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론

목회론(5) '새로운 출발'

새벽지기1 2016. 7. 1. 13:28

새로운 출발


함께 그리스도의 종 된 여러분, 우리의 사역을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가능한 한 최상의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라도 우리는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최상의 상태 아래로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들로서 언제나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하며, 우리의 심령에 녹이 슬어 있게 해서는 안될 것이며 또한 우리의 마음의 칼날을 예리하게 하여 주께서 명하실 때에 즉시 응답하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가 그렇게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오늘 아침의 말씀의 제목을 “새로운 출발”로 혹은 다른 말로 하면, 갱신, 부흥, 새로운 시작으로, 혹은 첫 사랑에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잡은 것입니다.

이 주제는 우리 모두에게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침체 상태에 빠지기가 너무도 쉽기 때문입니다. 조심하거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침체에 빠집니다. 그러기를 바라지 않아도 침체에 빠지고 맙니다.


농장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수고와 경계가 필요합니다. 조금만 일을 게을리하거나, 그저 그냥 내버려두거나, 계속해서 곡식을 베어내기만 하고 거름을 주지 않고 쉬게 해주지 않으면, 결국 비옥하던 밭이 메말라버리고 정원이 황무지로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드리는 기도로 여러분의 영혼을 감아주는 일을 게을리 하기만 해도, 금방 침체에 빠집니다. 마음을 제대로 가꾸기를 소홀히 하기만 해도 가시와 엉겅퀴가 마구 돋아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적인 삶을 소홀히하면, 여러분의 존재 전체가 썩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의 충만한 상태를 지속할 에너지가 과연 우리 중 누구에게라도 있겠습니까? 마치 천사처럼 타오르는 사람도 불꽃이 다소 누그러지는 순간을 경험하리라 믿습니다. 태양도 언제나 똑같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마치 찬란하게 비치는 빛처럼 항상을 빛을 발하는 사람도 언제나 똑같이 밝은 것도, 언제나 정오처럼 빛을 발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자연과 비슷하므로, 우리에게도 변화가 있는 것이요, 또한 언제나 높이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삶이 언제나 절정(絶頂)에 달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심령이 썰물의 상태에 있다고 해서 침울해 있지 맙시다. 삶의 파도가 다시 밀려올 것이요 그리하여 지금보다 더 높은 상태에까지 이를 것이니 말입니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도, 교회들에게 번성기가 있고 동시에 메마른 기근의 시기가 있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부흥의 시기도 있었지만, 그 중간 중간마다 휴지기도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현재 경험하고 있는 모든 침체 상태를 안타까워 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어둠 속에 헤매면서 빛을 전혀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또한 더 밝은 날들을 주시기를 그에게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점들을 다 감안하고, 여러 가지 정황들을 고려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합당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데 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영적 힘이 약화되는 현상은 어느 정도는 순전히 육체적인 요인에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 곧 청년 시절 누리던 왕성한 활력이 사라진 데에 그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서 젊은 시절의 활력과 열정, 순발력과 용기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활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또 하나의 흔한 원인은 젊은 시절의 성공이 중단되는 것입니다. 마치 좁은 연못에서 처음에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지만, 남아 있는 고기가 별로 없게 되기 때문에 계속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때때로 그와 비슷한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데, 날마다 그물을 던져서 고기들을 가득 건져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임무가 그저 일상적인 일과가 되어 버리는 것 때문에 침체에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매일 설교를 하기 때문에 그 일을 지겨운 일로 생각하며 타성에 젖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교하는 일은 기쁨이 되어야 마땅한데 그것이 하나의 힘겨운 임무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들의 경우에는 다른 동료들과의 따뜻하고도 친절한 심령의 교류가 없기 때문에 침체에 빠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외로움이야말로 가장 가혹한 시련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귀한 주제에 대한 대화로 마음에 큰 힘을 얻는 영적 친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것들은 결코 우리가 침체에 빠지는 일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적인 쇠퇴가 우리의 연약한 영적 상태의 결과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첫 사랑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고, 우리의 단순한 믿음에서 벗어나 방황해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반(反)하여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반하여 행하시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기도가 없어서 비가 그쳐졌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돛을 펼치기를 게을리했기 때문에 하늘의 바람이 불지 않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축복을 가로막는 불신앙이 우리에게 없었습니까? 어쩌면 과거보다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덜 느끼며, 그의 일을 하는 데에 열심이 식어졌고,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덜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별로 누리지 못하고 곧 침체 가운데 빠지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뿌리가 든든하지 못한데 어떻게 가지들이 잘 자랄 수 있겠습니까?


자기 탐닉에 불신앙이 뒤섞인 것은 아닙니까? 한때 누리던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처음에는 거룩하게 시작했으나, 지금은 그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렇게 불결한 곳이니 푸른곰팡이가 피게 될 것이 당연합니다. 이기심이 우리의 강건함을 깨뜨릴 것이고, 우리의 유익함을 망칠 것입니다.


끔찍한 사실은, 때로는 이런 침체가 결국 파국으로 끝나버리고, 더 나아가서 교회에 더 큰 해악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목사의 사역이 영적 부패에 계속해서 먹혀 들어가는 것입니다. 즉 인도의 흰개미가 가구를 갉아먹는 것처럼(겉으로 보면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속을 다 갉아먹었기 때문에 모두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져 내리고 만다), 목사들이 목회 현장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만, 그들의 목회 사역에 진정한 열심이 사라져 버렸고,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어 있는 것이고, 주위에 온통 죽음을 뿌리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존경받는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이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여러분 중에 누구라도 높은 산에서부터 내려온 분이 계시면, 이제는 다시 그리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첫 사랑에서 떨어졌다면, 즉시 젊은 시절의 그 열정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일 것입니다. 우리가 내려온 것이 아주 미약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잃어버린 곳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도움을 구하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행복 때문에라도 이것이 필수적인 일입니다. 마음이 침체 상태에 있고, 믿음이 연약해져 있고, 심령에 의심이 있는 형제에게 묻고 싶습니다. 불행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가장 순결한 기쁨과 가장 견고한 만족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떠나게 되면,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에게 정해진 운명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면 반드시 지옥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그리스도를 떠나 방황해왔다면, 즉시 다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침체 상태에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처음에 소망으로 가졌던 우리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과 비교할 때에 과연 제대로 그런 상태에 이르러 있습니까? 처음 신학교에 들어올 때, 혹은 처음 목회 사역을 시작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때에 여러분 자신에 대해 얼마나 높은 표준을 세웠었는지를 기억하십니까? 목표는 아주 높게 잘 잡았는데, 거기에는 훨씬 못 미치는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세운 이상에도 못 미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이상을 여러분 자신의 모습과 비교하게 되면, 정말이지 머리를 숨기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죄인들이 자기 자신을 대적하는 그 큰 모순을 다 견디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반대를 받으면 곧바로 화가 납니다. 주님은 그의 양 떼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이 곁길로 나가면 그들을 따라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부름을 듣고 모이는 사람들에게조차도 불쌍한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이지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우리 주님의 영광에 못 미칩니다. 그리고 그를 닮고자 우리가 세운 미약한 이상에조차도 너무나 못 미치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사사로운 기도들에서나, 그의 공적인 삶에서나, 그의 사역이나 그의 가르침에서나 마땅히 그를 본받아야 하는데도, 우리는 전혀 거기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를 닮는 일에 이처럼 모자란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얼굴이 붉어지고 슬피 울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침체 상태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상태가 가장 최상의 상태에 못 미친다면, 그 어떠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그냥 거기에 머물러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의 사역이 제대로 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한때 우리의 온 힘을 다하여 설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 설교를 시작했을 때, 얼마나 열정과 생명이 넘쳤습니까? 과거를 돌이켜 볼 때에, 우리의 젊은 시절이 지금 현재보다 더 절실했고 더 강렬했다고 느껴지면, 우리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설교가 더 나아졌다고 비평자들은 말합니다. 그리고 설교의 사상이 더 깊어졌고 또한 표현이 더 정확해졌습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보다도 더 나은 언어를 구사합니다.


하지만 그 젊은 시절 우리가 가졌던 그 눈물이 어디 있습니까? 처음 설교하던 시절에 넘쳤던 그 가슴을 치던 뜨거운 열정은 지금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다해 토해내던 그 시절에 자주 느꼈던 그런 강렬한 신앙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때로는 과거에 행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리라 다짐하고 강단에 올라가기도 합니다. 삼손이 과거에 힘을 쓴 것처럼 다시 힘을 쓰리라 다짐하고 나아간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과거에 자기를 묶은 밧줄을 끊어버렸습니다. 그 일을 다시 하려 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미 그를 떠나셨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똑같이 전혀 힘을 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께서 여러분을 떠나시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도, 우리의 사역도 모두 허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황소를 향해 여러 차례 창을 던졌는데도 전혀 맞추지 못하자, 군중들이 그 사람에 야유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갈리에누스 황제는 그 사람을 자기 앞으로 불러서 그의 머리에 월계관을 씌우고는, “그렇게 큰 목표를 향해 그렇게 여러 번 던졌는데도 맞지 않다니, 그대야말로 가장 솜씨가 좋은 자로다”라고 말했답니다. 전혀 마음을 찌르지 않고, 전혀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지도 않고, 전혀 바리새인에게서 자기 의를 도려내지도 않고, 죄인을 감화시켜 그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게 만들지도 않는 그런 목사들에게 우리는 과연 무슨 면류관을 씌워주겠습니까? 우리는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베냐민 지파의 왼손잡이들처럼 되어야겠습니다(삿20:16).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고 또한 풍성히 있지 않으면 이런 상태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보살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목사인 사람은 자기가 책임 맡은 사람들을 위하여 더욱더 자기 자신을 보살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비록 그릇된 교리를 지녔다 할지라도, 고양이나 개처럼 그냥 죽을 그런 피조물들의 영혼이 아니라, 값을 따질 수 없는 그 불멸한 사람들의 영혼들이-우리의 책임에 맡겨져 있습니까? 영원의 문제들이 우리의 사역에 달려 있으니, 과연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겠습니까? 우리의 영적인 건강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만일 외과 의사로서 환자에게 수술해야 할 상황이라면, 마음이 불쾌하다거나 혹 손이 떨리는 경우에는 절대로 칼이나 환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을 것입니다. 털끝만큼만 실수를 해도 고귀한 생명이 사라질 수 있는 그런 순간을 위해서는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하며 가장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의가 전진하느냐의 여부가 우리가 최상의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에게 고결한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중의 가장 약한 자들을 다윗 같이 만드시고, 또한 다윗의 족속을 하나님 같게 만드시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숙12:8).

결론을 맺기 전에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곧 지금 이 시간이 우리들 각자가 새로움을 얻는 시간이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부흥을 구하도록 합시다.

우선 우리의 모든 실수들과 과오들을 회개하는 일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엎드림으로써, 다시 힘을 얻고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처음 가졌던 단순한 믿음으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잃어버린 우리의 힘을 회복합시다.

그 다음으로, 우리를 거룩히 구별하여 드리는 헌신을 새롭게 합시다. 여러분을 문자 그대로 신학교의 문설주를 여러분의 피로 물들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인 종이 섬김의 기한이 다 되어 해방될 때가 되었는데 그 주인과 그 주인의 자녀들을 너무 사랑하여 계속 남아 봉사하기를 택하면, 결국 문설주에다 귀를 대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었는데, 그 종의 심정을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 각자의 귀에 구멍을 뚫으셔서 우리가 영원토록 그의 종이 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일을 사랑합니다. 그 옛날의 종의 상태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옛적에 전하던 말씀을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와 똑같은 설교가 아니라, 그때와 동일한 힘을 드러내는 그런 설교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이야기했습니다. “저 젊은이는 아는 것은 많지 않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사랑하는구먼. 그래서 오직 그분에 대해서만 말씀하는구먼” 저는 제가 처음 설교했던 것처럼 다시 그렇게 설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때보다 훨씬 더 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젊은 시절의 성경 읽기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약속이 마치 맛있는 음식처럼 여러분의 혀 속에서 녹아 들어가곤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 또한 우리의 영적 행진의 첫 목표들을 새롭게 해 주옵소서! 그때에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전혀 생각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사명을 이루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개의치 않을 만큼 좌우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습니까? 지금도 설교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설교에 있어서 우리가 아주 능숙해졌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처럼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다는 느낌이 없다면 오히려 더 좋겠습니다. 자기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보다 오히려 연약하더라도 기도하는 가운데 강단에 올라가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우리가 처음 예배를 인도할 때에 얼마나 강렬한 책임감을 느꼈었습니까? 그런 엄숙한 심령을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계십니까? 그때에는 찬송가를 선택하는 문제나 성경을 읽는 자세 하나하나에 대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어떠한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염려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나 집에서 성경을 조심스럽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그것을 읽어주기 전에 먼저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제게 변함없는 하나의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목사들 중에는 ‘하루 종일 이리저리 다녔고, 밤중까지 설교해야 하지만, 그럭저럭 잘 할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조심스럽게, 그리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 하던 기도와 살피는 자세와 그 외의 모든 선한 것들로 다시 돌아간다면 좋을 것입니다. 다시 획복하는 데에는 굉장한 희생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희생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우리는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야 마땅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생각하면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 폭풍우 치는 큰 바다에서도 임무를 다했는데, 이제 겨우 마을의 연못 따위에 빠지려 하십니까?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그 괴로운 시험을 다 견디고 이겨 왔는데, 이제 마치 비겁쟁이처럼 굴복하고 물 속에 빠져버린단 말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겪은 것보다 더 악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전투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영원히 찬양받으실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오늘 다시 우리의 깃발을 높이 세웁니다. 우리의 표어는 바로 “승리”입니다. 곧 청교도주의, 개신교주의, 칼빈주의의 위대한 옛 대의를 위하여, 사도 바울의 도리를 위하여, 우리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승리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공격할 수도 있고 또한 돌아오는 공격을 견뎌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힘과 인내가 주어져 있습니다. 일할 수도 있고 또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간의 가능성의 최고 상태에 이르도록 우리를 강건하게 만들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승리를 얻을 것이고, 그 모든 영광을 우리의 전능하신 대장께 돌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에게 주께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