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여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롬 2:12-16)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심판하실 때 그 행위대로 심판하신다 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임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행위대로 심판하신다 하는 것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율법을 알고 있었던 사람과 율법을 모르고 있었던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문제는 조금 더 확대를 하면 구원 문제에 있어서 복음을 들은 사람과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이 합당하냐 하는 문제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 12절 보시면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다고 되어 있는 구절을 보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가 잘못을 한 것이 율법이 기준이냐 혹은 14절에 나오는 것과 같이 본성, 양심을 기준으로 하느냐 하는 차이를 우리 마음에 느끼게 됩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하든, 양심을 기준으로 하든 그가 죄를 범했으면 죽는다 하는 이야기는 무엇을 지켰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율법 전체가 지향하고 잇는 것,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한 마음을 갖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 그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런 하나님의 관한 모든 것, 거룩한 것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본성적으로 갖고 있는 양심의 소리와 비교해 볼 때 그가 범죄했으면 동일한 심판을 받는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성경이 장황하게 하느냐 하면 아까 했던 질문의 확장 부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를 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문제를 연결해서 풀어 나가면 세종대왕은 구원을 얻었느냐 못 얻었느냐 그런 문제로 걸리게 됩니다. 세종대왕이 구원 얻을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우리가 생각할 땐 억울하단 말입니다. 그때는 누가 와서 예수를 전한 것도 아니고 이조시대이고 그 무렵에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았는데 모르고 잇는 것이 그의 잘못일 수가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어떤 이들은 대답하기를 양심을 기준으로 해서 그가 의롭게 살았으면 구원을 얻었을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근거 구절로 14절, 15절을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양심과 본성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구절들 로마서 1:18~ 3:20 에 이르는 이 전체 내용의 초점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자리에 있는가를 지적하는 대복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심판을 면할 수 잇는 가능성이 있는가를 논하고 있는 자 리입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구원에 관한 여러 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이 구절이 요구하고 있는 바가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율법을 가진 자와 율법을 가지지 아니한 자가 둘 다 동등한 심판을 가질 것이냐 하는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동등한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단 어떤 심판을 받느냐 율법을 가진 자가 받는 심판은 율법 없이 범죄한 자보다는 더 심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졌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어쨌던 좀더 나은 정의와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범죄는 더 크게 취급될 것이고 모르고 범죄한 자들은 그것보다는 덜하게 취급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부분인 것입니다.
초점은 이것입니다. 몰랐건 알았건 행한 것이 범죄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모르고 행한 죄라고 해서 그것을 그냥 묵과할 수는 없는 문제가 아니냐 하는, 여기가 초점입니다. 누가복음 12: 36 입니다.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눅 12:36- 37). 45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은 율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 또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 12:45-48).
이것은 공평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알고도 안 한 자는 더 많이 맞을 것이고 모르고 못했으면 잘했다고 그럽니다. 알고 틀린 사람은 많이 맞습니다. 그런데 모르고 틀린 사람은 몰랐으니까 봐준다, 모르고 절벽에서 떨어지면 안 죽고 알고 떨어지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지금 오늘 본문이 초점으로 삼고 있는 대목입니다.
유대인의 큰 실수는 바로 이 부분에서 율법을 자기네가 맡았다는 것, 하나님이 자기 민족에게 율법을 주었다는 것 때문에 자기는 구원 얻은 대상이라고 생각해 버린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나 사도 바울의 말씀은 율법을 준 것은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지키라는 것, 주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라는 것이지 그것을 맡은 것만으로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한 사람에게 물어 볼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가 범죄했느냐 안 했느냐 입니다. 그러면 율법 없는 자에게는 무엇이 범죄냐,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범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것이 범죄인데 몰라서 억울하지 않느냐 하지만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양심으로 유대인들에게 그것이 죄라는 것이 더 분명하게 주어졌고, 또한 율법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죄냐 하는 것이 더 분명히 주어졌고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최소한의 양심, 도덕이 있어서 자기네가 저지른 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에 비추어 깨끗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시고자 할 때 인간 중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변명하고 핑계하고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 심판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부분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2:2에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갖는 그 철저한 심판, 아무도 핑계댈 수 없는 심판을 여러분이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유대인식의 오해가 여러분에게도 없어야 됩니다. 이방인들은 몰랐다고 핑계를 댈 것이고 유대인들은 우리가 율법을 갖지 않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었다는 것은 저 이방인들과 우리를 구별한 것이고 그 구별했다는 것은 우리를 자기의 백성으로 삼았기 때문이며 율법을 갖고 있는 것은 구원 얻은 표라고 생각하는 것같이 어리석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아브라함을 부르는 사건들로부터 이미 그 깊은 뜻이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면서 이렇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내 이름을 창대케 하고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너를 축복하 자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
이렇게 대단한 약속을 주셨습니다만 그 복은 아브라함을 다른 사람과 구별해서 아브라함에게만 국한한 약속은 아닙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들이, 이름을 창대케 하고 너로 번성케 하고 너를 축복하는 자를 복주는 그 복은 왜 생겼느냐 하면 너는 복의 근원이 도리지라 하는 책임 때문입니다. 너로 인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복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왜 복을 받는가를 보고 다른 사람들도 복을 얻게 하려 하시며 아브라함은 그 자신이 복받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한 중개인으로 부름받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자신들만 선택됐다는 표로써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대하여 알고 지킴으로써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통해 전민족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거룩과 심판을 제대로 전파시키고자 유대인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자기네는 율법을 받았으니까 선택된 자라고 생각하고 율법을 행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다 무엇으로 심판을 받느냐 하면 행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 행한 대로가 무어냐 하면 지금 유대인을 보거나 이방인을 보거나 양쪽 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과 생명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까지 이르지 못한 모든 것, 행위로 나타난 그들의 악행을 따라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논할 때마다 가장 놀라는 것은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자기네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다른 민족과는 다른 편애를 받은 듯한 생각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누구를 심판한다고 그러면 지금 유대인들이 우리만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듯 우리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아닌 우리들이 심판받는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죄성입니다.
우리가 승리의 신, 행운의 신에게 빕니다. 도박을 할 때는 행운의 신에게 빌고 시합을 하거나 전쟁을 할 때는 승리의 신에게 빕니다. 승리의 신이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승리의 신은 보통 기독교적인 것 말고 승리의 여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행운의 신도 여자입니다. 인간들이 왜 승리의 신과 행운의 신을 여성화했겠습니까?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신과 행운의 신을 여성화하는 데는 그 승리와 행운을 주관하는 신이 힘을 가졌지만 공평치 않고 편벽된다는 인간의 사고방식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승리의 여신과 행운의 여신이 편벽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서 핑계를 신에게 돌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라스베가스에 가면 이런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헌금할 것을 전부 가지고 가서 이것이 당첨돼야 교회도 짓고 큰 일을 할텐데 액수가 너무 적어서 슬롯 머신에 넣었는데 다 털렸습니다. 이제 전화 걸 마지막 25센트 짜리 코인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돌아가려고 그러는데 천사가 나타나더니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 마지막 코인을 넣어라. 너에게 백만 배의 행운을 주겠다.” 그래서 25센트 짜리 코인을 넣고 했더니 꽝이예요.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돌아보더니 천사가 째려보면서 “뭐하고 있어 빨리 가지 않고.” 이러더라는 것입니다. 라스베가스 가면 유명한 일화인데 대부분 못 듣고 오는 이유는 영어가 짧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신이란 결국 인간의 소원을 끝까지 외면하는 존재라는 인간의 본성적인 신에 대한 거부감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제가 이야기한 이 대복은 안 기억하고 앞에 있는 이야기만 돌아가서 하시더라구요. 이 뒷부분을 이해하셔야 됩니다.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막연하게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끔가다 그 존재를 상상할 때도 신은 언제나 우리를 골리는 자, 우리의 뜻을 외면하는 자, 우리가 가장 진지하고 필사적일 때 우리를 노리개로 삼고 희롱하는 존재, 이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것이 로마서 1:18~ 3:26 에 이르는 동안의 사도 바울의 철저한 논증입니다. 이것이 왜 필요하냐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필요한지,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속는 것은 성경이 복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금상첨화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미 우리가 금상을 갖고 있는데 거기에 첨화하는 꽃을 얹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며 예수를 믿는 유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럭저럭은 살고 있는데 월수입 100만원인데 십일조를 내면 그것이 200만원을 보장하는, 이런 식의 개념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구원을 생각하고 기독교 신앙을 요구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뜻밖에도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앞세웁니다. 우리가 로마서 1:16에서 복음에 관한 정의를 이렇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해놓고서 당장 그 다음에 무엇으로 가느냐 하면 우리의 예상한 바와 같이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을 믿으면 이러저러한 복이 있다가 아니라 왜 복음이 필요한가? 왜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되느냐부터 따집니다. 구원, 이 구원을 얻으면, 이것만 하신다면 이러 저러한 좋은 일이 생깁니다가 아닙니다. 왜 이것이 필요하냐부터 말합니다. 복음의 내용의 절반은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갖지 못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베풀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큰 일 날뻔 했다. 우리는 다 죄인이었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다 하나님의 심판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하나도 예외가 없습니다.
로마서 3:1에 가시면 인간의 전인류를 정죄하는 이런 선언이 나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하나도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
전인류를 향한 성경의 불합격 판정입니다. 여기서 예외가 되는 인간은 역사상 아무도 없습니다. 유대인이건 누구건 인간이 스스로의 양심으로나 능력으로나 의자로나 무엇으로나 하나님 앞에 심판을 면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성경의 선언입니다. 우리 주변에 저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고 이야기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도덕성, 윤리성 속에서는 좀 나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남의 마음에 합하게 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한 존재였고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절반입니다. 그래서 모든 구원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원을 얻었을 때를 돌이켜 생각해 보시면, 물론 어려서부터 믿는 가정에서 자라셔서 극적인 상황이 없는 분들에게는 이 경험이 별로 없겠지만 중간에 믿으신 분들 혹은 중간에 다른 회개의 경험을 가지신 분들은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구원은 언제나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통속이 함께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구원을 얻었다는 기쁨과 내가 누구냐를 발견하는 회개의 통곡이 동시에 수반되지 않습니까? 내가 죄인이었다, 죽어도 싼 사람이었다, 이것이 확인되는 것이 언제나 구원에 수반되는 분명한 절반의 내용입니다. 내가 죄인이다.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 내가 하나님을 모르고 살고 있었다. 하나님을 모르고도 너무나 떳떳이 살고 있었다. 정말 지옥 가도 한마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자들이었다. 그 죄인인 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 그것이 언제나 구원에 쫓아 다니는, 분명히 구원받은 절반의 내용입니다.
심판에 관한 깨우침, 회개라는 것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구원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 부분이 현대로 올수록 너무나 약화되어 있어서 우리 모두는 구원에 관한 어떤 생각을 갖기 시작했느냐 하면 채권자 같은 생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 주고 이 비오는 날 교회에도 나와 주는데 그래 이 따위 것 하나도 안 들어 주신단 말이예요.’ 이따위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뭐 교회나와서 봉사라도 하나 하기 시작하면 성가대를 한다던가 교사를 한다던가 안내라도 한 번 하면 그 다음에 기고만장해지는 겁니다. 그 다음에 권리가 쌓이는 것같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누구였으며 구원을 얻은 것이 무엇인가가 제대로 감사되지 않는 한 사실은 아직도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요구를 하는 신자가 된다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에베소서 1:3 로 가시면 구원에 관한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3-6).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4절에 있는 바와 같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입니다. 그러니까 뒷집에서 이야기하면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거룩하지 않고 흠이 많은 존재였습니다. 구원은 이런 것입니다. 구원 얻지 못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도 합격점을 받을 자가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식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얻은 것이 감사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 전에 구원 얻기 전의 상태가 무엇이었느냐가 확인되지 않으면 우리가 지금 부름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이 부름받은 더 놓고 더 깊은 것으로 가는 것이 무엇으로 이어져야 하는가의 신앙관이 흔들립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주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의 우리의 요구는 우리의 욕심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의지하여 쾌락을 좇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데 반하여 신자란 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의 쾌락을 좇고 자기의 욕심을 태우는 그런 존재가 되기 십상입니다. 신자란 그렇게 않습니다. 그 전에 내가 누구였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심판 아래 있는 존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었으면 마땅히 달라져야 합니다. 무엇으로 달라져야 합니까? 거룩하다는 차원에서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사람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늘 우리의 존재가 확인되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성숙은 거룩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지 않은 것으로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기쁨은 깊어지는 거룩 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나아감도 거룩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이름으로, 기도라는 이름으로,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그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신앙을 점검하는 방법이 우리에게 얼마나 감사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좋은 학교에 들아 갔느냐, 여러분의 사업이 잘 되었느냐에 따라 왔다 갔다 하면 더 크고 거대한 것에 대한 감사를 놓쳤기 때문에 악세사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가장 큰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구원 얻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로마서 8:31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1-32).
모든 것과 그 아들과 어느 쪽이 무게가 더 무겁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아들과 모든 것은 동등합니까? 아들이 훨씬 무겁습니다. 왜냐하면 아들까지 주었는데 나머지 중에 아낄 것이 뭐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주었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그 이외의 어떤 것도 그 아들을 받은 것에 비하면 악세사리입니다. 이쪽이 본체고 무슨 방언을 한다든가 무슨 환상을 본다든가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한다든가 고속도로에서 차가 12바퀴 굴렀는데 말짱하다든가 이 모든 것은 악세사리입니다. 그것이 감사의 핵심을 차지하고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 여러분이 저주받을 자리로부터 옮겨와 있는 것, 이것이 감사의 최고이며 본체입니다. 이것이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앞에 것이 왜 약화됩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구원을 얻지 못했다면 어떤 위치에 있었느냐가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뭐라고 교모하게 핑계를 댑니까? 신이란 원래 변덕장이, 자기 기분대로 하는 분이라는 말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진노와 어떤 처절한 운명 앞에 있는 가를 스스로 감추고 외면하고 살아가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살아야 됩니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그 진노의 심판에서 벗어날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절반의 내용입니다. 그 절반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가 있고 그 다음에 구원의 감사라 있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 1:18~ 3:26 에 이르도록 긴 시간 동안 이 많은 장을 할애해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납득시키려 하고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며 그것이 왜 복음인가? 그것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할 뻔했는가? 율법을 갖고 있었다든가, 우린 몰랐다든가 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 그것으로 변명할 수 없는 처절한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가?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것을 아는가? 그렇다면 그 감사가 얼마나 커야 하는가? 우리가 얻은 바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이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감사가 마땅히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허락된 구원과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토록 효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신자로서 여러분이 얼마나 지혜롭게 사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여러분이 얻은 구원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사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을 제대로 인식하시고 감사하며 살 수 있어야 됩니다. 신자답게 살 수 있어야 됩니다. 이 남은 여생을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바와 같이 자기의 쾌락과 욕심을 위하여 살지 않아야 됩니다. 신실하게 신자답게 사는 것, 그리고 이 얻은 바 구원을 감사하며 거룩으로 요구받고 있는 신자의 삶을 충성되이 수행하는 것, 여기에 여러분의 기쁨과 자랑과 모든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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