익이든 손해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도덕만이 최상의 가치라고 여긴다. 이처럼 칸트의 윤리학은 철저하게 의무의 윤리학이다. 이런 칸트를 김상봉은 도덕을 행복의 방법론에서 구한 자, 도덕적 강제의 본질적 의미를 윤리학의 중심에 놓은 최초의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나는 김상봉이 설명하는 칸트를 읽으면서 많은 부분을 공감했다. 도덕의 의무가 행복의 의무보다 상위에 있다는 것, 도덕적 강제성은 타인이나 사회로부터 요구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요구받는다는 것, 때문에 진정한 도덕은 내적인 강제성과 초월적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발견하며 기뻤다. 하지만 동시에 의무를 기피하는 오늘의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형태의 외적인 억압도 강하게 거부하는 현실, 외적(사회적)인 의무의 강제성뿐 아니라 내적인 의무의 강제성(양심의 소리)까지도 터부시하는 현실, 내적인 의무의 강제성을 외적인 억압이라며 혐오하는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처럼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최상의 가치로 추앙받는 사회 속에서 칸트의 ‘의무의 윤리학’은 설 자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외적인 억압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외적인 억압은 인간의 영혼과 삶을 짓누르는 치욕적인 폭력이다. 하지만 내적인 의무의 강제성은 외적인 억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지시나 교육이나 강요에 의해 내적인 도덕적 의무감을 느끼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요구하는 내적인 강제이지 외적인 강제가 절대 아니다. 진실로 그렇다. 자기가 자기에게 도덕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에게서만 발견되는 매우 고귀한 특성이다. 인간은 내적인 의무의 강제성에 스스로 굴복할 줄 알 때 진정한 인간이 된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시라. 내적인 의무의 강제성에 스스로 굴복한다는 것이 쉽고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매우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불편하고 거추장스럽다 해서 내팽개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의무의 윤리를 시대에 뒤떨어진 케케묵은 권위주의의 산물이라며 외면하고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영악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성을 사회적인 산물 정도로 평가 절하하는 엄청난 왜곡이다.
하여, 나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오늘 우리에게 칸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형태의 의무를 팽개친 현대인, 우리네 삶을 받쳐줄 최소한의 공통분모조차도 허물어버린 현대사회에 가장 요청되는 것이 칸트의 윤리학이라는 생각을 했다. 책의 말미에서 김상봉은 독백하듯 말한다. “참으로 선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추수에 대한 희망 없이 선의 씨앗을 뿌리는 법을, 희망 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보상에 기대 없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런 비극적 세계관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335쪽).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면서 고개를 많이 끄덕였다. 나에게는 언감생심이지만, 그래도 이런 삶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다움일 테니까 말이다.
'좋은 말씀 > -목회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실함에 대하여 (0) | 2016.11.15 |
---|---|
C.S.Lewis의 [기적] (0) | 2016.11.13 |
톨스토이의 가출과 죽음(2) (0) | 2016.11.11 |
톨스토이의 가출과 죽음(1) (0) | 2016.11.10 |
교회가 교회이기 위한 최고의 조건 (0) | 2016.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