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아침 9시쯤 도착해서 하선하고 입국 절차를 끝내기까지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가까운 이웃임에도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를 넘는 일은 꽤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2중 3중으로 확인하는 절차를 밟는데 좀 지나치다 싶었다. 정말이지 그 두 시간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긴긴 기다림 끝에 모든 절차를 마치고 대합실로 나오자 단동에서 선교 사역을 하고 있는 친구(이번 백두산 여행의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고, 여객터미널 광장에는 대형 버스가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버스에 올라탔다.
가이드의 첫 마디는 이번 여행이 ‘엉덩이 여행’이라 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었다. 오늘 묶을 곳이 장백시(조선족 자치구임)인데, 동항에서 장백시까지 9시간이 걸린다는 거였다. 지금부터 쉬지 않고 달려도 밤 9시쯤 도착한단다. 다들 기막혀했다. 한 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장장 16시간을 항해하며 힘들게 왔는데 또 9시간을 달려야 한다니 기가 질릴 밖에. 점심도 음식점에 들르면 시간이 늦어진다며 도시락을 준비했단다. 모든 것이 예상 밖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진행부에 맡긴 채 편하게 의자에 몸을 묻고는 창밖으로 보이는 중국의 이모저모를 살피기에 전념했다. 지형이나 자연환경, 창밖 풍경이 한국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집의 구조가 빨강 기와지붕에 일자형 일색이어서 집인지 창고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단순한 것이 좀 다를 뿐 한국의 시골 풍경과 비슷했다. 하여, 때로는 중국이 아니라 한국을 달리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버스는 국도를 달리다가 왕복 4차선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깨끗하게 포장된 고속도로의 곳곳을 보니 한국의 고속도로를 벤치마킹한 것이 분명해보였다. 하지만 마무리가 거칠었고, 자재 또한 한국보다 질적으로 떨어졌다. 가이드하는 친구가 중국이 영어로 China인데 왜 China인지 아느냐고 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여러 가지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China라고 했다. 다들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그럴듯하게 조형하는 한국인의 재치, 감추어진 진실을 교묘하게 꼬집는 말재간은 아마 세계 제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달리는 고속도로는 왕복 4차선이었음에도 8차선인 한국의 고속도로와 달리 차가 없었다. 어쩌다가 한 대씩 달리는 게 고작이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첫 번째 휴게소에 들렀다. 승용차 한 대가 이물질처럼 서있었다. 항상 북적이던 우리나라의 휴게소와 너무 달라 생경했다. 음식을 파는 곳은 아예 없고, 여자 점원 3명이서 일하는 가게만 한 군데 있었는데 휴게소 내부 전체가 한국과는 수준 차이가 났다. 우리는 그곳에서 그다지 훌륭하지 않은 도시락을 까먹고는 서둘러 차에 올랐다.
1시간쯤 달렸을까? 누군가가 용변이 급하다며 휴게소에 들르기를 청했다. 다행히도 30분쯤 가자 휴게소가 보였다. 때마침 내 몸에서도 용변기가 느껴졌다. 나는 기회다 싶어 화장지를 총무에게 구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힘을 써가며 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밖이 조용해지는 거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왁자지껄 이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였다. 나는 속으로 ‘다들 작은 일을 보고 나갔구나’ 생각했다. 동시에 ‘나를 놓고 떠나는 건 아니겠지?’라는 약간 불안한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여행 실무를 맡은 총무에게 화장지를 빌리기도 했고, 많은 일행(총 13명이었음)이 아니었기에 그럴 리가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조금은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약간 서둘러 일을 끝내고 나왔다. 그런데 아뿔싸~~ 손을 씻고 밖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버스를 찾았다. 버스도 보이지 않았다. 아찔했다. 멍했다. 저 앞을 바라보니 버스가 이미 휴게소 끝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소리쳐도 들리지 않을 게 뻔했다. 우리보다 앞서 정차한 차가 한 대 있었는데 그 차마저도 버스 뒤꽁무니를 따르고 있었다. 난감했다. 본능적으로 전화를 찾았다. 없었다. 막막했다. 그래도 전화를 해야겠기에 휴게소 안으로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전화가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그런데 들어가려 하니 모든 곳이 굳게 닫혀 있었다. 화장실 외에는 모든 시설이 잠겨있었다. 넓은 휴게소 광장에 움직이는 건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텅 빈 고속도로 휴게소에 나 혼자였지만 불안하거나 무섭진 않았다. 곧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일행이 많지 않으니 이내 곧 내가 없는 걸 확인하고는 돌아오리라 믿었으니까. 굳게 믿고는 돌아올 때까지 앉아 쉴 곳을 찾았다. 오후 2시가 넘은 시각인지라 따가운 햇볕을 피해 쉴 곳이 필요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마땅히 쉴 곳이 없었다. 휴게소 건물 뒤편으로도 가보니 허름하게 차린 일꾼 몇이 쉬고 있을 뿐 쉴 만한 그늘은 없었다. 다행히 휴게소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한국처럼 주유소가 있었다. 대형 트럭도 있었다. 순간 눈이 확 띄었다. 영업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전화를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주유소도 폐쇄되어 있었다. 대형 트럭에도 사람이 없었다. 조금 실망이 됐다. 그러나 낙망하진 않았다. 돌아올 거라는 기대를 품고 짐짓 여유를 부리며 그늘에 앉았다. 주유기가 있는 받침대 턱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버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없는 것을 빨리 발견하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또 나를 달래면서.
애써 걱정을 떨치며 몸은 쉬고 있었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복잡한 생각들이 오고갔다. 마음으로 돌아올 만한 시간을 계산하면서 짐짓 여유 있는 모습으로 쉬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조금씩 초조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마음과 눈길이 건너편 고속도로에 쏠리기 시작했다. 내가 탄 버스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오면서 내가 휴게소에 있는지를 확인할 것이 분명한데, 그때 주유소에서 쉬고 있는 나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건너편 고속도로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버스가 보이면 바로 뛰어 나가 손짓할 만반의 준비를 한 채로. 그런데 지나가는 차들을 아무리 주시해도 내가 탄 버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다른 차들만 질주했다. 점점 야속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깊어갔다. 그럴 즈음 어디선가 두 사람이 나타났다.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나는 앉은 채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말았다. 그들은 다가오더니 옆에 있던 트럭에 올라탔다. 잠시 후 그들이 휴대 전화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 트럭 기사에게 다가갔다. 점심으로 빵을 먹고 있었다. 나는 몸짓 손짓을 해가며 한국에서 온 관광객으로 장백산에 가는데 일행을 놓쳐 혼자 떨어졌다고 말하면서 핸드폰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기사는 엉뚱하게도 빵을 줄 거냐고 응대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아니라고 손짓을 하고는 다시 주저앉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4-50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버스가 돌아오지 않자 점점 부정적인 생각들이 복잡하게 오갔다. 이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점심을 먹고 두 시가 넘은 시간이라 다들 잠에 빠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두 번째 의자에 나와 함께 앉았던 친구가 잠을 자려고 뒤로 자리를 옮겼을 거란 생각까지도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옆에 없는 나를 분명히 찾았을 텐데 여태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그 친구가 뒷자리로 옮겼을 것이 분명하다는 판단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찔했다. 이렇게 장백까지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손 놓고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적극적으로 해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유일하게 부탁할 수 있는 트럭 기사에게 또다시 갔다. 전화 좀 빌릴 수 없겠느냐고 사정을 했다. 기사의 반응은 무표정이었다. 내 말의 뜻을 알아들은 것 같기는 한데 표정이 냉랭했다. 또다시 포기한 채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기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내 곁으로 왔다. 본격적인 몸짓 대화가 시작됐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뜻이 통하지 않았다. 그도 답답했던지 시멘트 바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한국’과 ‘중국’을 썼다. 나는 ‘한국’이라고 가리켰다. 그가 ‘장백산’이라 썼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패스포드와 돈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했다. 다 버스에 있다고 했다. 그가 땅에 100번을 쓰면서 전화 시늉을 했다. 순간 경찰이 생각났다. 그래서 내가 ‘공안(公安)’이라 쓰고, 나를 거기에 데려다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렇게 하겠다며 함께 가자는 몸짓을 했다.
내가 공안을 찾은 것은 전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공안에 가면 안전하게 아내에게 전화를 할 수 있을 것이고, 내 E-Mail에 들어있는 가이드의 전화번호를 확인하기만 하면 가이드와 연락이 닿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공안을 찾은 거였다. 기사는 대략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쯤 되어 보였다. 키가 나만했고 인상도 좋아보였다. 그는 여유 있게 앞서 갔다. 좀 빠른 걸음으로 가면 좋겠는데 도무지 빨리 걷지 않았다. 보통의 걸음으로 휴게소 뒤편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갔다. 적어도 15분은 걸은 것 같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 길을 따라 이어졌는데 무슨 인민위원회라 쓰인 작은 건물이 나오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기라고 했다. 60대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와 한참을 얘기하더니 그가 공안 사무실이라 쓰인 방으로 안내했다. 따라 들어가니 작은 사무실이었다. 책상은 놓여 있는데 사람이 없었다. 둘러보니 벽에 공안 두 사람의 사진과 전화번호가 붙어 있었다. 그걸 보고 기사가 전화를 했다. 한참을 길게 통화하더니 공안이 온다고 했다. 그러나 10여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된 거냐는 시늉을 하자 땅에 5㎞라고 썼다. 공안이 5㎞ 떨어진 곳에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한참을 더 기다렸다.
그래도 오지 않았다. 그 사이 마음에는 커다란 갈등이 있었다. 휴게소로 돌아가야 하느냐 공안을 기다려야 하느냐로 적잖은 갈등을 했다. 내가 휴게소를 떠난 사이에 버스가 오면 서로 길이 엇갈리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목표했던 백두산을 오르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다시 맨 처음 자리인 휴게소로 돌아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장백까지 가버리면 나는 인적 없는 휴게소에서 어떻게 밤을 보낼 것이며, 또 장백에 도착해서 내가 없는 걸 확인한다 해도 그 멀리서 밤새 나를 찾아 돌아오는 것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둘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러다가 마냥 손 놓고 불확실한 가능성을 기다리기보다는 공안을 통해 전화를 하는 것이 더 확실한 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휴게소로 돌아가지 않고 공안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사이 버스가 왔으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가 한 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마음의 결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번민하는 것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여유 있게 잡아도 5㎞면 충분히 올 시간이 지났는데 공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재차 왜 이리 안 오느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기사는 태양을 가리키며 시간이 충분하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장백까지 갈 수 있게 할 테니 걱정 말라는 투였다. 의사소통의 한계를 절감하며 조금 더 기다리니 사무실 벽에 붙어 있던 사진과 똑같이 생긴 공안 두 사람이 차를 몰고 나타났다. 기사와 나이 든 공안이 한참 이야기를 하더니 공안은 기사의 면허증을 복사하고 그의 전화번호까지 적었다. 그리고 나를 차에 타라 했다. 나는 장백으로 가는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나는 공안의 차에 타기 전에 기사에게 손을 내밀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기사도 웃으며 잘 가라고 손짓했다. 그러면서 장백에 도착하면 자기에게 전화를 달라고 했다. 비록 몸짓 언어였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하고는 경찰차에 올라탔다.
나는 차에서 또 물었다. 지금 장백으로 가는 거냐고. 경찰은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장백까지는 적어도 7시간 거리일 텐데 그곳까지 데려다 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됐다. 그러나 더 이상의 소통은 불가능하기에 의아스러움을 품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10여분은 달렸을 것이다. 갑자기 차가 멈추었다. 밖으로 나와 둘러보니 고속도로 출구였다. 나는 즉각 눈치를 채고, 여기서 장백행 버스를 잡아주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공안도 나와 함께 장백행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면서 공안에게 전화를 빌렸다. 그러나 한국의 나라 번호를 모르니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자세한 것을 물을 수도 없고 하여 포기한 채 장백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공안의 전화벨이 울렸다. 한참 통화를 하는 걸 들으면서 엉뚱하게도 ‘나와 관련된 전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전화를 나에게 건네주면서 받아보라고 했다. 순간 마음이 탁 놓였다. 뛸 듯이 기뻤다. 전화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단동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는 친구의 목소리였다. 친구의 일성이 “형님 어디 있는 줄 알았으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지금 그리로 가는 중입니다.”라고 했다. 모든 번민이 사라졌다. 모든 의혹과 예측 불가능성이 사라졌다. 기적 같았다. 감사했다.
잠시 후 중국인 버스 기사와 친구가 택시를 타고 나타났다. 너무 반가워했다.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는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나와 친구는 중국 공안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택시에 올라탔다. 타자마자 친구가 내 손을 잡으며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자기가 인원 체크를 했어야 하는데 하지 못했다며. 나는 무슨 말이냐며 내가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한참 달리고 있는데 좀 전의 중국 공안이 차를 잡았다. 어떤 일인가 의아했다. 그런데 내 모자를 건네주는 거였다. 나는 그때까지도 모자를 놓고 내린 걸 몰랐는데 뒷자리에 있는 모자를 확인한 것도 놀라웠지만 택시를 쫓아와 모자를 건넨 것은 더 놀라웠다. 중국 공안의 친절함에 나는 감동했다. 10년 동안 중국에 사는 친구도 이렇게 친절한 공안은 처음이라 했다.
택시는 한참을 달려 일행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친구들은 통화라는 도시의 국군 병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리는 나를 보더니 모두가 함성을 질렀다. 길 잃은 탕자가 돌아왔다며 난리였다. 비록 2시간 30분 만의 해후였지만 정말 기적 같은 은총을 맛본 감동적인 해후를 했다.
<사진 자료>
문제의 휴게소 전경 - 휴게소는 엄청 크지만 텅 비어 있음
왼쪽의 하얀 차가 우리보다 앞서 도착한 유일한 차였음
문제의 화장실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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