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우리가 읽은 본문인 로마서 6절 이하의 말씀은 하나의 논쟁거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6절에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그 말씀 때문에 결국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냐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면 영생을 얻고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행하시리라. 이것이 6절에서 11절까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루고 있고 그 기준대로 심판을 하시겠다고 말을 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믿는 자답게 선하게 사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요 이유가 된다는 증거 구절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집고 넘어갈 것은 이 로마서를 시작할 때 로마서를 보는 시각에 있어서 맨 처음에, 물론 복음을 선언합니다. 복음이 무엇인가 선언하고 설명할 때 가장 대표적인 것,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을 일단 해놓고 그 다음에, 왜 복음이 필요하냐로 넘어 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복음이 무엇이냐고 할 때 오히려 사상과 교훈과 내용이 아니라 구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구원이다. 복음이 무어냐? 복음은 그 아들에 관한 것이데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신 것,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를 나중에 구체적으로 로마서에서 설명하겠지만 구원을 설명한 다음에 논리적으로 맨 처음 따지고 들어가야 되는 것이 구원이 왜 필요하냐에 대해서입니다. 구원이 왜 필요하냐를 납득시키지 않고서는 구원에 관한 설명은 사실상 그 무게를 잃게 됩니다. 구원이 왜 필요한가? 우리가 왜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가? 구원을 받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증거가 뭐냐, 우리가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 너희가 이러저러한 일을 하는 것을 보아라, 해서 로마서 1:18~ 3:20 에 이르기까지 구원을 어떻게 받느냐가 아니라 도대체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 우리가 왜 벌을 받아야 되느냐, 하나님의 벌을 우리가 왜 받아야 되느냐,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이 심판을 우리가 피할 수 없느니라가 주된 내용이고 그러면 심판의 기준이 무어냐? 악하게 사는 것이라는 이것이 우리가 살펴보려는 내용입니다. 도덕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것이 죄며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것이 죄며 하나님을 모르고 거역한 것이 죄이며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이 심판인데 그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형태가 무어냐 하면 악행으로 나타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함과 선함을 윤리적, 도덕적 차원에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영적 차원에서 생각해야 되고 결국 모든 심판은 죄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며 거스려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인데 그 나타나는 모습은 언제나 악행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어떻게 심판을 준비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이며 그 심판을 면할 방법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논쟁 속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아느냐, 우리가 저지르는 악행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이런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집고 넘어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 2:6). 각자가 악하게 살았느냐 선하게 살았느냐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것은 개인적인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차별없는 그리고 철저하게 개인적인 심판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차원에서는 민족적 문제와 인종적 문제, 식자와 무식자의 차별이 없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11절에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하는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것 같이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심판을 면하지 못하고 백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계속 이런 후렴이 있는 것을 보십시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롬 2:9). 유대인은 자신을 선민이라 생각하고 나머지 모든 이방인을 대표로 해서 등장한 헬라인은 약속에서 제외된 족속으로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의 구별이 없고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가 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별이 없이 ‘유대인에게 또한 헬라인에게’ 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선민과 이방인으로 나누지 않으며 백인과 유색인종으로 나누지 않고 배운 자와 배우지 아니한 자로 나누지 않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지 않고 오직 이 두 부류, 선한 자와 악한 자로 나눕니다. 인간은 그런데 다 어디에 속했다는 것입니까? 악한 자에게 속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심판을 받기에 싸다,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것이 여기 로마서 1:18~3:20 에 이르는 동안의 주제요 중요한 내용의 흐름인 것입니다.
앞에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문제란 악행을 행했느냐, 선행을 행했느냐 하는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의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닙니다. 권선징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훈적이고 사상적이고 개념적인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한 하나의 형태를 이야기합니다. 즉 이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해 보아서 선행을 행하는 자와 악행을 행하는 자, 이 구별을 원리적 차원에서 추적해 보면 성경이 설명하고 싶은 핵심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우선 성경이 나누는 대로 이 두 그룹을 나누어 보면, 먼저 따지는 것이 무어냐 하면 이 두 그룹에 속한 사람들 중 한 그룹은 선을 행하는 자요 다른 한 그룹은 악을 행하는 자인데 선행과 악행의 구별이 나타난 형태로 구별되기 이전에 선을 행하는 자의 선을 행하는 이유, 악을 행하는 자의 악을 행하는 이유가 이렇게 진단되어 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그리고 저들의 삶의 자세, 방향 원리가 무엇인가가 먼저 설명되고 필연적인 결과로써 선을 행하는 자와 악을 행하는 자로서 나타나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의인을 보십시다. 7절에 보시는 바와 같이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을 행한다 이렇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이 선이 도덕적, 윤리적 차원이 아니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 속에 있습니다. 영광과 존귀, 이것만으로는 분명치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영광을 구하고 그래서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녀들을 좋은 학교 보내려고 기를 쓰는 것입니다. 시집장가 보낼 때 그렇게 좋은 가문과 맺으려고 하는 영광과 존귀, 그런 차원이 아니고 뒤에 있는 단어, 썩지 아니함 속에 포함된 것과 같이 영광과 존귀는 그런 의미에서 영생, 절대적인 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썩지 아니함을 구한다 하는 것은 우리가 마태복음 6장으로 이미 한 번 본 바와 같습니다. 마태복음 6:19 에 가면 이 썩지 아니함에 대한 대표적인 설명이 나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우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 6:19-20)
하늘에 쌓는 보물과 땅에 쌓는 보물,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같은 돈을 교회에다 내면 하늘에다 쌓는 것이고, 나를 위해 쓰면 땅에 쌓는다는 그런 개념은 아닙니다. 그래서 무슨 건축 헌금을 가용하거나 교회에서 무엇을 해야 할 때, ‘보물을 쌓아 두십시오. 그러니까 헌금을 하십시오.’이렇게 요구를 하는 것은 이 내용이 갖는 뜻을 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헌금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내는 하나의 신앙의 행위이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 한 면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보물을 쌓는 가는 것은 결국 세상에 있는 가치를 주를 위해서 쓴다는 개념이 아니고 가치 자체가 하늘에 속한 것이냐, 땅에 속한 것이냐로 나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속하는 것들, 땅의 가치에 속하는 것들-돈, 권세, 건강, 지식 이런 것- 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서 쓰여지는 가치, 보물은 어린 소자에게 물 한 그릇 주는 것,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멸시와 핍박과 경멸을 당하는 것, 주를 뒤따르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 그래서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을 대는 것, 이것이 하늘 나라의 보물입니다.
보물 다이아몬드를 헌금하면 는다, 이런 것을 보물이라 그러지 않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인데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보물로 될지 그냥 잘난 척으로 되서 아무것도 안 될지는 본인에게 달린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기도를 밤낮 누구를 못살게 하시고 저를 잘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완전히 꽝입니다. 꽝이 아니라 완전히 마이너스 무한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보물이냐 하면 가치관의 문제인데 영원을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이 가치는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선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묘사,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한다 하는 내용 속에는 이미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의 권위와 요구 앞에 무릎 꿇은 하나님과의 정상화 된 관계의 전개된 표현인 것입니다. 여기서 선이란 그런 의미에서 거룩하고 영적인 가치를 말하는 거이지 보통 윤리적 도덕적 차원에서의 선은 아닙니다.
그 선이 윤리적 도덕성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거룩하고 병적인 선은 윤리성과 도덕성을 내포하고 있게 되어 있어서 신자로서 신앙이 좋은 사람은 도덕성, 윤리성에서도 언제나 합격점 이상을 받게 되는데 그 이상입니다. 오른편 뺨을 맞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왼편 뺨을 내놓은 사람인 것입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농부가 처음 예수를 믿고 오른편, 왼편 싸움 이것을 어떻게 실천해야 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동네가 좀 가물기 시작했는데 비탈진 산은 논농사를 계단식으로 짓게 되어 있는데 자기 논이 위에 있고 이웃집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의 논이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길어 아랫쪽으로 물이 안 내려 가도록 물고를 막아놓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니까 물이 하나도 없더래요. 보니까 아래 논을 가진 안 믿는 논 주인이 물고를 터 놓은 것이더래요. 물을 암만 같다 부어 놓아도 잘 때 물고를 터 놓으면 다 아래 논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남 나가서 물 퍼다 놓을 때 자기는 집에서 놀고 있다가 밤에 자러 들어가면 와서 물고만 트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그 다음에 방법을 하나 배웠습니다. 그 다음날 아래 논에 물을 다 채우고 자기 논에 물을 채웠답니다. 그랬더니 이제 물고를 안 트더래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항복을 해서 당신 어쩌면 일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더랍니다. 대단한 실력이죠. 그것이 바로 선행입니다.
내가 위에 물을 채줬는데 아래 사람이 밤마다 와서 물꼬를 트고 가져간 것을 화 안내고, 열심히 내 물만 채우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 논에 물을 채우고 나서 내 논에 물을 채운, 여기가 신자들의 선행입니다. 거기는 당연히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선행은 포함되고 넘치는 것입니다. 이 선행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선행의 도덕적, 윤리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벗어나서 영적인 것이 어디에서 증명되느냐 하면 참고 선을 행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삶의 자세가 하나님과 화목되고 하나님안에서 그의 삶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함으로써 그는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고 영원을 추구하는 자로 삽니다.
그래서 이 세상과 자꾸 반대되고 충돌되는 것입니다. 그의 삶이 평탄치 않습니다. 세상이 그를 놔두지 않아요. 그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그가 정직히 살고 성실히 사는 것을 시기합니다. 환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한다는 말을 씁니다. 우리말에 빠져 있습니다만 “참고 인내하면서” 라고 해야 그 본문이 제대로 인식됩니다. 참고 있다고 해서 보상이 곧 오지는 않습니다. 그 고난을 참을 뿐만 아니라 그 참는 것을 지속적으로 하며, 한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의 영원한 싸움, 생명과 진리의 싸움을, 세상이 그를 거스르고 반대하는 것을 참고 인내하면서 그 일을 계속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8절에 악을 행하는 자는 어떤 자들인가?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을 짓는다는 것이 악한 자들의 악행의 가장 핵심적인 표현입니다. 왜 당을 짓는다는 것이 악한 자들의 악행의 가장 핵심적인 표현입니다. 왜 당을 짓습니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연인- 하나님과 화목되기 전, 중생하기 전 모든 인간- 은 하나님에 대하여 거스르는 마음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옳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옳은 일에 자신을 항복시키지 않고 옳은 일을 거스려서 고집을 부리고 일부러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마음으로 자기가 나쁜 일을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틀린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본인의 양심의 가책을 무마하기 위하여 동료들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동조자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런 실제적인 예를 들면 여러분이 이해하실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방도 잘못했고 나도 잘못한 것이 있는데 생각할수록 괘씸한 것은 나는 10원어치 잘못했는데 상대방은 꼭 1억원어치 잘못하더란 말입니다. 따지면 사실 비슷하게 잘못한 것인데 사람이란 늘 자기 것은 자꾸 깎고 남의 것을 늘 키우는 법입니다. 상대방이 잘못이 크니까 그 이야기를 돌아다니면서 자꾸 합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잠깐 잘못을 했더니 어떻게 나에게 못되게 굴었구나,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무마하고 상대방이 잘못한 것을 자꾸 확인해서 복수를 해야겠는데 복수를 하는 것이 틀린 것이요 그것을 냉정하게 평가하면 잘못한 것이 반반이라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상태로 못하겠으니까 내 편을 만들어서 힘을 키워야 됩니다. 악한 일을 하기 위해서, 그래서 동조자를 키울 때는 그 원래 있었던 사건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끌고 나갑니다.
이 당을 짓는다는 이야기 속에 자기가 틀린 일을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기 위하여 동조자를 모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동조자를 불러 모으는 짓을 왜 하게 됩니까? 틀린 줄 알면서 틀린 일을 고집부리려고 할 때 우리는 동조자를 불러 모으게 됩니다.
여기서 바로 당을 짓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당을 짓는다는 것. 그러니까 저들의 악행은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선악의 기준으로 악행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려 못할 짓을 한 일을, 힘을 내어 의지적으로 거스려서 한 행위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의 악행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스리는 마음을 갖고 있는 일에 나타난 결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당을 지어서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가시면 이 문제가 아주 잘 확대되어 나타나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2-3)
그때가 언제냐 하면 죽었던 때, 하나님을 몰랐던 때, 중생하기 전의 모든 자연인은 어떤 사람으로 살았느냐 하면 불순종의 아들들을 좇아 살았습니다.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습니다. 진리에 대하여 불순종합니다. 불의에 대하여 순종하는데 그것을 무어라 하냐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자기 멋대로라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이 결국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악행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행은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이요 자기 멋대로 했다는 것은 진리를 좇지 않고 불순종한 진리에, 불순종한 자기 유체에 좇아간 불의를 행한 결과입니다. 진리를 좇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양심과 무엇이 옳은가를 아는 것을 기를 쓰고 반대해서 자기 욕심껏 자기 하고 싶은 대로해서 만들어 낸 것이 악행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가시면 그 악행의 죄목들이 이렇게 열거되어 있습니다.
“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19-21)
여기 있는 것 중에 다른 것들은 죄인 줄 다 아실테니까 별로 문제가 안됩니다만 시기, 분냄, 원수 맺는 것 이것은 굉장히 조심하십시오. 이 것은 다 어떤 것들이냐 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긁는 것들로 인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남의 마음을 긁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긁어서 생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원수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인, 강도, 도둑질, 이런 것들이 마땅히 죄인 줄 알지만 여기 있는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 이런 것들은 어떤 죄인지 잘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마음에 가진 시기심으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그 말로 실수하지 마십시오. 도둑질을 해 간 사람을 화가 나서 칼로 찔러 죽이는 사람은 없지만 말을 고약하게 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쪽이 훨씬 더 큰 죄악의 형태냐 그러면 말을 잘못하는 쪽입니다. 말이란 꼭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의 표정을 어떻게 짓느냐도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어떤 쌀쌀맞은 표정, 어떤 경멸의 표정을 짓느냐 하는 것은 말로 하는 것 이상으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 사람 마음에 칼을 갈게 합니다. 참으로 조심하셔야 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악행입니다.
이 악행이 왜 생기느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은혜를 입었고 구원을 얻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여서 생기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지 않은 자는 남을 용서하지 못하며 사랑을 입지 못한 자는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떳떳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는 그렇지 못한 자를 자꾸 흉보며 심판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악행은 결국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앞에서 자기의 행위를 돌아보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며 또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권을 자기가 갖고 있고 그 심판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 이것이 악행입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5:21 하반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악행으로 인하여 천국으로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악행의 근거가 무엇이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중생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악한일밖에 할 줄 아는 재주가 없습니다. 기껏 잘 해도 악한 일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의 선행은 그것이 자기 치장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지신 십자가 같은 사랑이 되지 못합니다. 나를 죽여서 남을 유익하게 하는 십자가의 죽음은 아닙니다. 그 선행은 언제나 자기 치장입니다. 내가 남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자연인을 놓고 볼 때 선행을 그 보상을 받지 않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수재 의연금을 걷는다든가 국가적 어떤 어려움을 인하여 의연금을 걷을 때 매스미디어가 앞장을 서야 언제나 모금액이 많아집니다. TV로 생중계를 하면 언제나 많은 인원들이 모여 듭니다.
신문지상에 이름이 크게 나야 많은 사람들이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하고 싶죠? 안 그런 사람도 있던데요. 난 무명으로 냈다 그겁니다. 그 무명은 절대 겸손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고 자기가 없으면 아무 존재도 필요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그는 심판과 상급에 대한 생각이 있을 수 없고 짧은 인생 동안 자기 멋대로 살자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악한 것입니다. 우리가 실재로 경험하는 것이고 우리 스스로 저지른 잘못 중의 하나입니다. 그 악한 것은 벌받아 마땅합니다. 나의 유익을 위하여 남을 손해 끼치는 일을 거침없이 하고 있습니다. 남을 욕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일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본 모든 본문들은 성경이 어떻게 인간이 벌 받아 마땅한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핑계댈 수 있는 가능은 없습니다. 내 자식 하나 잘 되게 하기 위하여 남의 자식을 끌어내리는 일을 합니다. 우리가 돈주고 내 자식을 학교에 합격시키면 거기에 정당하게 들어갈 사람을 빼야 우리 아들을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우리 자식이 잘 되기 위하여 남과 함께 사는 일에 내 자식을 보낸 적이 없고 남이 가질 자리를 내 자식을 더 준비시켜서 뺏게 하는 것으로밖에 우리는 자식을 위할 줄도 모르고 자식을 위할 줄도 모릅니다.
같이 사는 법을 어떻게 서로가 서로의 사는 데 유익이 되기 위하여 양보해야 되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못합니다. 신자만이 합니다. 우린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하는 것을 구하는 자이고 저 자연인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일반인들은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들은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로마서에서 하는 이야기, 인간이란 일반적으로 어떤 존재냐,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냐 하는 말속에 항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에 항복되지 않으면 십자가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믿는 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할 구 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그 전에 있었던 이야기, 십자가가 없었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진노와 분노 속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존재였구나, 큰일날 뻔했구나가 확인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구원이 하나님의 저주라는 전제하에서 얻어진 것임을 알지 못하면 구원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구원이 그냥 돈 내고 얻은 극장표에 불과하다면 이제 재미있는 영화나 해라 하고는 영화가 재미없으면 전부 발을 구르며 돈 물어내라는 소리밖에 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을 만나서 물어보면 제일 당황하는 것이 무어냐 하면 여러분들이 확보하고 있는 이 구원이 취소될 수 없는 여러분의 영원스러운 나라에서의 지위가, 그 이후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복된 특권이요 허락된 운명이요 약속된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값없이 치고 예수 믿었는데도 그 다음에 하나님이 해 준 것이 하나도 없더라. 복권을 해도 당첨이 되는 것이 없고 급한 일이 있어서 택시를 잡으려고 기도를 골백번 해도 잡히지 않더라부터 시작해서 온갖 불평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인간이 직면한 참으로 참혹한 운명 앞에서 이제 삶의 길을 얻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을 얻어 이 은혜의 자리로 들어오게 됐지만 감사할 줄 모르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를 구별해 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특권들을 누리지 못하고 쓸 데 없는 것을 구하러 다닙니다.
여러분이 감사를 놓치지 마시고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실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어리석은 생각들이 우리 안에 본성으로 있고 옛 성품으로 남아 있는 것을 직시하셔서 참고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부름받았고 그 일이 가능한 사람으로, 하나님 자녀로 부름받은 것을 기뻐하시고 신자다운 길을 걷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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