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론

목회론(12) '이 시대의 목사'

새벽지기1 2016. 7. 11. 13:53

이 시대의 목사

 

여러분, 저는 오늘 한 가지 주제만을 집중적으로 말씀드리기보다는 여기저기 두루 다니면서 폭넓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간단하게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 대하여 어떤 위치에 계신지생각해 봅시다. 천문학의 체계를 세울 때에, 태양을 어디에다 둡니까? 그 중대한 문제에 대해 분명치 않다면, 다른 행성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도 분명치 않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학 체계에서 그리스도를 어디에다 두십니까? 여러분의 사상에 그가 어디에 서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일과 여러분의 동료들과 관련해서 예수께서 어디에 계시느냐는 말입니다.

 

신적인 우리 주님을 여러 가지 면에서 보아야겠습니다만, 저는 언제나 우리의 희생 제물이시오 죄를 지시는 그리스도로서 그가 취하시는 구원자의 모습을 최우선으로 여깁니다. 이에 대해서 분명히 열정적으로 선포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 그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십자가의 깃발이 길을 인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贖罪)를 책장 위에 올려놓고 그저 당연한 진리로 여기고만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그것을 여러 가지 하찮은 신앙적인 호기심거리들 속에 내버려둘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마치 예배 의식의 언어를 되풀이하듯 무덤덤하게 사용할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 진리를 살아 있는 것으로 강렬하게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 존재의 에너지를 충만히 발휘하여 그것을 힘있게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속죄의 그 중차대한 진리를 자주, 명확하게, 그리고 강조하여 전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올바로 배우지 못한 것이요, 따라서 그리스도를 올바로 가르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것은 입맞춤으로 그를 배반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19세기 이전에 골고다에서 행해진 일이 오늘날의 죄와 상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렇게 거칠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러면서도 우리의 죄를 주 예수께 지울 수 있다는 것이나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합니다. 그들은 이것이 도덕적으로 불합리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집에서 만들어낸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엄숙한 증언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벧전2:24)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그것을 가리켜 부도덕한 일이라 부른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고후5:21)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사53:5-6)는 것을 믿습니다.

 

성경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셨고 그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셨으며, 그리하여 사람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덕적인 주권에 대해 저질러진 치욕에 대하여 보상이 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믿고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죄 사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대신 보상하셨기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고, 신자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1:6) 영접을 받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속죄를 제쳐두는 자들은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 교리의 본질이 서로 공통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중에 어느 하나를 부인하면 다른 하나도 무너뜨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목회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을 명확하고도 단호하게 전하기를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째서 제가 그렇게 확신하는지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어떠한 곳에서도 구원의 소망의 그림자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개인적인 죄에 대한 의식 때문에 한 쪽 구석에 몰려져 왔고, 절망에 싸여 왔습니다. 그런데 완전한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제가 그것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제가 그를 처음 바라보고 빛을 받은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제가 얼마나 자주 죄인으로서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렸고, 그의 상처를 새롭게 바라보았고, 영생을 거듭거듭 믿었으며, 그리하여 처음에 가졌던 그 기쁨을 계속해서 누렸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여러분, 저는 다른 것은 전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것을 아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분 중에 혹시 속죄를 설교하면서도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감히 그분에게 속죄를 설교하지 말라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분명히 확신하건대, 어떤 교리든 억지로 차가운 마음으로 전하는 설교자야말로 그 교리의 가장 나쁜 원수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서 십자가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그냥 내어버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참으로 말씀드리거니와, 저는 제 마음을 다하여 진정으로 속죄를 전합니다. 저는 제 임종 자리에서도, 제 생애의 마지막 오 분 동안에라도, 그리스도의 희생과 죄를 사하는 피의 역사를 증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비록 듣는 이들이 충격을 받는다 할지라도, 대속(代贖)의 진리를 가장 강조하는 말씀을 되풀이하고 싶습니다. 천국에서의 저의 첫 말이 제 구원을 주님의 피의 공로로 돌리는 것이 될 것이니, 이 땅에서의 제 마지막 말이 그 동일한 사실을 증거하여 주님의 원수들에게 충격을 준다 한들, 어떻게 제가 후회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다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중보자시오 대제사장이심을 붙듭니다. 이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미신의 주장들에 대해서 분노를 갖고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것이 영국에 아직 살아 있습니다. 즉, 옛 로마의 사제들이 만들어낸 복음이 그것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우리 주 예수님 자신은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중보자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쪽으로 어느 정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 쪽으로는 죄악된 인간과 주 그리스도 사이에 간격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간격은 사도직을 계승한 자들만이 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탐하는 존재들입니다. 또 어디를 가든지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높이 올려서 그들에게 축복을 받아야만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주장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의 길이 지정된 사제를 통해서만 갈 수 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이런 오류에 대해서 진지하게 저항하시기 바랍니다. 이것과 더불어 복음이 일정 부분 전해진다 해도, 그것은 치명적인 오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미신의 교묘한 것에 조금도 연루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사제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은 목사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단언하면서도, 여러분에게서 무언가 높은 계급에 속한 분위기가 풍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조장하는 의복 스타일이 있는데, 그것을 모방하는 일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런 것을 풍기는 언어 스타일이 있습니다만, 그것을 모방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우월감을 드러내 보이는 그런 풍모가 있습니다. 이런 거만한 태도는 정말 유치한 것입니다. 목사가 위엄 있는 존재라고 느끼게 만들어서 교회의 나머지 회원들이 감히 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의식적으로 처신하는 그런 특정한 성직자들의 모습을 피하십시오.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 제사장들이라는 인식을 갖고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들 중에도 자기들이 무언가 신비한 특별한 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헛된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목회자들로서 우리의 직분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고 정당하게 수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들의 직분 그 자체를 높이는 데에만 굉장한 관심을 쏟으며 자기들을 높이려고 애를 쓰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직분을 높이 올리는 만큼 그 사람은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목회자로 선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자기들이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자기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영감된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시는 오류가 없으신 스승으로 제시하기를 명심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께는 충성을 다한다고 하면서 그의 말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자신의 말씀과 그의 사도들의 말씀들을 그렇게 소홀히 대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높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리스도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요한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6). 그리스도를 길이요 생명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를 진리로 아는 것도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입법자시오 교회의 유일한 통치자이심 더욱더 강조하여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사람이 만들어낸 신앙 체계들이 있는데, 우리 교회들에서는 모든 일에서 사도의 전례를 지키고 그리스도의 원리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권위는 바로 주의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미 알려져 있는 그리스도의 규례들 중에 무엇을 삭제한다면, 그것은 더욱더 나쁜 일입니다. 교회 안에 세례와 성찬에 대해 논란이 있는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논란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과 행위를 개정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의 위대한 머리이신 주님의 법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일에 대해 항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또한 우리 앞에 우리의 모범과 귀감으로 서 계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완전한 귀감으로 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그에게 일치하기를 사모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주님이시오 하나님이신 분으로 높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는 주님이시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가장 깊은 경외로 그분에 대해 말하고 또한 생각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일들을 가볍게 대하는 심령이야말로 거기서 나오는 행동보다 더 사악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을 최고로 높이고 그의 능력과 그의 궁극적인 승리를 확고하게 신뢰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키를 잡고 계신 주님의 손을 신뢰합시다. 그의 지혜와 권능이 결국 모든 일을 이루실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맙시다. 그러므로 가서 그의 이름으로 말씀하십시오. 교리를 진술하고 나면, 교인들에게 그것을 믿으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십시오. 담대히 그렇게 하십시오.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명하여 일어서게 하고, 죽은 사람을 명하여 살게까지 한 것처럼, 여러분도 죄인들에게 주님께로 돌아와 생명을 얻으라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시는 주님께서 그 자신의 말씀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주님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진지하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셨듯이 우리도 그를 대신하여 서 있다는 사실을 묵상해 보면, 우리의 위치가 정말 충격적으로 느껴집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보내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우리는 강단에 서서 죄와 의와 다가올 심판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우리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수고한다는 것을 항상 느끼십니까?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전한다는 생각을 갖고서 설교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면, 부자들과 교양 있는 소수에게 모든 관심을 다 쏟지 않을 것이고, 예수께서 하셨듯이 많은 이들을 돌보아 줄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 국왕은 “가난한 사람의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민이라도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그를 알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가난한 자들의 설교자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실 때에,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받았습니다. 우리 양 떼들 중에 다른 사람보다 더 병들고 더 가난하며 더 무식한 자가 있으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사람을 가장 먼저 찾도록 합시다. 지체 높은 사람들과 동질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부랑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타락한 자들과 하나님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면, 우리는 거만을 떨지 않고 부드럽게 권유할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의 정을 갖게 될 것이요, 죄인들의 패망이 우리에게 화가 되고, 그들의 구원이 우리의 복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들에게 간청할 것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울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셨을 것이니까요. 그들을 참아 줄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으로 참으시니 말입니다. 기회를 살피고, 그것들을 인내로 사용할 것입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대하듯 그렇게 우리의 교인들을 대할 것입니다. 그들을 어깨에 메고 기쁨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절대로 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그리하셨으니 말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취하는 우리의 위치는 정말로 책임이 막중합니다. 그 무게를 견디려면 큰 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여러분, 조심해서 처신하십시오. 여러분이 위대한 이름을 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목사들이 교만하게도 자기 이름을 그리스도의 이름 대신 내세우다니, 이 얼마나 우리 주 예수님께 사악한 잘못입니까? 여러분이 진정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위치에 있다면,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신에 합당한 자들이 되게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교인들 가운데 다른 이유로는 도저히 사랑하지 못할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모습대로라면 과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유 때문에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교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유들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셨습니다”(갈2:20).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 내게,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네 자신을 버리라”고 말씀하신다면 과연 그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화난 감정은 일일이 버려야 합니다. 타락한 자, 경박스러운 자, 헐뜯는 자, 무관심한 자, 심지어 사악한 자까지도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줄로 그들을 동여매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이 땅에 주님의 사랑이 영원히 계속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채우”도록(골1:24) 그리스도와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난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는 데에 들여지는 고난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를 위해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며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진리로 말미암아 지금도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나 비방이나 손해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견디는 고난을 당하는 자들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함께 모으는 데에, 또한 그의 택하신 교회를 세우는 데에 필요한 고난의 분량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저지르는 온갖 고난을 주께서 친히 어떻게 견디셨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깨달을 때에 주님을 향한 우리의 위치가 지극히 실질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축복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러니 현실로 처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체험하고 전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아브라함의 종이 그 주인의 부귀를 잘 전달하며 자기가 그의 집에서 가지고 온 보물들을 보여 주었듯이, 주님이 누구시며 그가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우리가 그 일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아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 줌으로써 우리의 위대하신 주님께로 영혼들을 인도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 그리스도의 권능과 임재를 의식하는 자들로서 그를 향하여 든든히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사실은 그가 진정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요 또한 그가 진리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어서 그의 진리를 전한다면, 반드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라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그저 헛된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이 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시고, 그 믿음에 합당하게 행합시다. 그리스도의 밝으심을 항상 느끼지 못한다 해도, 마치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향해서 항상 돌아섭시다.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라도 해바라기는 어느 쪽에 빛이 가장 많은지를 알고서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여러분, 참된 해바라기가 됩시다. 강단에 올라갈 때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쪽을 바라보며, 그 쪽으로 기댑시다.

 

설교자들 중에 주님이 그들의 복음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의 주목을 끌어서 구원시키기에는 자기들의 복음으로는 충분치 못하므로 그것에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들을 보충시키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방법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아서 복음이 실패로 끝나버린다면, 그것은 정말 한심한 일일 것입니다. 끈끈이 종이가 파리를 끌지 못해서 우리가 들고 다닌다면, 차라리 그 끈끈이 종이를 불태워 버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복음이 사람을 이끌지 못하고, 또한 사람들이 와도 그 복음이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 회심케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을 포기해 버리십시오. 그리고 가서 커피숍을 열거나 술집을 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설교를 복된 복음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주의 말씀에 초자연적인 능력과 임재가 함께 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면,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자, 여러분, 여러분의 복음에 성령의 능력이 없다면, 확신을 갖고서 그것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의 위치에서 그를 향하여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복된 진리에 대해서 여러분이 과연 얼마나 뜨겁게 감동을 받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그것을 믿고,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 위대한 소망이 복음적 교리를 사랑하는 자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오실 것입니다. 때와 기한은 우리의 알 바가 아닙니다. 여러분, 용기를 가지시고, 마음을 일으키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를 높이 기리며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그의 언약하신 대로 임하셔서 그의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실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개인의 위치에 대해서 두세 마디만 말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온전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며 정신적 활력이 왕성한 분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복음을 알고, 복음의 능력을 실제로 체험했고, 진흙 용광로에서 은처럼 연단을 받았고 또한 복음의 진가를 드높이는 형제들이, 그것을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목숨을 던지는 그런 형제들이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폭풍우에 맞서고, 격류를 거슬러 헤엄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면 혼자서라도 결연하게 나아갈 그런 영웅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대장에게는 강철과도 같이 든든한 군사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 시기에 우리는 친분 관계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올바를 때에, 입장이 분명하지 못한 자들과 어울려서 우리 자신을 타협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물에 빠져 가는 배의 잔해를 붙잡아서 함께 물에 빠질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복음의 위대한 진리들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자들과 계속해서 교류한다는 것은 영원한 위험 속으로 달려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신령한 사람들에게는 추악한 친구일 뿐입니다. 새로운 생각과 느슨한 습관과 신령하지 못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과 사귀는 일은 정말 불편합니다. 특히 스스로 아주 정통 신앙을 가진 체하면서도 옛 믿음에 속한 것을 하나도 믿지 않을 경우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신실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온갖 연관들을 다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악한 것에서 분리한다고 이야기만 하고 계속해서 그 속에서 함께 뒹구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정결해야 하겠고, 또한 여러분의 친분 관계 역시 정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악이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여러분의 삶이 거룩해야 합니다. 이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로 여러분의 가슴에 못을 박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니 만큼 여러분이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최고의 것을 여러분의 주님께 드리십시오. 주님을 섬길 때마다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를 힘쓰십시오.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선행에서 여러분이 완전하게 만드시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여러분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십시오. 수요일 저녁, 대여섯 명이 모여 있어도, 여러분은 최선을 다하십시오. 절대로 차선(次善)의 것을 내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언제나 유지하십시오. 여러분의 삶 전체가 여러분에게 가능한 가장 고상한 수준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하고, 가장 능력 있는 방식으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게으른 것입니다.

 

부지런히 행동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모든 쇳덩어리를 다 불 속에 집어 넣으십시오.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능력을 다 사용하십시오. 기회가 있는가를 항상 살펴서 그것을 속히 붙잡으십시오. 아무리 작은 기회라도 거기에 큰 일이 일어날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지극히 작은 마을에서도 무한한 결과들이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곳이 복음화 되면, 다른 곳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공유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처럼, 울타리를 조금씩 조금씩 항상 넓혀 가십시오. 소유해야 할 땅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현재 행하고 있는 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목회자들로서 여러분의 양 떼들을 먹이시고,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양 떼들을 늘여 가십시오! 이 점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십시오! 온 정력을 다 사용하며, 모험적이고 근면한 심령을 지녀서, 이 시대에 역사하는 어둠의 임금의 그 끊임없는 책략을 무력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심어 주기를 바라는 말은, 마음에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싸우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싸우게 되면, 우리와 싸우는 상대방을 동정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최소한 우리가 진리를 붙드는 동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면, 누가 우리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대의가 어떻게 무너질 수 있습니까? 주님의 뜻에 따라, 회심자들이 바다의 모래처럼 무수하게 그의 진리에게로 몰려들 것입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110:3)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용기를 가지시고 다음과 같이 노래하며 여러분의 길을 계속 가시기 바랍니다.

 

“지옥의 바람이 불었고,

세상이 그 미움을 드러냈으나,

그래도 무너지지 아니하도다.

할렐루야 십자가를 찬양하라!

절대로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