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론

목회론(10)현 시대의 악, 그리고 우리의 목표와 필요한 것들과 격려

새벽지기1 2016. 7. 6. 10:56

현 시대의 악, 그리고 우리의 목표와 필요한 것들과 격려

 

현 시대의 악

 

시대마다 언제나 악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가끔씩만 격렬하게 끓어오르는 간헐적인 열병들도 있는 법입니다. 어떤 악들은 이십 년 전에는 잘 몰랐는데 지금 이 시기에 와서 널리 퍼져 있기도 합니다. 진리는 하나요 모든 시대마다 동일합니다만, 거짓은 항상 그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고, 마치 의복의 유행처럼 왔다가는 사라집니다. 지금은 또 다른 형태의 토론이 등장해 있는데, 성경 그 자체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최종적인 권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현대 사상이 말씀하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과연 속죄라는 것이 있기는 한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대리 속죄를 부인하는 시대가 우리에게 왔고, 우리 주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죄를 씻는 도리에 대해서 모욕적인 언사를 일삼는 시절이 왔습니다. 언젠가 어느 설교자는 말하기를, 죄인이 임종시에 진정으로 회개하고 믿는다 해도 저 세상에서 잠시 동안 고난을 당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도리가 일종의 연옥(煉獄)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다른 견해가 아니라, 믿음을 아예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악이 도처에 비일비재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상대하여 싸우는 그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의 생명을 말살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잘못 전하고 악하게 그것을 왜곡시킴으로써 진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한 가지 교리를 마치 우리가 그것만을 믿는 것처럼, 아니면 그것이 우리의 주된 가르침인 것처럼, 고의로 매도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저는 이 논쟁에서 영원 형벌 교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상’을 주장하는 자들은 그것을 항상 거론하면서, 틀린 쪽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입니다. “다가올 진노”에 대한 공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우리의 주된 가르침이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그것을 끔찍하게 경고하는 것이 정통 교리의 특이한 점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또 한 가지 큰 악은 진정 선한 사람들 중에서도 진리를 위한 결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있는 우리 형제들 중에서도, 오류와 분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태도가 서 있지 못한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서 목회하는 한 흑인 설교자는, 자기의 양 떼들 중에는 닭을 훔치는 일을 죄라고 설교하는 일을 조심스럽게 삼갔다고 말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형제들 간의 교제가 경색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그 후원자들 중에 주류업에 종사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독주(毒酒)의 문제를 아주 부드럽게 처리해 버립니다. 불쾌한 진리를 이렇게 억누르는 것이 과연 큰 문제가 아닙니까? 주변에 만연되어 있는 죄들에 대해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들이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모습”이 됩니다만, 그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고전9:22)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그들이 교회의 수입을 불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너무 많이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의 입장이 과연 경건보다 더욱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 어떠한 처지에서도 진리와 그리스도께 철저하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 과연 충분하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가난해져도 좋다. 조롱을 당해도 좋다. 모욕을 당해도 좋다. 하지만 내 주님께 거짓을 행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거룩과 죄, 진리와 오류에 관하여 타협의 자세가 너무도 깊이 만연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 타협의 자세는 하나님의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명확한 결단을 드러내는 것이 가장 지혜 있는 처사입니다.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단호하게 지켜 나가야 합니다. 바람과 파도가 있다고 해서 나아가는 방향을 바꾸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진리의 수위를 마구 낮추어 버립니다. “이 의무는 너무 가혹하다. 그러니 다소 완화시켜야겠다. 이 교리는 너무 혹독하니 좀 더 부드러운 옷을 입히는 것이 좋겠다”는 식으로 처신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희생시키더라도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이런 자세가 바로 현 시대의 스타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옛 신학에서 죄나 인간의 전적 타락 같은 교리를 강하게 말씀한다면, 좀 더 부드러운 새로운 신학을 통해서 그것을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형벌이 너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을 가볍게 다루고 대충대충 넘어가라! 사람들을 겁주어서 회심자들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 “낮추어 주라”. 하지만 그런 부드러운 말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여러분 스스로 입장을 분명하게 정리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스스로 견고하게 서 있는 사람들처럼 미끄러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의 또 한 가지 큰 악은 도무지 만족을 모를 정도로 오락을 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오락을 공급해 주는 것을 교회의 일로 삼았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신 것이 대중들에게 다블로 비방(tableaux vivants), 즉 살아 있는 밀랍 인형들을 제시하기 위함이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한 비국교도 교회는 사교적인 모임과 곁들이는 특별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모인 회중들이 악단의 연주에 맞추어 흥겹게 노는데, 그런 유치한 게임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여러분이 이해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박스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대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설교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면 그 다음 번에는 우리 교회당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복음의 사역자들이 그런 허튼 짓을 일삼기를 대체 어느 때까지 하려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것과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것은 놀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과 영원한 복락을 위해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죽음과 심판과 영원의 그 처절한 위엄을 놓고서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어리석은 짓들과 헛된 짓들을 멀리하십시오.


우리의 또 한 가지 어려움은 여러 교회들에 강렬한 경건이 결핍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정말 경건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위 신앙인이라 고백하는 자들의 신앙이 얼마나 얄팍한지를 깨닫지 못하십니까? 기도회에 전혀 참석하지 않는 교회원들이 많지 않습니까? 부유층의 사람들은 저녁 식사 시간이 기도회 시간과 겹치기 때문에 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또 바빠서 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변명하는 사람들도 음악회에는 아주 잘 참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공적인 만찬회와 가무회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식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 중에서도 기도회 같은 케케묵은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자들을 많지 않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탈선의 확실한 징후인데, 이것을 비일비재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들이 목회자들에게 마음 아픈 일들을 많이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오히려 목회자들 자신이 너무나도 타락해 있어서 거의 아무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들에 대해서, 많은 교인들은 그 설교자의 개인적인 경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재능이요 영리함입니다. 사람이 설교하는 내용은 오늘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거나 엘리트들을 즐겁게 해 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진리를 전하든 오류를 전하든, 유창하게 말을 하여 연설자로서 명성을 유지하기만 하면 칭송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원들을 받아들이는 일이 크게 해이해졌고, 그리하여 온갖 악들을 편안하게 누리는 “혼합된 무리”들로 인하여 교회의 질이 떨어지고 하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 시대의 가슴아픈 악을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그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외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하여 결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와 비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을 얻기가 힘듭니다. 저는 과거에 우리가 복음을 올바로 전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들으러 몰려들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그런 믿음을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는 몇몇 형제들 중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중들 사이에 완악해져 가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우리 모두 느끼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 곳에 있는 교회가 온통 불신앙으로 가득 차 있으니, 세상이 무관심한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현재 강하게 일고 있는 악의 광풍이 곧 가실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교회라는 좋은 배가 역풍을 만나 흔들거리고 있어서 주께서 오셔서 바람과 파도를 향하여 “고요하고 잔잔하라”고 말씀하셔야 할 지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슬픔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시대가 이렇게 악하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한 가지 영구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한 가지 영구적인 목표

 

계절이 어느 때든 간에, 농부에게는 경작할 땅이 있습니다. 여름철과 겨울철에 하는 일이 서로 다르지만, 그의 목표는 언제나 같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이미 주님께 손을 높이 들었으니 다시 돌아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음 거룩한 사역에 들어설 때에 가졌던 그 한 가지 목적을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쟁기를 버리고 밭에서 돌아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 여러분의 평생의 사역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지향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우리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죄인들을 회심시키는 것도, 성도들을 강건케 하는 것도 우리의 최고의 임무는 아닙니다. 우리의 최고의 임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이것이야말로 모든 교리의 질을 시험할 수 있는 일종의 측정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면 순전한 복음이 아니요, 따라서 우리나 우리의 청중들에게나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사정이 어떻든 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그 한 가지 목표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영혼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어떠한 형편이 되든, 우리는 예수님을 위하여 사람들을 낚아 올려야 합니다. 회개와 믿음을 강조해야 하고, 거듭남과 죄를 혐오하는 것과 예수님을 신뢰하는 일을 항상 교인들 앞에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목적을 위해서 출생한 사람들이며, 이 목표를 위해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니, 마땅히 영혼을 구원하는 위대한 진리들을 증거하며, 이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에게는 교회를 강건하게 세우고자 하는 강렬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목적을 위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언제나 동일한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발전이 있으면 안 됩니까? 아니오,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계시된 진리의 노선 내에서만 나아가야 하고, 확정된 원리들에서 이탈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일관성 있는 목회 사역이, 여러 해 동안 동일한 진리를 전하는 일을 계속하는 그런 사역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며 교인들에게 결과를 산출하는 것입니다.

 

든든한 기초 위에 벽돌을 차근차근 쌓아올릴 때에 위대한 건물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가르침이 이리저리 바뀐다면 어떻게 그런 결과가 생기겠습니까? “항상 배우나 끝에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딤후3:7)자들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혜로운 건축자로서 진정으로 교회를 세우고자 한다면, 맨 처음 기초에 대해서부터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그 기초 위에 건물 전체를 세워갈 것이니 말입니다. 저에 관해서 말하자면, 제가 맨 처음에 가르쳤던 것들을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급하게 필요한 것들

 

우리가 거룩한 부르심을 성공적으로 추구하려면, 우리는 더 나은 사람들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시대가 더 열악해질수록, 하나님께 더 많은 은혜를 구해야 하고, 그 어려움들을 더 잘 대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께서는 “더 풍성히”베푸실 수가 있습니다(참조, 요10:10). 여러분, 더 거룩해지고 더 은혜가 충만해져서 우리의 일에 더욱 합당하게 되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 우리의 손으로 주님의 일을 준비하십시다. 교만하게 손을 펴지도 말고, 절망에 젖어 손을 맥없이 내리지도 말고, 거룩한 간구와 온전한 헌신으로 우리의 손을 높이 들어야겠습니다.

 

그 다음 지금 현 시대에 필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열정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실질적으로, 더욱 의심의 여지 없이 그를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들이 우리에게 더욱더 절실하게 다가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바를 믿어야 하겠고, 오직 믿는 바를 말해야겠습니다. 사람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복음적인 내용과 은혜에 관한 거룩한 내용들을 말하는데도, 정작 거기에 아무런 뜻도 없다는 것은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강단들에도 그런 말장난꾼들이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 앞에다 그림자를 드리우지 맙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명확한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적인 교리들을 믿기 때문에 그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복음적인 신자들을 기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두려워할 일입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교리들이 우리의 목숨만큼이나 우리에게 값진 것이어야 하고, 우리의 피와 살만큼이나 진짜여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이 진실임을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는 진짜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영혼을 향한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사랑이 있기 전에는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다가올 진노에서 회중들을 구원하려면, 그들이 우리의 형제들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진정 동정해야 하고, 그들에 대해 걱정이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열정과 연민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보다 철저한 자기 희생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아는 탁월한 지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희생은 날마다 필요합니다. 희생이 있어야 우리의 섬김이 풍성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땅의 목회 사역에서 편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후에 그 일에 대해서 정산할 때가 오면 정말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을 위하여 열심을 다하여 삽시다!

 

그러나 육신적 안락 외에도,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대의(大義)가 필요로 한다면, 우리의 이름도, 우리의 명성도, 우리의 친구 관계도, 모두 남김없이 다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부인하느니 차라리, 우리가 받을 모든 존경과 모든 명예와 사회적 명성이라는 누더기 하나하나까지도 다 버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 어떠한 손해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이미 그리스도의 것이니, 우리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나의 주님, 주님과 주님의 진리에 충성을 다할 수 있다면, 끝까지 “만물의 찌끼”가 되어도 나는 주를 위해 즐거워하리이다.

 

이런 시기에 아주 적절한 한 가지 작은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교인들과 더불어 근본적인 진리들을 아주 차근차근 살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첫째 가는 근본 진리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그들 모두가, 복음을 이해한다는 것을 당연시한다면, 그것은 교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근본이 되는 진리들을 계속 반복해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어떤 강단에서는 가장 단순한 교리들도 굉장히 새로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교인들과 가장 초보적인 진리들을 공부하십시오. 믿음의 첫째 가는 원리들을 알게 하십시오. 교인들이 그것을 들으며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복을 받을 것이요, 많은 이들이 정말 기뻐할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주 근본적인 교리들을 반복해서 가르치십시오.

 

구식으로 농사를 짓던 시절에는, 농부들이 밭이랑에 씨앗을 세 알씩 던져 놓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하나는 벌레를 위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새를 위한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자라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씨앗을 넉넉히 뿌립시다. 악한 세력에게 벌레와 새들과 가시나무들이 풍부하게 많으니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빛을 비추기 위해 나가게 내버려두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씨를 뿌리는 자들이니 반드시 씨를 뿌리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씨 뿌리는 일을 계속 반복하십시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3:1).

 

그 다음으로, 설교를 듣는 자들이 즉각적으로 구원 얻기를 위하여 분명하게 힘쓰십시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마다 언제나 교인들에게 목표(조준)가 맞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확실한 인물들을 공격의 목표로 삼는 것은 아주 지혜로운 일입니다. 매 설교마다 적용부분을 살펴야 합니다. 교인들에게 진리를 적용시킬 때에 매우 구체적이고도 명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의사가 어린아이들에게 쓴 약을 처방하여 세 시간마다 한 번씩 먹으라고 하고는 그냥 그 아이들 스스로 먹도록 내버려두면, 그대로 약을 먹는 아이들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일반적인 언어로만 제시하고 그쳐서는 안 됩니다. 개개인에게 필요한 부분을 파악하여 개개인에게 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구원받기를, 그것도 즉시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이 목표를 향하여 우리의 온 능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 것입니다.

 

온 힘을 다하여 거룩의 실천을 가르칩시다. 구원의 가시적인 면이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에 대한 설교가 아주 극단적으로 밀어붙여지는 것은 결코 나쁜 징표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광신주의는 끔찍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의 뿌리가 되는 진지함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거룩을 최고로 추구합시다. 은혜의 교리들과 더불어 지극히 순결한 윤리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선행이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선행이 구원의 필연적인 열매라는 진리에 대해서도 똑같이 분명히 합시다. 신자들이 거룩하지 않다면 우리의 교회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거룩이야말로 실천적인 정통이며, 따라서 그것이 교리적 정통과 더불어 반드시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높은 수준의 도덕성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생겨난 거룩한 도덕성이 필요하고, 바로 그것이 거룩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권면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에 회원을 받아들이는 문제에서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회원들은 교회의 수준을 저하시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도 유다는 들어오고야 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다를 초청해 들이지는 맙시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자가 우리와 편안히 지내도록 그 일을 쉽게 만들어 놓지는 맙시다. 세상을 교회와 뒤섞는 일은 범죄 행위입니다. 그 일은 끔찍스러운 저주를 초래하게 되며, 경건에 대해서 큰 돌풍과 더러운 곰팡이의 역할을 합니다. 모든 순전한 심령들에게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읍시다. 하지만 마음이 세상에 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문을 닫아걸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경건의 능력은 전혀 모르면서 경건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의 영혼을 값있게 여긴다면, 교회의 출입구를 잘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도, 여러분의 영적 생활에 해를 미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과는 전적으로 관계를 끊으십시오. 저는 술주정뱅이나 도둑과도 어울리지 않지만, 믿음을 부인한 자와도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도덕적인 모습은 물론 저의 영적인 모습도 똑같이 열심히 보호할 것입니다. 충성된 신하는 반역자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는 결코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한 경건한 목사는 어느 설교자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 강단에는 절대로 저런 사람을 세우지 않을 것이오, 나는 나의 침실만큼이나 나의 강단을 소중히 여긴다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과 어울림으로써 그 진리를 타협시키는 일이 없도록 우리 스스로 경계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들끼리 서로 더욱 긴밀하게 뭉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서로서로, 또한 주 안에서 동일한 믿음을 지닌 모든 사람들을 돕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는 교단적인 차이는 가라앉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믿기로, 지금 눈으로 볼 수 있는 큰 구분은 바로 우리 주님의 대리적 희생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적 교리에 있습니다. 여하튼 함께 연합하여 우리의 힘을 모으도록 합시다.

 

격려의 말씀

 

이 시대가 악하지만, 악한 날들 뒤에 좋은 날들이 오는 법입니다. 위더스푼(Witherspoon)이 쓴 위로의 말씀 을 한 구절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는 불가능이 없다. 영국의 이 지역에서도, 진리가 길바닥에 무너져 내렸고 정의가 들어갈 수 없었던 처절한 배도(背道)의 시기 다음에 곧바로 지극히 놀라운 신앙의 부흥의 시기가 이어졌다. 1638년 직전에 그런 배도의 시기가 있었다. 교리적 부패와, 실천의 이완 상태, 그리고 정치적인 맹종이 스코틀랜드 교회 전체에 만연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진리가 과거에 그랬던 것보다 더욱 순결하며 더욱 위엄있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결코 좌절에 빠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마지막에 결국 승리하게 될 그 대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신앙이 무너져 내린 것 같으나 그 폐허에서 그것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현재 짓눌려진 상태에 있다 해도 오히려 그런 현실로 인해서 우리는 기도에 힘쓰게 되며, 또한 곧바로 부흥이 있으리라는 소망으로 격려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끝으로, 최대한 기도를 사용하십시오. 기도는 모든 것을 이기는 무기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과 연결시켜 줍니다. 기도는 우리의 최고 의지(依支)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