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론

목회론(3) '개성, 그리고 그 반대'

새벽지기1 2016. 7. 1. 13:26

개성, 그리고 그 반대

 

오늘의 주제는 이중적인 것으로 인격을 고취시키는 것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곧 개성, 그리고 그 반대라 하겠습니다.

 

Ⅰ. 먼저, 우리의 개성(個性)에 대해서 말하기로 합시다.

 

우리들 모두가 자기 중심주의 같은 것에서 가능한 한 거리가 멀었으면 좋겠습니다. 허영(虛榮)과 교만은 우리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서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제넘게 스스로 참견하는 것이 우리가 피하여야 할 또 한 가지의 자기 중심주의일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예를 들어, 설교 중에 ‘I(나)’를 많이 집어넣어 크게 강조한다든가,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몇 가지 분야에서 훌륭하게 사용하셨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이 그렇게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은 절대로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우리 개개인이 지닌 개성 즉, 자신의 개별적인 인격성을 인식하고 존귀하게 유지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고(EGO), 즉 자아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것, 몸의 한 부분이 아닌 전인으로서 우리의 개인적인 사고와 양심과 태도와 행동의 순전함을 유지해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개성의 문제에 대해서, 첫째로 주의할 것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우리 각자가 반드시 진지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이라는 것을 느낄 때만큼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구주를 잘 전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슬피 울며 회개하는 자세가 회개를 설교하는 우리에게 합당한 자세입니다. 괴로움 가운데 있는 사람 중에는, 설교자가 자기 가슴을 치는 것을 보고, 또한 그가 자신의 비천함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을 들을 때에 비로소 용기를 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 스스로가 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씻음 받았고 또한 나의 구주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다가올 진노에서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이 모든 사실들이 내 마음에 늘 새롭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우리 개인의 경건이 결코 부족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義)안에 있는 우리의 칭의, 성령의 내주(內住)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는 우리 각자의 성화(聖化), 그리스도와의 필수적인 연합,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영광에 대한 기대와 은혜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전진 등, 이 모든 것들을 잘 알아야 하고 늘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짓 음성을 써서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거나 우리 자신이 체험하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한 것처럼 이야기하거나 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혹시 우리가 어느 정도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느끼면, 목표를 바로 찾아야 하고, 우리가 현재 서 있는 그 상태에서 그대로 회개하며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은혜 안에서 자랐을 경우, 우리가 맛보고 만진 바를 감추어서 거짓으로 겸손을 떠는 것도 악한 일입니다. 사실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바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내적인 충만함 가운데서 말해야지, 결코 다른 사람의 충만함을 빌려다가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침묵하고 있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유익한 교리가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확실히 입증된 보배로운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저 푸주간에 서서 손님들에게 고기 덩어리를 잘라서 파는 그런 푸주간 주인처럼 말고, 우리가 먼저 그 고기를 먹어야 하고, 굶주린 사람들 앞에서 그 고기가 주는 유익을 우리 자신의 얼굴 모습으로 생생하게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러한 삶의 모습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서, 우리 개개인이 직접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런 사명을 개별적으로 받았고 또한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사라면 누구든지 복음을 전할 사명을 직접 부여 받은 것입니다. 이런 소명으로 인하여 우리의 설교가 정말 엄숙한 역사(役事)가 되는 것입니다. 이 아침 그가 친히 주시는 명령 즉,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들었던, “내 양을 먹이라”, “내 양 떼를 먹이라”는 명령을 새롭게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소명의 문제를 언제나 똑똑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1-12)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정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설교할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개성과 관련하여 우리 자신의 수고의 영역에 대해서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혼들을 살피기 위하여 세움 받은 목회자들이며, 동시에 특정한 곳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목회자들입니다. 여러분 전체를 놓고 보면, 온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여러분 각자는 성령께서 여러분을 감독자로 세우신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의 양 떼들을 먹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된 수고가 그곳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곳이야말로 여러분이 책임을 맡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각자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곳을 매우 높이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 주께서 여러분에게 주님의 일 가운데 어떤 부분을 맡겨주셨는가를 깨달으시면, 여러분의 영혼 전체를 그 일에 헌신하십시오. 어느 날 세브레(Sevres)의 한 유명한 공장을 견학한 일이 있는데, 한 화가가 매우 아름다운 화병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으나 그 사람은 저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낯선 사람을 쳐다보는 일보다 그림 그리는 일이 그에게는 훨씬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 화가는 한 번도 자기의 일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할 사명을 띤 우리 모두들에게서 이러한 일념과 헌신의 자세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 한 가지 일을 내가 하리라”는 자세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에 전심을 기울여 헌신한다면, 여러분이 맡은 그 일이 작고 하찮게 보인다 할지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아주 조그만 시계를 만드는 일에나, 마을의 시계탑에 들어가는 큰 시계를 만드는 일에나 똑같은 기술과 노력이 들어가는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 큰 것보다도 아주 미세한 작은 것이 더 큰 놀라움을 자아내는 법입니다. 양(量)보다는 질(質)이 훨씬 더 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특정한 일이 하찮게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없다거나, 아니면 철저하게 잘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져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한 사람이 앉아 있는 앞에서도 올바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법입니다. 진정 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잘 해야 할 가치도 있는 것입니다. 거리를 빗자루로 쓰는 일을 해야 한다면,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쓰는 것이 좋습니다. 저 변두리의 페드링턴(Peddlington)에서 설교하는 일을 맡았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곳의 유익을 위해 힘쓰고 있다는 것을 페드링턴으로 하여금 알도록 해야 합니다. 수많은 목사들이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되는 교인들을 놓고서 열심히 수고하여 명성을 얻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목사는 큰 교회를 맡아서 처음에는 위대한 나팔 소리가 났으나 결국 침묵으로 이어져 완전히 실패하고 만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맡은 일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을 다 던져 넣으십시오. 그 일이 크든 작든, 그 일에 충성을 다하면 그 일을 통하여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여러분, 순경(順境)이든 역경(逆境)이든, 여러분이 맡은 성채를 든든히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들은 시대를 탓함으로써 자기들의 소홀함의 핑계로 삼으려 합니다. 아무리 불평해도 시대를 바꿀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면 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옆에서 그를 섬기고 있는한, 여러분은 안전하며 악이 여러분을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계속 살피시고, 일을 계속하십시오. 절망의 틈이 눈 앞에 보이더라도 말입니다. 시대와 때는 하나님께 맡기시고, 여러분 자신의 일을 계속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우리 각자의 역량을 잘 살펴서, 그것을 가능한 한 최고의 상태로 유지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일이 주어져 있을 뿐 아니라, 각 사람마다 자기 일에 적합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인이 쓰실 그릇다워야 하고, 우리들 각자가 그대로 적절하게 주를 위하여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의 모습 그대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일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음악에서 최악의 음은 자기 음이 아닌 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음을 빌려다가 망쳐버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것을 전하시고, 여러분 자신의 방식으로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중에 주께서 그 말씀에 복 주시기를 여러분이 친히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의 사역을 위하여 여러분의 역량이 최고조로 발휘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어주는 데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나머지, 받아들이는 일을 아예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연구와 사적인 기도와 정당한 준비를 뒤로 제쳐둔다는 것은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상태에서 행하는 사역 전체가 다 시간 낭비가 되고 말 것입니다.(예화, 톱날이 무뎌져서 톱질이 잘 안되는 상태-날을 갈면 지금 하는 것보다 일이 훨씬 쉬울텐데)

여러분의 역량을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십시오. 특별히 영적인 면에서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떠한 사람들보다도 기도하고 성경을 읽어야 할 이유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생명수를 다른 이들에게 날라주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자주 우물에 나아갈 수밖에 없고, 일반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큰 통을 갖고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경건의 용량을 잘 살피시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지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로, 우리의 개인적인 책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일을 잘하든 못하든 판단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일이 하나님 앞에 제시되어야 하고, 불로 시험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영혼들이 맡겨져 있고,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 영혼들을 복 주시려 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들을 통해서 그들이 회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그들을 회심시키실 만한 그런 방식으로 행하고 계시고, 살고 계시고, 설교하고 계십니까? 이것이야말로 우리들 각자가 대답해야 할 질문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개개인의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것이 강제적으로 매우 고통스럽게 우리에게 와 닿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 생전에 우리의 일을 어떻게 수행했느냐 하는 것은 영원토록 문제가 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시고 그 중심을 살피시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이도다”(단5:27)라는 판결이 우리들 중 누구에게도 임할 수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신실함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개인의 책임을 올바로 깨닫게되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를 삼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심판대 위로 올라가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교인들이 별로 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자기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제가 회심하는 사람들을 별로 보지 못한다면 제 자신을 극심하게 책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의 교회가 우리 교회보다 작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적은 회심자를 얻은 형제들이 많은 회심자를 얻은 형제들을 판단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습니다. 각자가 자기의 처소를 알고, 자기 자신의 일에서 기쁨을 누리고 다른 사람들을 시기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이 사라질 것입니다. 시기는 참으로 혐오스러운 것이요, 궤양처럼 좀먹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이웃이 하나님의 존귀함을 받으면,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이 그 만큼 존귀를 받지 않으면 겸손해지고, 더 진지하게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축복이 임하지 않더라도, 동료가 축복을 받으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Ⅱ. 이제 개성과 반대되는 것을 말해야겠습니다.

 

사실 이것은 반대가 아니라 동격(同格)이며, 역(逆)이 아니라 전환(轉換)입니다.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어 그냥 사용하기로 합니다.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 할 일이 있고 우리들 각자가 그 일을 하기에 합당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세상에서 유일한 일꾼들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느끼도록 합시다. 우리는 그저 신비한 몸의 한 지체일 뿐이요, 거대한 군대의 한 병사일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모든 신실한 백성과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루터와 칼빈 그리고 위클리프, 휫필드와 웨슬리가 모두 우리의 동료들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모든 성도들이 우리와 한 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천군 천사들이 우리 주위에 둘러서 있습니다. 영화롭게 된 영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돕는 자들의 막강한 무리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봅시다”(히12:1-2).

 

또한 덧붙여서 말씀할 것은, 우리들이 비록 개인들이어서 우리의 개성을 유지해야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복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따금씩 정말 지쳐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위대한 진리에로 돌아가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그 진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게으름을 조장하는 것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새로움을 얻는 침상이 되어야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뒤에 계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여러분 속에 계시다는 것을, 또한 그가 여러분과 함께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정말로 복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우리를 담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장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십니다(마28:18-19).

 

오늘 아침 저는 마치 그가 이 자리에 계셔서 여러분을 그의 군병들로 바라보시며, “내 이름으로 정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여러분, 가십시오. 저 마을들로 달려가 사람들을 일깨우십시오. 도시로 나아가 항복할 것을 선포하십시오. 대도시들로 나아가서 “여러분이 마음을 드리기를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십니다”라고 선포하십시오. 이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여러분의 말씀을 효력 있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 개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좋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殿)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존중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의 영향을 받아 행하는 일이, 여러분 혼자서 하는 일처럼 미약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이 없이 육천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설교는 그 말에 따라서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내적인 힘이 그 영혼과 생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판단하실 때에, 설교라는 잎사귀들과 더불어 거하시는 성령의 진정한 꽃과 열매가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하실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결론을 맺으면서 드릴 말씀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즐거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육해야 하는 모든 양 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떼들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이끌어야 할 영혼들은 주님의 보혈로 값주고 사신 존재들이요, 우리가 세워야 할 신령한 집은 주님의 거주를 위한 것입니다. 모두가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주님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정말로 기쁩니다.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