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로마서 19강(롬 2:17-29), 율법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 /박영선목사

새벽지기1 2016. 2. 28. 09:21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 2:17-29)


지금 우리가 로마서 2장의 끝부분까지 왔지만 아직도 3:20에 이르도록 동일한 주제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인류 모두가 예외없이, 핑계댈 수 없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내용에 대해서 성경에 적절하고 날카롭고 도망갈 수 없는 만족한 논증을 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논할 때도 가장 많이 틀리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가 왜 복음이 필요하냐, 복음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있고 심판밖에 받을 것이 없다.


살아서도 죄와 범죄 속에 있으며 죽어도 영원한 형벌의 자리밖에 갈 수 없다 하는, 이 심각한 문제를 제대로 직시하지 않고서는 구원의 필요성도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도, 구원 얻은 것에 대한 감사도 다 틀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죄악 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처지에 대한 이해야말로 복음을 이해하는 아주 근본적이고 핵심되는 조건이고 복음의 절반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것은 이 중에 유대인들의 오해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가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고 있다는 것으로 자기네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구원얻은 자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의 상태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사도 바울의 공격을 제대로 추적해 보면 유대인인 우리는 선민이고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았다는 사고와 동일한 사고방식, 나는 인격자다, 나는 죄 지은 적이 없다, 나는 지식인이다, 나는 양심에 거스른 적이 없다라는 일에 대하여 동일한, 적절한 논증이 되어 인간 모두가 어떻게 핑계할 수 없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오해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어떻게 오해의 소지가 되어 아직까지도 많이 남아 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가장 큰 오해 중의 하나는 율법을 갖고 있고 할례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저들이 이미 구원들 얻은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롬 2:17-20)


여기까지는 좋다 이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너 자신은 가르치는 대로 왜 안 사느냐’ 이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싸움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오해는 율법을 가진 것이 이미 선생된 표라는 겁니다. 그러면 선생 된 표는 뭐냐 하면 나는 가르침을 받을 학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가졌다는 것은 나도 선생, 즉 학생이 아니라는 것이고 사도 바울의 지적은 가르치는 네가 가르치는 그 내용을 왜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롬2:25).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율법은 행하는 기준이고 규범이지 갖고 있어서 자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좋은 음식점과 나쁜 음식점의 차이 같습니다. 청결하다든가 친절하다든가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만 좋은 음식점의 첫번째 조건은 맛있어야 합니다. 나쁜 음식점의 첫번째 조건은 맛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의 오해는 무엇이냐 하면 메뉴도 멋지고 테이블도 멋지고 다 멋진데 이 음식점에 맛있는 음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입니까? 너희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다. 그런데 그 율법을 너희는 하나도 소화하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21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롬 2:21-22).


이 지적에 대하여 자신을 점검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들에 있어서 공통되고 근본적이고 누구나가 오해하는 하나의 자기 변명의 방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으로 인하여 지금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고 그 민족 전체가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 논리이고 예수를 믿고서 신앙생활하다가 실패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굉장히 심각한 싸움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싸움을 말하자면 너희가 율법을 갖고 있고 선생이라고 하면서 너희는 외 그대로 살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롬 2:23-24).


자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원리를 놓치지 마십시오. 유대인들은 자기네가 율법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선생이라고 생각했고 바울은 너희가 가르치는 것을 너희가 먼저 소화해 내지 않는 한 선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너희는 이미 구원의 선상에 이른 것이 아니라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는 것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증거가 무엇인지 봅시다. 에스겔서 36장으로 가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외국의 포로가 되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저들의 잘못을 지적받는 장면이고 회복을 약속받는 대목인데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서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중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케 하는 날에 성읍들에 사람이 거접되게 하며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인즉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무하게 보이던 그 황무한 땅이 장차 기경이 될지라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겔 36:18-36)


이 전체 내용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를 주고 율법을 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여 하나님의 벌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어 거룩하여져서 내 복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율법과 할례를 베푼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셔서 죄를 지은 자에게 복을 줄 수는 없습니다. 거룩하고 하나님과 화목하여야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율법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은 것으로 이미 복받은 것이라고 생각을 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놓고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범죄했을때도 벌하시는 분인데 율법을 주어 무엇이 죄고 무엇이 복받는 것인가를 알게 한 자가 죄 지었으니 심판이 더 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백성보다 더 엄한 벌을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나라에 포로가 되자 그 포로로 잡아간 나라가 생각하기를 이 민족이 믿는 신보다 우리가 믿는 신이 더 쎄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종일토록 이방인 중에서 모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욕을 왜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약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그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 앞에 그 율법을 기준으로 하여 심판받은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거꾸로 하나님이 모욕을 받아 버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모욕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자랑하는 율법으로 하나님이 모욕받게 되었다면 문제가 어디 있는가를 분명하게 집어 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자랑한 저들이 만들어 낸 결실이 하나님을 모독받게 한 일, 하나님께 저들이 율법을 받았는데 그 율법으로 매밖에 맞는 것이 없었다면 문제는 율법에 있는 것이냐 율법을 받은 자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자에게 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가졌으되 율법을 따라 행치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성경 구절도 19절에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하였다 이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대로 율법을 가졌느냐,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라 그것으로 어떻게 살았느냐로 저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어떻게 하시기로 했느냐 하면 너희가 나에게 범죄하여 내게 벌을 받고 쫓겨감으로 인해서 너희만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 내 이름도 더렵혔다. 나는 내 이름을 아껴서 내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야 말겠다. 그래서 포로 된 너희들을 다시 불러 황폐한 너희 성읍을 건설하게 하고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분명히 뭐라고 합니까? 32절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 때문이 아니다.” 너희를 위함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너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존심을 위해서다가 아니란 말입니다. 너희를 위함이 아니라는 것은 너희가 행한 것의 결과가 아니다란 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날카롭고 분명하게 초점을 지목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벌받음과 화목 속에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핵심, 구약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얼마나 무능하고 부패한 족속인가가 증명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보호 속에 있는 것은 저들이 보호받을 어떤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분위기 때문에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동시에 증명되는 것이며 구약성경 전체의 결론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유대인은 뭐라고 생각했습니까? 난 율법을 가졌다는 것으로 끝까지 고집을 부립니다. 나는 선생이다. 내가 율법을 가졌으니 내가 선생이다, 아니다, 너희도 학생이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말 1:6-9)


무척 재미있는 꾸중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은 가장 실한 것을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흠 없고 완전한 것, 양을 잡아도 첫 새끼, 가장 흠 없는 것으로 바칩니다. 그런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바칩니다. 그러니까 제사를 드렸다는 명목은 세우고 실제로는 바쳐도 아깝지 않은 것을 바쳤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행한 짓입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식으로 표현해 봅시다. 우리가 얼마나 악당이냐 하는 것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생활, 즉 부부생활이나 부모님과의 관계, 자식과의 관계에서 여러분이 만족하고 사시는 분이 있습니까? 왜 못하죠?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권리와 책임 중에서 책임을 앞세웁니다. 누구나 권리를 앞세우죠. 권리를 이야기할 때는 절대 기준을 세워서 권리를 요구하고 책임을 요구할 때는 언제나 상대적입니다.


저희 아이는 공부를 못하는 쪽입니다. 늘 성적이 나빠서 “야 이것이 뭐냐” 그러면 매일 누구를 대느냐 하면 자기보다 못한 아이 이름을 댑니다. 자기보다 잘 한 사람 이름을 댄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부전자전입니다. 어디서 배웠겠어요. 여러분이 그렇지 않습니까? 저희 아버님은 오래 전에 돌아 가셨고 어머님이 계시는데 제가 그 어머니 한 분을 제대로 못 모십니다.


참 어렵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늘 이렇게 불평을 하십니다. “야 네가 목사냐” 그럼 저는 무어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까? “어머님이 권사님이십니까?” 서로 불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어머님에게 권사님이란 이름으로 이것을 저에게 책임으로 돌리지 마시고 이 책임은 어머님이 가지십시오 하고, 어머님은 네가 목사니까 이 책임은 네가 가지라는 것입니다. 책임은 서로 발길질하고 권리는 서로 빼앗아가니까 이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에게 이야기할 때는 얼마나 잘 가르칩니까? 참 쉽죠.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제일 악질적인 말이 뭐냐하면 “이상해” 입니다.


“난 참 이상해” 그 이상하다는 말은 여기에서만 꼭 써야 됩니다. 쓸 수 있는 것은 이 경우뿐입니다. 한번은 영화관에 갔는데 영화가 시작되어 한창 진행이 되고 있는데 손님이 늦게 들어와서 자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번호를 확인하려고 서서 왔다갔다 하니까 안 보이게 됐습니다. 그래도 뭐라고 안 그러고 꾹 참고 있는데 뒤에 어떤 젊은 학생들이 않아 있다가 한 학생이 이렇게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옆에 있는 친구에게 “ 야 난 참 이상하다” 극장 안이 다 들리게 큰 소리로 “왜” 그러니까 “난 왜 앞에 사람이 서 있으면 화면이 안 보이냐”


이것은 ‘이상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웠다든가 부부 간에 갈등이 있다든가, 또 문제가 있다면 “ 어, 난 이상해” 그럴땐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난 이렇게 저렇게 하니까 척 해결이 되던데. 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우는 것이 이해가 안돼.” 그 속에는 ‘난 그 문제를 넉넉히 해결했어’가 숨어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잘해서 한 것입니다. 그 시어머니가 훌륭하거나 아니면 남편이 중간에서 별의별짓을 다해서 양쪽을 입막고 있는 것일겁니다. 그 노고에 대하여 아는 여자를 제가 아직 만난 적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난 ‘이상해’ 라고 생각하는 모든 이유가 뭡니까? 유대인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18장으로 가십시다. 예수님의 아주 무서운 질책이 여기 있읍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이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9-14)


유대인들의 가장 큰 약점이 뭡니까? 확신입니다. 어떤 확신입니까? 나는 의인이라는 확신입니다. 최소한의 무엇으로 나는 율법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나는 율법을 지킨다. 나는 금식하고 십일조를 지킨다 이겁니다. 저 세리들같이 떼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갈파하셨느냐 하면 산상설교 속에서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한 자라고 했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자라고 했습니다. 왜요? 살인은 결국 미움의 열매고 간음은 음욕의 열매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 중 열매 맺어진 것과 열매 맺지 않은 것은 별로 큰 차이가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간음을 열매 맺으면 우리는 음탕한 자요 살인을 열매 맺으면 우리는 미워함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는 악당입니다. 안한 것으로 나는 의인이라고 이야기한 것같이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그렇게 판단합니다. 남과 비교해서 판단합니다. 나는 저 세리와 다릅니다. 그러나 너보다 세리가 낫다고 합니다. 왜요? 도덕과 윤리와 종교성 속에서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최소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여기 나온 바리새인은 자기는 구원 얻을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이 지적하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를 믿으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가 처음에 저들과 논쟁의 서두부터 부딪히는 단어는 이것입니다.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왜 죄인인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살고 자기 치장을 위해서밖에 살지 못하는 자가 자기가 죄인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네들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깨끗이 산다는 말 앞에 우리가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낫다, 나는 이 실수는 안 한다. 나는 교만하지 않다. 나는 잘난 척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러분의 자랑이어서는 안 됩니다. 경건으로 가고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는 자리로 가야 됩니다. 우리의 세상적인 욕심과 탐욕, 거칠어진 마음들, 내가 서기 위하여 남을 잡아먹는 모든 방법에서 내가 180。 달라지는 모습으로 가야 됩니다. 그리고 그 요구 앞에 설 때마다 죄인인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스스로 이야기한 것같이 내가 매일 나를 채찍질하고 근신하며 노력하며 매일 죽노라 하고 고백했던 것들은 사실 우리 신자들이 매일매일 고백해야 되는 유일한 목표이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한 것이 없습니다. 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죽어 마땅하며 처벌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위치가 있고 구원 얻은 기쁨이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냐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리에는 십자가가 설 자리가 없고 자랑밖에 없습니다. 남을 향하여 이상하다는 비평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혹시 유대인이 아닙니까?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놓고 나는 저 사람과 다릅니다. 이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을 점검하십시오. 십자가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늘 잊지 마십시오. 늘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을 점검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를 점검하시고 나를 내 뜻대로 내어 버려 두지 마시고 주의 은혜와 생명과 진리로 붙잡아 달라는 기도가 끊이지 않아야 됩니다. 그것이 신자의 마땅한 고백이고 그 속에서만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원이 여러분에게 감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