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론

목회론(7) '약한 데서 강함'

새벽지기1 2016. 7. 2. 09:31


약한 데서 강함


저는 오늘 말씀의 주제를 고린도후서 12:10의 바울의 말씀에서 취하고자 합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우선 연약하면서도 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삼손! 그는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고 자기의 눈을 잃은 후에 처하였던 그런 연약함의 상태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영웅이 저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종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수천 명을 죽이고 그 시체를 산더미처럼 쌓았던 사람도 얼마든지 그런 연약한 처지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들릴라가 우리를 파멸로 이끌게 하지 않으려면, 죄로 이어지는 모든 연약함을 대적하여 싸워야 합니다. 특히 거룩한 헌신의 실패로 인하여 연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헌신이 온전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강한 법입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으면, 우리의 강함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게 되고, 우리에게 연약함이 생겨서 결국 불경건한 자들이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사14:10)라고 하며 빈정거리게 되는 치욕을 당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도 연약해져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도 연약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느슨해지자, 사탄은 밧세바를 통해서 그를 이겼습니다. 베드로는 멀리서 따라갔고, 곧바로 그의 주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야말로 우리의 강함의 오른팔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부러지고 말면, 우리는 물처럼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이 살려고 시도하는 만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망치는 것이 됩니다. 거룩한 교제의 잔칫집을 방문하기를 보류한 사람은 영양실조에 빠질 것이고, 결국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사24:16)라고 외치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지 않는 자는 곧 발에 대해서는 므비보셋이 될 것이요, 눈에 대해서는 바디매오가 될 것입니다. 마음이 허약해지고 무릎이 떨릴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약해지면 우리의 전부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사람이 강할 수 있다면, 그런 위험한 강함은 교제에서 벗어난 사람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에 힘입어야만 강건해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깨어진 교제는 곧 깨어진 강함을 낳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사랑에서 연약해지는 일이 절대로 없기를 바랍니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가슴이 소유할 수 있는 모든 능력 가운데 가장 큰 것입니다. 사랑을 다른 은혜들과 비교해서 다른 것들을 폄하시켜서는 물론 안 됩니다. 그러나 모든 적극적인 덕목들 가운데 사랑이 가장 힘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음도 사랑으로 역사하니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이 놀라운 무기를 취하기 전에는 믿음도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를 못하는 법입니다. 사랑을 취하고서야 비로소 그들을 사랑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 열정적인 사랑이, 순결한 불꽃이 되어 타올라 뜨거운 열기를 뿜으며 우리를 불태우는 그런 사랑이 있어야겠습니다! 이 거룩한 불길이 우리 존재의 중심에서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을 열렬하게 사랑하고, 또한 그를 위하여 그 백성들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 점에서 강해지시기 바랍니다. 사랑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말씀을 듣는 교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또 여러분이 선포할 책임을 맡은 그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교회는 마치 기수(旗手)가 기진맥진해지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은 사라지고, 그저 격렬한 감정만 남고, 싸움을 할 힘만 남고, 사람들을 흐트러뜨릴 힘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마치 파에톤(Phaeto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의 아들로서 아버지 마차를 잘못 몰아 제우스의 번갯불에 맞아 죽음)처럼, 태양의 마차를 몰려 하다가 곧바로 패망에 이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적 생명의 모든 연약함에서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오, 정말이지 그것을 얼마나 사모하는지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로서 우리들에게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벗고서 강건한 청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그보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충만히 장성한 사람들이, 곧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한”(엡6:10) 사람들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이 방면에서 약하다면, 그 어디서도 강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들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풀고자 하시는 그 모든 영적 강건함을 열렬히 사모해야 합니다.


저는 매우 연약했으나 주님께 쓰임을 받은 설교자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조명하심이 없이는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다고 느끼며, 그리하여 그 조명하심을 얻기 위하여 빛들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도록 도움을 받고자 두렵고 떨림으로 그에게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연약한 분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들이 하나님의 뜻에 혹시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했고, 자기들의 뜻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둡게 하지 않을까 하여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 강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제 자신의 설교도 제게는 극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강단을 올라갈 때마다 두려움이 저를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을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는 쓰라림이 저를 압도할 때도 많았습니다. 심지어 정신적인 감정 상태로 인하여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는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약함이 제게는 큰 교육이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저는 존경하는 저의 할아버지께 올리는 편지 속에서, 설교 전에 제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과 끔찍스러운 두려움 같은 것 때문에 제가 진짜로 아파서 눕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제게 보낸 회답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설교를 해온 지 6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두려움과 떨림을 느끼고 있단다. 그런 것에 그대로 만족하거라. 네게서 그런 감정이 사라지면 너의 강한 힘도 사라진 것이니 말이다”. 설교할 때에 그런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교인들도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 스스로 연약하다는 느낌에 압도되는 것을 하나의 악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목사에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한 쪽에 한 초라한 형제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머리를 쥐어짜고, 무릎을 꿇고 씨름하며, 마음속에서 피를 흘려왔습니다. 그는 설교를 하다가 중간에 말문이 막히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있고,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힘써 행합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은 교인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것이요, 또한 하나님께서 회심자들을 그에게 베푸실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 너무도 연약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을 높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약한 설교자가 강자입니다.


여러분, 건강할 때에 건강을 잘 보존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건강을 잃더라도 우리는 온전히 기쁨으로 여기고 바울과 더불어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 외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형태 저런 형태로 우리는 시련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지고 갈 십자가가 없는 설교자라면, 짐을 지지 않은 선지자라면, 그 사람은 무익한 종이요 오히려 교회에 짐이 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염려나 근심이 전혀 없는 목사가 된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그런 분들이 없으리라 믿습니다. 이 자리에는 오히려 목사로서 근심거리에 짓눌려 있고, 안타까운 일들에 에워싸여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가 큰 것 때문에, 아니 그보다는 교회가 작은 것 때문에 날마다 괴로움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괴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해달라고 구하지 마십시오.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내 양 떼들에 대해서 별로 염려할 것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목자가 있다면, 그 목자는 결코 흠모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그런 목자는 아주 차갑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난 겨울 양 몇 마리가 죽었지만, 그런 일이야 늘 다반사로 있는 일이니 염려할 것 없다. 몇몇 양들이 굶주려서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목초가 없어서 그런 것이니 난들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목자는 정말 다음 번에 이리에게 먹혀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참된 목자라면 당연히 야곱과 함께,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창31:40)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목자의 경우는 자기 자신이 쉬는 일은 불규칙하기 이를 데 없고 오로지 양들을 위하여 들이는 수고와 염려에 겨를이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목사로서 매우 연약해지고, 여러분의 목회 임무가 여러분을 완전히 짓누르게 되면, 그런 연약함에 대해서 투정부리지 마십시오. 바로 그때가 여러분이 충만하게 강한 상태에 있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로서 강하다고 생각하며, “목사가 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하면, 그때야말로 여러분이 연약하다는 것을 깊이 깨우쳐야 할 때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형제가 스스로 강해져서 자기 자신의 거룩함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은 반드시 허약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자기들의 은혜와 이룬 업적들에 대해 자랑하고 있었는데, 오로지 한 형제만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한 사람이 그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자네에게는 거룩함이 없는가?” 그러자 그는 대답하기를, “아니, 있네. 하지만 자랑할 거룩함은 하나도 없다네”라고 대답했답니다.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거룩함은 모두 다 소유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완전을 향해서 힘써서 전진해야겠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고요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강할 그때에 우리가 약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완전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그때에 바로 교만이라는 악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로울랜드 힐(Rowland Hill: 1744-1833)의 모범을 좇아서 본문을 빙 둘러왔습니다. 이제는 본문을 본격적으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Ⅰ. 첫째로, 침체의 체험이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약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함을 특별히 의식하게 되는 그런 시기가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는 그가 삼층천에 올라가 환상을 볼 정도로 너무도 기이한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너무 자만하게 될 경향이 그의 속에 있었으므로 그의 육체 속에 조그만 가시를 있게 해서 따끔따금 찌르게 하셨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는 아주 하찮은 것으로 정말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물리쳐 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씩이나 간구를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런 처지를 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처럼 가시가 찌르는 고통은 우리 모두가 다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은 다른 방식으로 자기들의 연약함을 느끼게 됩니다. 곧, 책임에 대한 중압감이 그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책임을 항상 느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느낌을 지나치게 몰아가지는 마십시오. 우리의 책임을 너무 깊이 느끼는 나머지 그 책임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고 우리를 그것의 종으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이제 다시 묻겠습니다. 우리 중에 과연 우리의 책임의 분량을 충실하게 느껴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분이 한 분이라도 계시다면, 저는 그분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했어야 할 만큼도, 할 수 있었던 만큼도 행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했어야 옳았을 만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앞으로 하게 될 만큼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기대되는 양(量)만큼은 다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질(質)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책무들을 철저하게 느끼게 되면, 그것들이 우리를 완전히 부수어 놓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약한 존재들이 됩니다. 하지만 이 연약함은 바로 강함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악성 때문에 목사로서 전혀 자질이 없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로 인하여 약함을 느끼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역시 강함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입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때로는 우리의 수고하는 영역이 특별히 어렵게 보이는 것 때문에 우리가 침체에 빠지고 연약해지기도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동료들 간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교제가 없이 완전히 홀로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고, 이 때문에 여러분에게 침체가 올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여러분 중에는 가난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기조차 힘든 분들도 많습니다. 자녀들의 구두가 다 해어졌는데도 사줄 돈이 없고, 아내의 옷이 다 닳아졌는데도 새 옷을 지어줄 방법이 도저히 없을 때에는, 목사의 마음이 속에서 깊이 가라앉는 것입니다.


게다가, 억울하게 험담을 듣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거짓말의 아비에게서 나온 추문이 여러분을 향해서 공격을 해올 수도 있고, 그것에 대해 여러분이 도저히 방어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작은 흠을 지우려 하다가 책장 하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을까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마음이 상처를 입습니다. 오, 이런 일이 생기면 사람이 얼마나 연약해지는지 모릅니다. 오 여러분, 이럴 때에 주 안에서 강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제가 전혀 고갈되는 일이 없고 언제나 어떤 주제든 새롭게 설교하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여러 권의 설교집을 출간했습니다. 그 책들이 늘어날수록 무언가 새로운 것을 설교한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음 설교는 어느 본문을 근거로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게 해 왔습니다. 설교를 위한 본문을 계속 찾을 수 없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강함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더욱더 약해지고 더 약해질 준비를 갖추고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감이 더욱더 약해지는 일을 여러분 스스로 준비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이 완전히 무(無)가 되기를 준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진행시키시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Ⅱ. 이제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라는 복된 체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복된 체험이 됩니까? 첫째로, 내가 연약할 때에는 반드시 구원과 도움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로 피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약할 때에 강한 것은 우리가 기도로 강함을 얻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의 연약함이 최고의 간구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져서 넘어지기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환도뼈가 부러지자, 간구하는 자가 승리했습니다. 기도할 때에, 여러분의 강함을 하나님께 아뢰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연약함을 아뢰십시오. 그러면 응답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게는 연약함과 고통보다 더 나은 아뢸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기진맥진하여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는 것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이 없습니다. 눈물과 한숨으로 기도에 깨어 있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도저히 기도할 수가 없다고 느끼면서도 시종일관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자기 영혼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약한 데서 얻는 강함 중에서 우리가 갖는 것이 좋은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을 의식하고 설교할 때에, 우리에게서 나가는 말들에 놀라운 힘이 더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닐 목사(Mr, Knill)가 병사들에게 책자를 배포하러 나갔는데, 한 병사가 책자를 가지고 다시는 오지 못하게 닐 목사를 저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닐 목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사람을 구원해 주시기를 자신이 얼마나 바라는지를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그 병사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나누어주는 책자나 목사님이 말씀한 내용은 한 번도 제대로 주목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어린아이처럼 우시는 것을 보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가 온갖 방해를 받지만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우리가 얼마나 사모하는지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말이 더듬거리더라도 그들은 우리의 진실함을 믿습니다. 목사가 슬피 울어서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그들의 마음속에 큰 길을 뚫어놓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복된 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연약한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도와 더불어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게다가, 연약함에서 다른 형태의 강함이 나오게 됩니다. 연약함을 통해서 우리가 사람들을 공감하기를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연약해지고 심령이 침체 상태에 빠져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됩니다만,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우리가 책임 맡은 사람들을 위하여 많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약한자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저는 목사가 자기가 수고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곳에 대한 사랑 때문에 연약해지는 경우에도 이 본문이 그대로 적용된다고 믿습니다. 가령 어떤 형제가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가난한 지역에서 목회한다고 할 때에, 그는 자기의 책임을 느끼고 자기 주위의 비참한 영혼들을 보게 되어, 결국 그것이 그 사람을 사로잡아서 도저히 거기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게 된다고 합시다. 그는 좀 더 유쾌한 일을 생각하려고 애쓰지만 사람들의 빈곤과 죄의 악몽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낮에도 그를 짓누르고 밤에도 그를 짓누릅니다.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여인들의 슬피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남자들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고, 병들어 죽어가는 자들의 탄식이 들려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 큰 섬김의 장에서 자기가 담당한 몫을 향한 절박한 열정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 사람은 근심으로 자기 자신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동안 그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복 주시기 위해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께 경건한 한 사람을 온갖 비참한 처지를 당한 사람들 가운데 집어넣으시고 거기에 두실 때에는 그것이야말로 정말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유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결국 일곱 배나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워드(John Howard: 1726-1790)는 유럽의 모든 감옥들을 다 다녀야겠다고 스스로 느끼고, 온갖 전염병이 나도는 감옥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감옥의 잔혹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종식시키는 일을 위한 열정이 있어 집에 돌아와서는 그 문제에 대해 책을 쓰고, 자신이 품었던 대의를 위하여 순교자의 죽음을 죽었던 것입니다. 형제들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살 수 있고 또 죽을 수 있는 하워드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정말 값어치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약해지기를 바랍니다.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확고한 결심으로 거의 정신이 나갈 정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혀 어리석은 것 같은 방법으로 여러분 자신이 일을 행해 나가서 냉혹한 권세자들을 떨게 하고, 안일한 자들에게 조롱을 받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저로서는 기뻐할 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러분이 바보가 된다 해도, 그것은 전혀 개의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광신에 가까워지면, 거기에 더욱더 힘이 실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약함이 강함이 되는 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약함을 지각하게 되면 그 사람 전체가 각성을 하게 되기 때문일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나와서 그 사람의 모든 부분 하나하나가 다 강렬해집니다. 신학박사 같은 위대한 사람을 보신 일이 없습니까? 정말 위대하다고 느끼는 그런 분들 말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분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분이 대체 무엇을 이룹니까? 그보다 훨씬 비천한 사람이라도 은혜와 열정에 가득 차서 주를 위하여 살아 움직일 때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스스로 작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정적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약한 때에 강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즉, 희생제사가 완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강하셨을 때가 바로 그가 가장 약하셨을 때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가 나무에 못 박히셨을 때가 아니면 과연 어느 때에 그가 어둠의 왕국을 뒤흔드셨단 말입니까? 그가 창에 찔리셨을 때가 아니면 과연 어느 때에 그가 그 백성을 위하여 죄를 제거하셨단 말입니까? 그가 친히 죽으려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아니면 과연 어느 때에 그가 사망과 옛뱀을 짓밟으셨단 말입니까? 그의 승리는 그의 극한 연약함에, 즉 그의 죽으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교회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힘이 없습니다. 고난당할 수밖에 없고, 비방과 조롱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교회를 통하여 승리하실 것입니다. 십자가는 여전히 정복의 증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끝까지 쇠한다 해도 그것을 온전히 만족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왕이신 주께서 날마다 날마다 영광스럽게 흥하시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