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론

목회론(8) '우리의 모습'

새벽지기1 2016. 7. 3. 17:03


우리의 모습


이 모임이 유서 깊은 모임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는 우리가 다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아들들이 우리와 함께 목회사역의 동료들이 되어 있으니, 이제는 우리가 풋내기가 아니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아직 누렇게 말라버린 잎사귀 같은 처지는 되지 않았고, 노망난 늙은이는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숙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고, 또한 우리 주 예수님을 위하여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지금 당장 해야겠다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회고


이 점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곧, 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 언제나 후회스러운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할 거리는 전혀 없습니다만, 제 자신에 대해서는 불평할 거리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공하기는 했으나, 제가 더 나은 사람이었더라면 훨씬 더 크게 성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편에서 믿음이 부족했던 탓에 하나님의 일이 방해를 받았고 더뎌졌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하나님의 성도들을 영적으로 먹였다 해도, 제가 하나님의 성령의 쓰임을 받기에 더 합당한 사람이었더라면, 그 거룩한 목회의 임무를 통해서 주님께 더욱더 영광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제게는 과거를 회고하노라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의 시와 깊은 후회의 한숨이 나옵니다. 주께는 영원토록 영광을 돌리지만, 제게는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후회를 통해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올라갈 수 없다면, 과연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를 더 높이 올려놓지 않는 한숨이라면, 숨을 잘못 사용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채찍질하십시오. 하지만 실망에 빠지지는 마십시오. 과거에 목표에서 멀리 벗어나 떨어졌던 화살들을 거두어들여서, 격렬한 절망감으로 그것들을 다 부러뜨리지 말고, 목표를 정확히 조준하고 힘을 더 집중시켜서 그 화살들을 다시 날려보내십시오. 패배로부터 승리를 만들어내십시오. 실패로부터 성공을 배우시고, 실수로부터 지혜를 배우십시오. 은혜를 통해서 이런 일을 잘 하게 되면, 앞으로는 더 낫게 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과 더 충만히 교제하게 될 것이고, 그와 더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요, 우리의 삶이 더 거룩한 데에까지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전망


우리의 앞날에 대한 전망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과거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사납게 날뛰고 있는 그 특정한 형태의 마귀의 공격의 양상을 우리가 파악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이 “현재 사상(진보된 사상)”이 마치 사자처럼 보였습니다. 그 울음소리가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아주 면밀히 조사해 보니, 오히려 여우처럼 보였고, 이제는 야생 고양이에다 비해도 그것을 아주 잘 대접해 주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점점 쇠퇴해 가고 있습니다. 과거처럼 그렇게 그것에 매혹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니 곧 사라지고 찌꺼기만 남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진리를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시를 믿는 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14:13). 물론 다른 원수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말렉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등, 온갖 원수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일어났습니다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는 계속 전진하여 약속된 그 유산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제안


온 세상을 회심시켜 의롭게 하거나 교회를 정통 신앙으로 바꾸어 놓는 일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니 우리가 그 책임을 질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자기들의 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뜨거운 열심을 냅니다. 그들에게 성공이 있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세상은 우리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들입니다. 우리는 그보다 작은 영역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교단조차도 자기 나름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미치는 한계 안에서만 책임이 있으며, 따라서 무언가 우리의 한계 속에 있는 대상을 향하여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맙시다. 이 땅을 저주하는 가시와 엉겅퀴를 우리가 모두 제거할 수 없다면 어찌 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책임 맡은 조그만 구역만이라도 깨끗하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막을 초원으로 바꿀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전에 풀이 한 줄밖에는 자라지 않던 것을 두 줄이 자라도록 만들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어도 상당한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연 믿음 안에서 정도(正道)를 걷고 있는지, 하나님과 함께 거룩하게 행하고 있는지를 잘 살펴봅시다. 개중에는 그런 권면은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을 향한 건전하고 실질적인 사랑을 갖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신의 수준에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최고로 사용하기를 바라는 가운데, 참된 마음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과 바른 교제 속에 있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줄 것을 염두에 두고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최고의 복이 임하기를 진지하게 바라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야망


저는 제 자신을 최대한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만일 제가 강단에서보다 강단 바깥에서 더 유익하게 쓰임받을 수 있다고 느낀다면 저는 즉시 강단을 떠날 것입니다. 만일 거리 모퉁이에 앉아서 구두를 닦는 일을 하는 것이 지금처럼 큰 회중 앞에서 말씀을 증거하는 일보다도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하나님께로부터 얻는다면, 저는 그런 확신을 기꺼이 환영하고 또 실제로 거기에 순종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들이 선호하는 일을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 많은 일을 할 수가 없게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십시오! 아주 직설적인, 훌륭한 설교자가 될 소질이 있는 설교자가 어째서 미사여구를 쓰는 스타일을 배양하여 자기 자신을 망쳐 버려야 한단 말입니까? 또 천성적으로 화려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어째서 지극히 단순한 스타일을 시도하느라 곤욕을 치르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성향을 그대로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볼로는 달변의 재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퉁명스러운 게바를 모방해야 한단 말입니까? 각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무엇을 행하기를 바라시는지를 찾도록 합시다. 그리고 찾은 다음에는 그 일을 행하거나, 아니면 그 일을 시도하다가 죽도록 합시다. 지금 이 땅에 사는 동안 내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나의 주님께 최고의 영광이 돌아가며 그의 교회에게 최고의 유익을 끼칠까? 먼저 이 문제부터 해결하시고, 그리고 그 다음에 실제적인 문제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더 많은 은혜


한 가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얻으면 우리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이 돌아갈 것입니다. 오, 나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완전히 헌신된다면, 나의 재능이 비록 보잘것 없다 해도 나의 삶이 주의 영광으로 불타고 빛나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길이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성도다워지는 일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열려 있고, 또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존귀를 돌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입니다.


조심성이 필요함


여러분, 저의 바람은 주를 위하여 하는 모든 일을 최고의 방식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를 위하여 많은 일들을 행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좀 더 훌륭한 길이 있습니다. 흙손을 부지런히 놀려서 단 육개월만에 성벽을 쌓아올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벽은 엿새만에 다시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조금씩 천천히 하는 것이 결국에 가서는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됩니다. 겉모양만 되는대로 해 놓는 것보다는 한 가지를 해도 철저하게 하는 것이 무한히 더 낫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는 일은 아주 세심하게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일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철저하게 검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은 완전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각성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는 은사들을 불러일으키기를 제가 구태여 간곡히 부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목회 사역을 위해서 받으신 여러분의 천성적인 은혜로운 자질들을 배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목회 사역이 무언가 유익을 끼치려면 우리 모두 열심히 연구해야 합니다. 배우기를 그만둔 사람은 이미 가르치기도 그만둔 것입니다. 연구를 통해서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은 결코 강단에서 열매를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자


저의 진정한 바람은 우리 모두가 정말 영혼을 구원하는 자들이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누구나 자신이 청중들을 구원하는 수단이 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법입니다. 우리의 평생의 사역의 가장 참된 상급은 바로 죽은 영혼들이 생명을 얻는 데 있습니다. 저는 설교할 때마다 항상 영혼들이 예수님께로 이끌림 받는 것을 보기를 사모합니다. 그런 일을 보지 못하면, 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이 아픕니다. 사람들이 영원 속으로 들어 가는 것이 너무나도 속히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그들을 즉석에서 구원받도록 해야 합니다. 현재 주어진 기회들을 쉽게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는 은밀한 소망 같은 데 빠져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회심의 역사가 계속해서 보이지 않을 때에는 우리의 회중 전체가 하나님께 비통하게 부르짖어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설교가 전혀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고, 또한 구원할 가망도 전혀 없다면, 차라리 농민이나 상인으로 있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쓸모 없는 목사에게서 대체 주님께서 무슨 존귀를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영혼들이 하늘의 생명을 얻고 살아나는 역사가 없다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은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목적들을 위하여 우리가 쓰임을 받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쓸모 없어져 버렸다면 과연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메마른 상태에 있으면서 과연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혼을 구원하려면 그 목적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온통 쏟아 부어야 합니다. 고기를 잡을 생각이 없이는 고기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도 그 일을 목표로 삼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수단을 사용하셔서 일하십니다. 그의 목적에 맞는 수단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서 졸음에 빠지게 만드는 설교를 통해서 어떻게 영혼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온갖 천박스런 내용들이 가득한 설교를 통해서 어떻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우리의 은밀한 영혼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주님의 성령께로부터 우리에게 온 메시지가 아닌 것은, 결코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닿아서 그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역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사


여러분, 우리 모두 “가르치기를 잘하게”(딤전3:2)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벧전4:10)가 되는 것이 우리의 야망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잘 해명하며 신자들을 교육하는 유능한 목사들의 설교를 들으면 언제나 무언가를 얻습니다. 그들은 정말 고귀한 것들을 전해 줍니다. 성경의 특정 구절들을 인용하여 거기에 새로운 빛을 던져 줍니다. 여러분, 우리 각자가 그처럼 성도를 강건하게 세우는 사역을 행하기를 바랍니다. 오, 그런 고귀한 소명에 합당한 체험과 조명하심과 근면함이 우리에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 가르침이 풍성한 그런 설교가 더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오늘날의 많은 설교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불과 열정이 있습니까? 얼마나 재치가 번뜩이며 세차게 돌진합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설교를 합니까? 마치 만화경(萬華鏡)같은 설교를 자주 듣게 됩니다. 그 속에 대체 무슨 내용이 있습니까? 어떤 설교자들은 시(詩)를 인용하고, 또 극적인 사건들을 잘 묘사하여 아주 감동적이고, 아주 감상적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이런 것들이 그 나름대로 유익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혼들이 구원받아야 하고 또한 영혼들이 양식을 공급받아야 할 때에는 보다 견고한 내용물들이 설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 떼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먹여야 합니다. 영원한 진리의 문제들을 다루어야 하고, 마음과 양심과 씨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성도들을 교육시켜서 그들 속에서 주 예수께서 수천 수만의 거울로 반사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사도 바울은 진정으로 말씀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다”고 합니다(고전4:15). 사도의 이 말씀이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진실인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아버지들이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는 견고하고 안정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버지에게서는 무언가 견고한 가치를 지닌 것과 건실한 판단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 설교자들을 가리켜 ‘아버지’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너무 어리석은 짓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고 하면, 무언가 무게가 있고 친절하며 위엄이 있고 안정되며 고귀한 면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위대한 진리들을 정말 사랑합니다. 아버지는 교리의 온갖 풍조에 밀려다니지 않고, 회의론자나 광신자들이 새로운 것들을 외쳐댈 때마다 거기에 솔깃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기가 알고 있는 바를 확실히 알며, 자신이 확증한 바를 견고히 붙들며,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함과 견고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영적인 아버지는 부드러움으로 충만하며, 그리하여 사람의 영혼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드러내 보입니다. 교리적인 신학이 풍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인간성이 메말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돌보고자 하는 목적을 가슴에 품고 있으며, 그런 돌보는 일이 마음에 가득 차기까지는 그의 마음이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의 편에서도 그들의 그런 신뢰와 사랑을 환영하며 자기들을 내어놓습니다. 연약한 심령들을 가르치고 위로하고 구하며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을 돕는 것을 자기들의 사명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뜻을 같이하여 천성적으로 너희 사정을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빌2:20, 개역개정판은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로 번역하고 있음).


이렇게 디모데에게 천성적인 보살핌이 있었습니다. 새들이 자기 새끼들을 향하여 갖는 느낌에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들이 새끼들을 위해서 얼마나 부지런히 일을 합니까? 그리고 얼마나 담대하게 새끼들을 보호합니까? 날개 속에 병아리를 품고 있는 닭을 보면 용감함 그 자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아버지의 사명을 느끼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영적 자녀들을 위하여 가능한 것이든 불가능한 것이든 모든 일을 다하려 할 것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드릴 것입니다. 그들을 그렇게 사랑해도 그들에게서 별로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해도, 속에서 용솟음치는 그 강한 사랑에 이끌려서 그는 자기를 부인하는 수고에 온 힘을 다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누가 우두머리냐?’라는 질문을 절대로 제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는 대개 자기가 그렇게 존경받는 것이 자기를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 자기를 부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질서가 잘 잡혀 있는 집에서는 ‘어린 아기가 왕’입니다. 그 아기를 위해서 모든 일이 뒤로 제쳐지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이 조그만 아기에게 가장 따뜻한 환영을 베풀며, 집안의 모든 움직임이 그 아기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아버지라면, 교회 전체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장 연약하며 가장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흔들리기를 잘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가장 오류가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을 여러분의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가 왕입니다. 가장 연약한 자들이 우리 마음을 지배합니다. 어린양들을 마구 억지로 몰지 않으려면, 양 떼들 전체가 나아가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연약한 자들을 짓밟지 않도록 함으로써, 또한 자기를 잊는 위대한 모범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다스림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필수적인 법이며, 또한 이것이야말로 과연 능력의 비결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버지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모든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올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기꺼이 우리 자신을 눕혀서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짓밟고 넘어가도록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는 것이 우리의 위치입니다. 아버지는 일용할 양식을 벌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와서 나누어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하나로 뭉뚱그려 놓은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자신들을 다 내어 던져서 우리의 책임 아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행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특별히 존경을 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으시면, 그 길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곧, 자기 부인, 인내, 사랑, 열심, 근면함이 그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7).


아버지에게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그릇된 동기로 지혜를 사모하며, 그로 인해서 어리석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혜가 있다면, 여러분은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그 탁월함을 느끼게 만들도록 그렇게 그 지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목사의 지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지혜로워지기를 힘쓰는 데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답니다. ‘내 집에 도둑이 드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소. 도둑이 들어오는 기척이 날 때에 곧바로 이 버튼을 누르면, 바로 그 순간 전류가 흘러서 창고의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게 되고, 도둑은 물론 모든 것이 다 터지고 말 테니까요’. 이런 말을 들으면 웃으시겠지요? 하지만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처신하는 목사들을 여럿 보아왔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형제는 대여섯 교회에서 이런 식으로 처신하기도 했습니다. 한 교인이나 어느 집사가 잘못을 했다고 생각되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가 신실하게 소임을 다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혜로운 아버지의 처신은 아닙니다. 지혜가 있다면, 평화를 유지할 것이고, 온유함으로 개혁을 시도할 것입니다. 자녀들이 생각이 없다거나 신학이 건전하지 못하다거나, 혹은 불순종하는 면이 보인다고 해서, 아버지들이 그 자녀들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아버지들이 되기 위해서는, 높은 거룩함을 목표로 삼고 힘써야 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 완전히 거룩해지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제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완전한 삶이 가능하도록 그것을 얻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절대로 흔들림이 없는 믿음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을 얻기를 구하도록 합시다. 에녹이 그 긴긴 세월 동안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면, 그런 삶을 추구합시다. 심령과 성품에서 성도다움을 사모합시다. 저는 이웃 형제들에 대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능력은 거룩함과 헌신에서 나오는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가정에서의 일상 생활과 교회에서의 생활과 세상에서의 생활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눈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주님의 사역자들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니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한다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우리는 주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사람들이 그대로 모방해도 안전할 만한 그런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 자녀들에 대해서 지닌 그 무거운 책임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책임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우리 중에서 교인들 앞에서 감히 “나의 모든 점들을 다 따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인들은 목회자를 따라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경향 때문에 거룩한 자들이 영향을 미치게 되고, 또한 그들의 부주의한 잘못이 끔찍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처음 신앙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모델을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 예수님을 본받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경건한 사람을 본받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일을 권장하지 않습니다만, 사람들의 경향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연약함에 대해서 부드럽게 대처하여 그것이 악을 조장하는 기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우리의 행실 때문에 난쟁이가 되어 버린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올바로 지도했다면 지금의 모습보다 많이 달라져 있을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이 두렵지 않습니까? 어떤 이들은 응석받이로 자라나서 연약해져 버렸고, 또 어떤 이들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어느 한 면만 더 자라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보고서, “우리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은 진정 우리 소관입니다. 낯선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말할 때에 큰 책임을 의식하는 법입니다. 가정이 질서가 잡혀 있지 않다면, 지혜로운 아버지는 자기 자신의 처신들을 수정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이 잘못을 행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책하고 우리 자신의 소홀함을 탓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가 더 나아지면, 우리의 교인들도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들에게 잔소리하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고서 우리의 목회 사역이 어째서 더 나은 결과를 낳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지혜로운 길입니다.


절하고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악수를 한다든가, 목례를 한다든가 하는 아주 사소한 일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목이 곧고 교만한 자세는 절대로 금물입니다. 언제나 예의바르고 정감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에게서 친절을 기대합니다. 그들을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인 것입니다(참조, 고전9:21).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온유한 심정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도 한량없는 온유함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구주를 거부하며 멸망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에 대해 깊은 슬픔이 우리를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들에게 사랑으로 복음을 전했는데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을 깨뜨리며 울어야 합니다. 자기 백성이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 슬피 우는 사람처럼 여러분의 청중들을 위해 그렇게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청중 가운데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상태로 내세로 들어갈 사람이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며 고뇌를 느끼지 않는 설교자라면, 과연 어떻게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설교자라 하겠습니까?


반면에, 자녀가 그릇 행하던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리신 그림이 있습니다. 일명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가 멀리 있을 때에 곧바로 알아보는 민첩한 눈,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는 기쁨과 즐거움이 그 아버지처럼 우리의 모습이 그래야 합니다. 우리의 눈과 귀와 발을 언제나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언제나 사랑이 넘치는 그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구주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과연 어떻게 하셨습니까? 거대한 건물을 지으시거나 아니면 거대한 집회를 계획하셨습니까? 아니면 위대한 책을 쓰셨습니까? 아니면 자기 앞에서 나팔 소리를 크게 울리는 방식을 취하셨습니까? 주께서 과연 무언가 큰 것을 목표로 두셨고, 그저 평범한 일상적인 섬김을 완전히 버리셨습니까? 그가 과연 대중의 인기를 높이 여기셨습니까? 그 현란한 감상적인 메시지로 자기를 치장하셨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허영에 들뜬 마음에서 나오는 하찮은 야망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는 큰 회중을 추구하지 않으셨고, 심지어 강단을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헛된 것일랑 뒤로 제쳐두시기 바랍니다. 그는 제자들을 하나씩 부르셨고, 각 사람을 인내와 보살핌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전형적인 예를 그대로 취하여야 합니다.


성숙해져 갈수록, 더욱더 단순해지고 자연스러워지고 아버지처럼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의 일 속에 더욱더 온전히 열중해야겠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니, 우리의 모든 것을 제단 앞에 놓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숨을 쉬어야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를 위하여 살고, 형제들을 위하여 우리 목숨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 콩고 강과 인도의 갠지스 강뿐 아니라 영국의 템스 강과 클라이드 강변에도 거룩한 형제들이 묻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여호와의 집을 향한 열심히 우리를 삼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각자의 역량의 최고의 분량대로 사용하시고, 그리하여 우리가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