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론

목회론(11) 설교자의 능력, 그리고 그것을 얻는 조건

새벽지기1 2016. 7. 7. 20:41


설교자의 능력, 그리고 그것을 얻는 조건


여러분에게 기억을 새롭게 하여 순결한 마음을 북돋게 되기를 바라며, 또한 여러분과 제 자신이 우리가 능력으로 감당해야 할 그 위대한 사명을 깊이 생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일을 올바르고 효과적으로 하기를 바라는데, 그렇게 하려면 능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목적이 우리의 손님들을 기쁘게 하는 것도, 시대에 맞도록 설교하는 것도, 현대의 발전과 어울리게 하는 것도, 교양 있는 몇몇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이 시대에 맞추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시대를 성경에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무오한 말씀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지침에 따라서 설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큰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진리를 아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 또한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자연적인 지식, 혹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자연적인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과, 그를 향한 영적인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선포할 만큼, 그리고 합당하게 말씀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그 진리를 철저하게 알고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진리의 체계 전체를 선포하고 그 각 부분을 균형 있게 다루는 일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각 교리를 믿음의 유비에 따라서 제시하고, 각 진리를 그 적절한 위치에 맞게 제시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리를 제대로 알고, 그것을 제대로 사랑하며, 그리고 올바른 자세로, 또한 균형을 맞추어서 그 진리를 선포한다는 것은 우리처럼 연약한 존재들로서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위대하면서도 아주 미묘한 일을 위하여, 우리는 해마다 계속해서 인내해야 합니다. 어떤 능력이 과연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하도록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옛 복음의 단조로움을 불평하면서 끊임없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긁적거리고 있지만, 이런 질병이 우리들의 마음에도 전염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존재 전체를 다하여 온 힘으로 싸워야 할 악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덤덤함과 메마름을 느낄 때에라도, 하나님의 진리가 그렇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좀 더 주의 말씀에게 가까이 돌아가서 신선함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최근의 증거가 우리의 첫 증거보다 더 깊고, 더 원숙하고, 더 확신이 넘치고, 더 열정적이 되었으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정확히 일치하도록 계속해서 진리 안에 견고히 서고자 하는 것, 바로 이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참된 증인들이 되고자 하신다면, 그런 여러분의 계획은 정말 영광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표는 여러분이 진리를 친히 증거함으로써 여러분이 그렇게도 확신하는 그 진리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납득하게 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닥치는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일에 열심이 없기도 하거니와, 그들 중에는 믿지 않고자 하는 마음의 바람을 지닌 자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진리의 어떤 부분은 듣습니다. 하지만 다른 부분들은 거부감이 가기 때문에 귀를 막고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입니다. 사정이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지혜롭게, 또 설득력 있게 말해도, 죄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죽어 있는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일은 기적 이외에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은혜라는 기적이 있어야만 사람이 자기의 본성과 정반대되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호랑이를 가르쳐서 채식주의자가 되게 만드는 따위의 일은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죄와 의와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계시하신 진리들을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소망을 갖고 시도할 것입니다. 이 신령한 진리들은 육신적인 사람들에게는 혐오스런 것들이요, 육신적인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일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복음 진리는 타락한 본성과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설득력이나 자연적인 해명 같은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능력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설득시키려 노력해도 그 일에서 반드시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 주께서 위로부터 우리에게 능력을 덧입히지 않으시면, 우리의 수고는 헛된 것이 되고 우리의 소망은 실망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수고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의 거룩한 소유가 될 사람들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선택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풍성한 것들을 제공해 주는 세상적인 신앙을 선호합니다. 여러분, 그러니 여러분에게 정말 비범한 능력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사람들을 불러내어 세상과 진짜로 분리되게 하며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연합되게 하려는 시도 자체가 완전히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시작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을 불러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역을 도구로 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 더 있습니다. 사람들이 거듭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설교는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의 주일학교 학생 하나라도 회심하게 하거나 중생하게 하는 일을 여러분 스스로 과연 할 수 있는지, 우리의 설교를 듣는 이들의 중생을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의 무능력을 의식하고서 주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강단에 다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고 가정하고서,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로 인도함 받는 사람들이 끝까지 지킴을 받고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목회 사역이 그들을 지키는 도구가 되어서 그들이 끝까지 넘어지지 않고 의의 길에서 견고하게 나아가게 되는 것이 여러분의 바람입니다. 하지만 그 일을 여러분 스스로 하려 하십니까? 이 얼마나 건방진 일인지 모릅니다! 자, 이 도시나 작은 마을, 부락을 오염시키는 저 유혹거리들을 보십시오. 젊은이들을 공격하는 서적들의 유혹을 보십시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흔들린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이 보존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갖가지 죽음을 낳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우리 교회들에 새는 구멍이 얼마나 큽니까? 아무리 신실한 목사라도, 겉으로는 잘 나가는 것 같으나 방해를 받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많은 영혼들이 있는 것에 대해서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쓰임을 받는 도구가 되어 그리스도의 양 떼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며, 또한 그들이 그 위대하신 목자와 더불어 하늘에서 먹기까지 그들을 계속 인도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담당한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들을 과연 어떻게 그리스도께 순전한 신부로 내어드리겠습니까? 주위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는 소돔의 오염으로부터 그들을 어떻게 지킬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마지막에, “저와 또한 주께서 제게 주신 자녀들이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통해서, 그의 은혜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대여섯 명의 회심자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 대여섯 명을 옆에 끼고 안전하게 진주문을 통과한다면, 얼마나 힘차게 하나님을 찬송하겠습니까? 하지만 온갖 일들이 일어나고 그들이 멸망으로 돌아서는 것을 보면서 쓰라린 마음으로 실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풍성하게 쓰임을 받은 것처럼 보였는데, 갑자기 우리의 회심자들이 마치 구멍 뚫린 보자기 속에 넣어둔 돈처럼 새어나가 타락하여, 그들이 애초부터 주 예수님께로 진정으로 모여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참담한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누가 과연 이런 일들에 합당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 우리 자신을 맡겼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가까이 없다면, 이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면, 속히 집으로 돌아가 쟁기를 들고 밭을 갈거나 가게를 열거나 다른 사업을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수행할 능력이 없는 일을 대체 무엇 때문에 행하려 한단 말입니까? 초자연적인 일에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그런 능력이 없다면, 절대로 혼자서 그 일을 시도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힘의 근원이 사라진 삼손처럼 블레셋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것이니 말입니다. 이 초자연적인 힘이 바로 성령의 능력, 곧 여호와 자신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능력을 얻는 법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사환이 문간에 나가서 부르는 사람에게 대답할 때에, 그는 주인에게 무슨 말을 할지를 들은 다음, 그 말을 그대로 나가서 반복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집에서 부리는 사환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나가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영혼을 구원하는 메시지를 주시고, 그것을 능력으로 덧입히십니다.

이 조건들 가운데 첫째로 눈에 띄는 것은, 단순한 마음입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가장 비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부어주십니다. 자기들 자신의 것이 가장 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가장 많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어린아이처럼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인 체하는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합니다. 설교자들중 아주 수준이 높은 분들이 많은데,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서는 그것을 고치고, 자기들의 생각을 거기에 집어 놓습니다. 있는 내용을 삭제해 버립니다. 이 시대에는 옛 복음이 결코 적합할 수 없다고 상상하며, 특정한 진리들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케케묵은 것이 되어 버렸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께서 우리에게 마음의 큰 겸손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영이 무한한 지혜 앞에 엎드릴 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얻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완전히 굴복하는 자들에게 그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메시지를 지닌 사람에게 임하면, 그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질 뿐 아니라 또한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 귀를 쫑긋 세웁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정직하게 열심히 사모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받는 데에 모든 능력을 동원합니다. 거룩한 메시지에 잠기면서 영혼을 거기에 완전히 굴복시킬 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적 영적 능력을 집중시키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는 눈을 갖고서 그 메시지를 전파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면, 깊은 진지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설교 작성하는 일을 가볍게 만드는 모든 것을 다 피해야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내 설교 준비를 위해서 시간을 아주 조금만 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런 것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죄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는 아주 속히 설교를 작성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들인 수고의 결과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강단을 위한 준비를 하찮은 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거룩한 봉사를 위하여 열심히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분의 그 거룩한 임무로 성급하게 들어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을 여러분의 소명의 필수적인 일로 삼고, 또한 동시에 그 소명의 최고의 특권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의 주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즐거움과 존귀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이 메시지를 받으십시오. 시간이 지나도록 보관해 놓으면 만나라도 썩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늘로부터 항상 새로이 받으십시오. 그래야 그것이 하늘의 향기를 발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우리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그렇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이 능력은 하나님의 심정을 느낄 때에 비로소 임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함께 동정하는 일에 대해 많이 듣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거기에 동의합니다. 타락한 자들, 고통당하는 자들, 잃어버린 자들을 동정하는 일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주 하나님의 심정도 이해하고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와 심정이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을 사용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심정이 되는 자를 그의 가슴에 끌어안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라, 내 아들아. 내 이름으로 일하라. 내가 네 손에 내 복음을 맡길 수 있겠노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의를 품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메시지 자체를 전할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신적인 결과가 있으려면 성령께서 반드시 함께 역사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 임재하심이 그의 말씀과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으로부터 축복의 결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고귀한 축복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의 말씀으로 말씀하시며, 여러분은 기도와 찬양으로 그에게 응답하면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접촉함으로써, 그리고 순종하는 마음에 역사하는 진리의 신령한 효과를 수단으로 하여,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가장 절실하고 가장 충족한 능력은 영원토록 영광받기에 합당하신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긴밀하게 붙드는 것이 있어야 하고, 분명하고도 담대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그 진리를 선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뜻과 철저하게 일치하는 것에 목표를 두지 않는 목회 사역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거짓말에다 인(印)을 쳐주시리라고 보십니까? 그가 계시하지도 않으신 것에 복을 주시고, 진리가 아닌 것을 표증들로 확증해 주시리라 보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면 우리가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 갈수록 더욱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이 옛 믿음에서 벗어나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는 것이 거의 변함없는 철칙입니다. 목사들이 신자가 아니라 의심하는 자들이 되면, 그들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대해서는 메마르고 열매가 없어진다는 것이 과연 사실이 아닙니까?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게 하려면, 여러분이 성령과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고 구원할 능력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순전히 믿으십시오. 강단에 올라가 진리를 전하면서, “좋은 결과가 좀 나타나면 좋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 말씀이 결코 헛되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이룬다는 것을 확신을 갖고 믿으십시오. 마치 복음에 무언가 능력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이적을 행하는 일꾼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니, 가서 영적인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일어나 걸을 것입니다. 여러분, 담대히 전하십시오. 성령으로 말씀하시면, 결코 헛되이 말씀을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이 우리가 진정 믿으면서 전하는 것임을 교인들이 느끼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내가 믿으므로 내가 말하였노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것을 순전하게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믿을 뿐 아니라, 진리의 능력까지도 믿어야 하겠습니다. 진리를 전하면 영광된 결과들이 생겨난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로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끈질긴 믿음으로 진리를 든든히 붙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주실 만한 상태에 있게 됩니다.


다음으로, 설교할 때에 우리가 전하는 그 일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에너지의 절반을 다른 것에다 쓰면 우리의 거룩한 소명을 절대로 올바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대여섯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사람은 모두 실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우리의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하여 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할 때에 “나의 모든 것”이 거기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역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몰입시키지 않을 경우 우리가 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조금만 사려 깊은 사람이라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 동네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보세요. 목이 터져라 “사세요! 사세요!”라고 외칩니다. 모든 사람을 물건 사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모든 근면함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거룩한 부르심에서 성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메시지를 전할 때에 주께서 함께 계시기를 원하면, 철저히 진지해야 하고 살아 있는 열정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설교 중에 진정한 본질과 순전한 은혜의 기미들이 새소리처럼 들리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이런 설교에는 인위적으로 만든 세련된 설교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꾸밈이 없이 전하는 것을 듣는 일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단순한 증거는 포도원에서 막 따온 포도송이와도 같습니다. 그것들 옆에 건포도더미를 가져다 놓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설교의 생명이 준비를 통해서 강화된다면,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준비 과정에서 설교의 생명이 증발해 버린다면, 그렇게 애쓰고 수고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오히려 해를 끼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설교를 말려서 죽게 했으니, 여러분 스스로 일종의 살인 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저는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작성해 놓은 고전적인 설교문의 표현 하나하나를 일일이 상관하신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멋지게 내린다고 해서, 주께서 그것을 사용하셔서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에 불이 있고, 생명이 있고, 진리가 있으면, 거기에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함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없으면 절대로 성령의 역사는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중용이 있는 법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위해 기도하고는 본문에 대해 전혀 준비하지도 않고 곧바로 강단에 올라가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생각과 표현들을 상세히 준비해 놓아서 그 정해진 틀에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면, 그런 철저한 준비가 오히려 내 믿음을 방해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설교 준비를 하되, 자유로이 처신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설교하는 동안, 성령 하나님께서 바로 그때에 할 말을 여러분에게 주실 수 있고, 그리하여 전에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말씀을 하도록 만드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준비한 그 어떠한 말씀보다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들어가 박힐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하는 일을 그저 책 속의 글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더욱더 사실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려면,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교제 바깥에 있어도 안전한 때가 언제일까요? 그런 때는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며 마치 어린 자녀가 사랑하는 아버지를 대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대하여 양자의 영이 항상 우리 속에 있고 사랑의 영이 우리에게서 언제나 흘러넘치게 된다면, 우리가 능력으로 설교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역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기 위해서는 거룩한 삶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높은 거룩이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지 못한 삶이라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것을 축복하시겠습니까? 영적인 지도자라면 적어도 성도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영혼을 맡기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주의 능력으로 덧입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또한 사람들의 구원을 강하게 사모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들을 우리에게 주셨어도, 그보다 천 배라도 더 많은 영혼들을 주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결과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발전을 위해서는 조종(弔鐘)이 될 것입니다. 더 나아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이 현재의 거룩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거룩이 없는 것이요, 이만하면 충족히 쓰임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쓰임을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자라갈수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바람도 자라가야 합니다. 가장 거룩한 목사는 바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부르짖는 사람입니다. 보통 그리스도인은 그런 식으로 탄식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순결한 자에게만 죄가 그렇게 지극한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무덤덤한 사람들에게는 핀으로 찌르는 것만도 못하게 여겨지는 죄의 상처가 그 사람에게는 마치 단검으로 찌르는 상처처럼 아프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향한 큰 사랑이 있다면, 그리고 멸망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향한 큰 연민의 정이 있다면, 큰 성공을 거둔다 해도 결코 우쭐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회심하지 않은 수천 수만의 사람들에 대해 탄식하며 외칠 것입니다.


영혼들을 향한 사랑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목회 사역에서 작용합니다. 다른 것도 있지만, 우선 그것은 우리의 언어를 아주 평이하게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이 어릴 때, 여러분의 어머니는 여러분에게 어떤 언어를 사용하셨습니까? 어머니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일들은 아주 유치했고, 정말 어린아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지각이 있으신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이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방식은 언어의 모든 위엄과 세련된 멋들을 다 무시하고, 오로지 그 의미만을 전달하고, 거기에 축복을 주입시키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화려한 연설의 페인트로 장식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마음을 다른 사람의 마음에다 올바로 전달시키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죄인들을 중생시키고 그들을 성도로 세우는 능력이 충만히 발휘되는데 필요한 것들을 몇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주변의 환경을 세심히 살펴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 들어가면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움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회중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면, 대개는 아무리 설교자가 훌륭해도 그에게서 아무것도 얻지를 못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설교를 들을 준비를 갖추고 있으면, 대개는 그 설교를 통해서 많은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큰 축복을 위해서는, 우리 교인들이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서로 싸우는 겉모양의 신자들이 모인 곳에는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연합이 없는 것은 언제나 능력이 없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부터가 부드럽지 못하면, 교인들이 부드럽게 되기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들로서 우리는 많이 참아야 합니다. 가능한 만큼 참아서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똑같은 것을 다시 참는 일을 새로이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고전13:7)사랑에 강하여, 절대로 상처를 받지 않기로 조용히 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불화가 지배하던 곳에 조화가 생겨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축복을 기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진리가 전파되고 죄인들이 회심하는 일을 위하여 우리 교인들 모두가 진지해지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주위에 진지한 사람들이 있는 목사는 얼마나 복된 사람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임하셔서 이런 환경들을 거룩하게 하시지 않으면,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기도하는 교인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도 느끼시리라 믿습니다. 교인들이 언제든지 기도를 하게 하여 그들에게서 기도의 샘물을 길어내십시오. 기도하는 교인들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군대는 승리하는 군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 중의 하나는 바로 열정적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배에서 함께 협력하는 것 이외에, 우리 교인들이 영혼들을 찾아다니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낯선 사람이 교회당에 들어오면 언제나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약간 감동을 받으면 그때마다 한 진지한 형제가 그를 돌보아야 합니다. 마음에 괴로움이 있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누군가가 따뜻한 음성으로 위로의 말씀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우리의 목회 사역은 네 배의 수고가 들여지게 되고, 결과도 네 배로 늘어납니다. 우리의 모든 교회들이 열정과 진지함으로 함께 협력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만이 아니라 교인들 하나하나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그런 교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립니다. 각 사람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생각하게 하십시오. 싫든 좋든 여러분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속히 오시는 일이 없으면,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일이 다음 세기들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단호하게 행하면, 영국(한국)의 미래가 복음으로 밝아질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지를 치고 저기서 교리를 무시하게 되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후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후대의 자손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날 일어나는 일을 오늘의 일로만 보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은 영원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똑같이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때를 위한 것이 아닌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 교인들의 임종 장면을 기억하여 우리의 책임감을 드높이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충성을 다하지 못했다면, 그들이 죽는 시각에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 정말 괴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가령 우리 교인 중에 어떤 분이 뼈만 남은 팔을 뻗으면서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버림받았는데도, 목사님은 내게 한 번도 경고를 하지 않으셨고, 언제나 잠시 빙 돌아갈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저는 우리 앞에 놓인 복음 속에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소망 대신 ‘더 큰 소망’을 갖고 빙 돌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어느 교인이 제게 마지막 임종의 자리에서 제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기보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제게 더 나을 것입니다.

저는 교인의 임종에 함께 했다가 믿음이 강건해서 돌아오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들의 영광된 확신을 보게 되면, 우리 주님의 복음에 대해 의심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온 세상과 싸우면서 그것을 마치 축구공처럼 제 앞에서 차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은 아주 영광스럽게 임종을 맞이합니다.


지난 주 한 사랑하는 자매가 눈 바로 밑에 암이 걸렸습니다. 그 자매가 어떻게 했나요? 자기의 힘겨운 운명에 대해 애통해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자매는 그 찬란한 왕의 모습을 뵙게 될 것이라는 환한 기대 속에서 행복하고 고요하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얼마 전에 잠든 한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전혀 두려움이 없으신 것 같군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움이라고요? 어떻게 두려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갖도록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삼십 년 동안 하나님 나라의 단단한 고기를 먹고 지내왔는데, 어째서 죽기가 두렵겠습니까? 제가 믿는 분이 누구신지 저는 잘 알고 있답니다.” 저는 그분과 함께 정말 은혜로운 시간을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더 나은 세상으로 곧 가게 된다는 기대 속에서 거룩한 기쁨을 드러내 보였던 것입니다.


자, 여러분, 마지막 한 마디만 더 참고 들어주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곧 오시지 않으면, 여러분과 저는 곧 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임종의 자리에 누워 있을 때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정말 얼마나 큰 복이겠습니까? “오 주님, 어린 시절부터 주님을 알았사옵고, 지금까지 주의 놀라운 역사를 선포해 왔사온데, 이제 제가 떠나려 하옵니다. 저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선포하기를 피하지 않았나이다”라는 말을 덧붙일 수 있다면 세 배나 더 복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한, 저는 주님과 더불어 흰옷을 입고 다닐 그런 분들 중에 있기를 결심합니다. 거룩한 길을 참되이 걷고 절대로 타협으로 더럽히지 않는 양심이 양자의 축복을 특별히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점에서 여러분이 충성을 다하도록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신5:9)이라는 엄숙한 말씀을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저도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모여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서도들 이야기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그리고 그의 은혜의 교리에 충성을 다하십시오.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주께서 친히 여러분을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