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로마서 16강(롬 2:3-8),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 /박영선목사

새벽지기1 2016. 2. 22. 08:40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롬 2:3-8)


로마서 1:18부터 지금 읽은 본문까지 계속된 내용을 간추리면 이제 우리에게 분명해진 몇 가지  결과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죄상, 하나님의 자비하심, 그리고 언젠가는 분명히 있을 전우주적인 종말,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이제 주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궁극적으로 무엇이 다른가를 분간해 내고 믿는 자 자신이 내가 믿고 무엇이 달라졌는가, 또 불신자들은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에서 저들이 우리와 다른가 하는 것을 분명히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이것은 이 본문 중 4절과 5절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사상입니다.


여기 있는 바와 같이 회개한 자와 회개치 않은 자, 이렇게 나눌 수 있고 회개치 않은 자를 다른 말로 바꿔서 고집을 부리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신자 된 것이 도대체 그렇지 않은 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것을 여기 있는 단어들을 가지고 추적해 보면 뜻밖에 신자란 무엇인가? 불신자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아주 좋은 정의와 분별을 주고 있음을 만나게 됩니다. 이 회개라는 말의 원래 일차적 의미는 ‘다시 생각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본인의 생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1장에 가시면 이 문제에 대해 대표적인 사상을 전달하는 실례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마 21:28-32)


뉘우친다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첫째는 가겠다고 대답해 놓고 안 갔고 둘째는 안가겠다고 하고 갔습니다. 안 가겠다고 하는 데는 자기 나름대로 무슨 뜻이 있었겠죠. 그 시간에 놀아야 된다든가 다른 일을 해야 된다든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고 내 생각보다 아버지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좋다는 판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것을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한이 와서 구원의 도를 전할 때, 세리와 창기들은 믿었지만 너희는 종시 뉘우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뉘우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무엇과 연결되느냐 하면 마음을 바꾼다와 연결이 됩니다.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고 오늘 우리가 본문식으로나 이 예문과 연결해서 이야기하기 좋게 말한다면 돌이켜서 자시의 고집을 꺾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란 진리를 알게 됐고 그 알게 된 것으로 본인의 생각과 고집을 꺾은 사람들입니다. 대단한 지혜와 대단한 분별력을 지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으로 가시면 불신자들의 마음 상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고의로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을 받지 않고 그 받지 않은 여러 가지 마음 상태 중의 하나가 이것이 미련해 보이기 때문이라고 그럽니다. 미련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일반적으로 자연인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죄인 된 인류들을 놓고 볼 때 대표적인 속성은 자기의 생각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종 무슨 일을 해 보다가 잘 안되면 “비켜봐”해 가지고 꼭 자기가 해 봐야 “아, 안돼는 구나”하고 물러서는 것이 인간입니다. 무슨 열쇠를 여는데 열쇠가 안 열리면 “비켜봐” 그리고 늘어선 열 사람이 다 한 번씩 해보고 나야, “안되는구나” 그러지 남이 안되는 것 보고 정말 안되는구나 하고 물러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해 봐야 압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하여 무시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리냐, 무엇이 옳으냐를 안다고 할지라도 결정하지 않습니다. 훨씬 고집스럽습니다. 무지하고 미련하며 고집스럽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자기가 요구하는 것과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없는데 혹 생각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공평하고 변덕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필요할 때는 안 찾아오시고 필요없을 땐 찾아오시고 악당들한텐 잘 되게 내버려 두시고 여태껏 악당으로 살다가 어쩌다 한번 착하게 살려고 그러면 어려운 일을 주시는 분, 도대체 일하는 것이 일관성이 있거나 공정하지 않은신 분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흔히 이렇게 나타납니다. 왜 하나님은 일을 이런 식으로 하실까 신자라 할지라도 종종 느끼는 의문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실까? 가장 신앙적이고 우스운 질문 중의 하나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야 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십자가로 개 패듯 로마놈들을 다 패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지, 그러면 훨씬 더 잘 믿었을 텐데 죽고 나서 믿으라 하니 난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아마 예수님이 그 십자가로 로마인들을 다 두들겨 패고 했으면 또 이런 기독교는 싫다 틀림없이 그랬을 텐데 지금은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핑계를 그렇게 대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일을 그렇게 하실까 하는 말 속에는 적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고의이고 의도적인 신성모독입니다. 인간이 갖는, 인류라는 전체 인간이 갖는 가장 보편적인 생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와 신자의 싸움 혹은 신자가 된 다음에도 신앙이 굳어지는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문제가 성격에 관한 싸움입니다.


성경에 관한 싸움인데 조금 더 그것을 넓혀서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느냐, 천국이 있냐 없냐, 성경 말씀이 맞느냐 안 맞느냐, 그 말씀대로 살 것이냐 말 것이냐 이런 것들이 예수를 믿는 문제에서만 걸리는 것이 아니고 믿고 난 다음에 더 깊은 신앙으로 가는데 언제나 거침돌이 되는 하나의 문젯거리입니다. 신앙을 결심하고 싶은 사람들, 혹은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편적으로 말하는 질문 중의 하나가 하나님이 계시면 증거해 보라는 것입니다. 지옥이 어디 있냐, 천국이 어디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기록의 초점은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 지옥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설명과 논증이 없습니다. 성경을 그런 시각에서 보면 다 실족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해하기 좋게 예를 듭시다. 여러분이 뭔가 분명치 않은 병에 걸려서 병원에 다녀오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병원에 가면 이거라 저거라 그러고 저 병원에 가면 저거라 그러는 어려운 경우를 당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 한 분은 신경염이라는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경염이라는 것을 알아 내는데 1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유명한 의사들에게만 찾아 갔는데 어떤 분은 디스크다, 어떤 분은 중풍이다, 어떤 분은 뇌에 손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나중에 알아 낸 것이 신경에도 염증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신경염이라는 병으로 병상생활을 계속 하시다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말하자면 척추 신경에 장애를 받는 마비라는 진단을 내린 분이 다 의학계에서는 내노라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중에 신경염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거기서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의사들을 찾아갔고 이런 진찰들을 받을 때 이 사람은 맞은 것 같고 이 의사는 아닌 것 같다 하는 판단을 여러분들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무엇으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 생각에 이 의사는 신뢰할 만하다, 이 의사는 신뢰할 수 없다 할 때 자격증 봅시다, 면허증 봅시다, 이렇게 말합니까? 무엇으로 압니까? 그 사람이 집어내는 증상들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봅니다. 이 증세를 정확히 맞추어서 결론을 내면 이 사람은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의와 양의의 필요성을 저는 다 인정합니다만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때 한의사를 찾아갔을 때 신뢰감을 가지기가 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한의에게 가면 진찰이 애매합니다. 몸이 허해서 그래요. 이것은 굉장히 애매하단 말입니다. 정확한 증상에 대한 판단이 없이 그냥 애매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언젠가 한 번 하도 피곤해서 간염이 아닌가 싶어서 어느 병원에 찾아갔습니다. 의사와 개인적인 약속을 하고 만났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목사님.” “무척 피곤합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저도 그렇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왔습니다. 누구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참고 살라는 것이랑 똑같습니다. 그것은 말이 안 맞는 것이란 말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무엇으로 아느냐, 지옥이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아느냐, 그것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답은 없습니다. 선악과를 왜 만들었느냐에 대한 답도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에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 입니다. 그리고 모두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인간이 나를 배반하고 생명과 복의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때서부터 인간에게 부패가 있고 죄가 있고 타락이 있고 모든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 고통은 이것이것이다. 근친상간이 있으며 형제끼리 죽이는 일이 생겼습니다. 아무도 마음을 편히 먹고 살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죽고 만다.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못하며 아무리 하고 싶은 것을 해도 그것으로 마음을 위로받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왜냐하면 그 죄를 돈이나 건강이나 세상의 어떤 조건으로도 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무엇을 제시하고 있느냐 하면 우리가 걸린 병이 무어며 그 병이 왜 생겼으며 그 병이 죽을병이라는 것이 확실한데 그 증거가 무어냐가 너무나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죄악된 현상에 대한 정확한 분석, 정확한 지적 이것이 성경입니다.


그 유명한 미우라 아야코라는 사람이 자서전 식으로 쓴「빛은 여기에 길은 여기에」라는 3부작 책이 있습니다. 이 분이 예수를 믿게 되는 동기 중의 하나가 본인이 기독교에 대하여, 진리와 절대에 대하여 굉장히 혼란상태에 있다가 죽으려고 하고 허무주의에 휩싸이고 염세주의에 빠져 있다가 어느 날 한 번 성경을 보다가 우연히 본 것이 전도서였습니다. 전도서에 무어라고 나와 있느냐면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구절을 만나는 겁니다.


자기는 생각하기를 성경이라는 책은 무척 윤리적, 도덕적으로 고상한 사상을 전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거기에 자기가 품고 있는, 더 이상 절망할 수 없고 더 이상 허무할 수 없는 사람이 가졌던 생각보다 더 허무한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아니 성경이 이런 책이란 말인가 기독교인들이 철저히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얼싸 좋다 그러고 서로 부추키면서 사는, 약간 현실 도피적인 집단일줄 알았더니 이렇게 현실을 정확히 지적하는 내용들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보면 해 아래서 하는 수고가 모두 헛되도다 지혜로운 것이 무엇이 유익하냐 잘 살고 승리하고 명예를 얻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단 말이냐. 미련하게 살고 실패하고 절망한 사람의 죽음과 성공한 사람의 죽음이 무엇이 다르다는 말이냐 하는 데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성경이 기록된 초점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발견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야 이것이 인간이다, 맞다, 우린 정말 이꼴이구나 하는 것을 확인해야 되는데 어떤 꼴이 되어있느냐 하면 결핵 4기인 자가 의사한테 찾아와서 “이상하게 통증이 있고 몸이 나른한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 폐가 이렇게 엉망이 되어서 얼마 못 살게 되었습니다. 요양을 하시고 영양식을 하시고 이런저런 약을 먹으십시오. 그래야 치료가 됩니다.” 하는데 “아니 내가 꼭 그래야 된단 말입니까?” “당신 오후만 되면 미열이 있죠.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힘이 없죠.”, “맞습니다.”, “당신 이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환자가 하는 소리가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은 매일 피를 흘리고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데 어저께도 살아있고 오늘 나올 때도 살아 있었어요. 언제 죽는단 말이에요. 공연히 돈 벌려고 나에게 거짓말하는 거죠.” 그리고 간단 말입니다. 그러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는 것만 남은 것입니다. 이 싸움입니다.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희는 이런 중병에 걸렸다. 너희는 돌아와 고침받고 나에게 구원 얻지 못하면 너희는 죽고 만다. 죽는 것이란 우리가 말하는 이 세상에서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가고 만다. 영원한 형벌 속에 간다. 돌아오라. 돌아와라 합니다. 그런데도 악당으로 살고 있는 저 사람들도 아직 잘 살고, 잘 먹고 있는데, 허리가 48인치인데 아직도 살고 있는데 내가 왜 믿어야 됩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과 방불합니다. 이것이 지금 성경이 이야기하는 초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성경 속에 있는 기록에 가장 중요한 초점과 방식에 대하여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결국 이 말에 대하여 귀를 가리우는 자란 말입니다. 고집을 부리고 이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고집을 부리고 성경을 일단 안 들으려고 합니다. 결국 조금 전의 환자와 같이 다들 그러고 잘 살고 있는데 왜 나만요 하고 거부하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런데 여기 고집이라는 말은 그 굳어진 마음이란 뜻입니다. 에베소서 4장으로 가 보십시다. 여기 아주 적절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 4:17-19).


불신자 일반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총명이 어두워져서 무지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모르고 말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게다가 혹 깨닫는 마음이 있어도, 무엇이 옳은지를 알아도 마음이 굳어집니다. 옳은 것을 알아도 마음을 굳게 하고 거스려서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신앙생활 속에서 신자라 하더라도 병이 무어냐 하면 왜 나만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병입니다.


아니 물론 내가 그때 잘못했지. 그러나 당신 같으면 그때 그럴 수 있겠어, 이것이 우리가 하는 일반적인 변명 아닙니까? 당신 그 일을 참을 수 있겠어? 자식이 매를 맞고 있는데 옳고 그런 것은 그만두고 자식이 맞는 것 보고 가만히 있을 부모가 어디 있어? 말이 안 됩니다.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죠. 죽을 짓을 했으면 죽어야 되고 그러나 옳고 그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라면 그러면 참을 수 있겠어?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모두가 안 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옳고 그른 것을 무시하려는 배짱이 인간 모두에게 있는 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증거가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하루를 살면서도 이 말을 제일 많이 하죠. 아니 그것을 어떻게 참어. 그걸 보고 가만 있어. 아니 그럼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야. 이런 말들을 다 옳고 그른 것을 떠나 죄스러운 일을  할 때 많은 동조자의 편을 들어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굳어진다는 말이 고집을 부립니다. 정확히 말해서 예를 들면 태양빛이 작렬할 때 그 밑에 버터를 갖다 놓으면 녹습니다. 그러나 거기 진흙을 뭉쳐서 같다 놓으면 녹지 않고 굳어집니다. 진흙이 햇볕 아래서 굳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이 무엇인가, 무엇이 진리인가를 증거하면 깨닫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무엇인가가 나타나면 마음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낸 인간의 결정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녹고 회개하고 한 것이 아니라 그를 몰아 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지지고 볶고 사는 인생들이 사는 어떤 마을에 아주 좋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도 가정을 잘 돌보고 부인도 정숙하고 아주 모범적인 가정이 이사를 왔습니다. 그러자 마을 전체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남편들은 하나 같이 아내를 꾸짖을 때마다 누구네 집 아내를 보라고 하고 부인들은 전부 남편한테 바락바락 악을 쓸 때마다 그 집 남편을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모든 마을이 회개하고 좋아진 것이 아니라 마을 회의를 열어서 그 부부를 쫓아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누가 정당하게 검소하게 사는 사람을 내버려 둡니까? 안 내버려둡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에 내버려둔 고질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이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무엇이냐 그럴 때 불신자는 끊임없이 내가 틀린 것이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 책임이야.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죄를 만들었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환경을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이요 나에게 너무나 억울한 일을 많이 베풀었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신자는 무엇이 다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이렇게 된 것은 전부 제 책임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입니다. 무엇에 놀라게 되느냐 하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어떻게 그렇게 사랑하십니까? 이 결론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그러실 수 있습니까? 인간 중에 우리가 괜찮은 인간을 만나도 깜짝깜짝 놀라는데 비교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인간, 그리고 노골적으로 ‘야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나님을 믿으려면 내 주먹을 믿어라’를 놔두는 하나님, 그리고 그 사람마저 가능하면 회개케 하여 구원을 얻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이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악인과 선인에게 비를 주시는 하나님, 햇볕을 주시는 하나님, 악당이 잘 사시는 것을 보면 좀 약오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얘야, 미운 자식에게 떡 하나 더 준단다. 나중에 어차피 지옥갈 것 같은데 살아있을 동안이라도 잘 먹고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께 항복하고 싶으시지 않습니까? 마땅히 하나님, 제가 항복합니다. 하나님은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게 합당하십니다. 그 결론에 동의하십니까? 여기가 아멘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떤 악한 일과 어떤 더러운 일이 세상에 생겨도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시며 하나님이 저것은 불쌍히 여기고 계십니다.


죄를 못 보시는 하나님이 참고 계시는데 내가 왜 먼저 정죄를 하느냐는, 이것이 신자의 변화입니다. 세상의 꼴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신자가 빼앗겨서는 안 되는 시각이요 신자 된 자랑이요 신자 된 상입니다. 이 복과 이 시각과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하여 감사하는, 그래서 동참하여 인내하는,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