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물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롬 2 : 1 ~ 11)
복음의 필요성을 천국을 간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라고 하는 적극적인 이해 국면과 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 우리가 마땅히 벌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죄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로마서를 공부해 오면서 지금 확인하는 중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 슬픔 많고 고통이 있고 악이 판을 치는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나라에 가는 소망이요 복된 약속이요 영광 된 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구원을 얻지 못했을 때 본전치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지 못하면 큰일나는 인간의 현재 상태를 고발하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가 구원을 얻지 못했을 때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라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측면에서도 구원은 시급한 문제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알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을 알고 모르는 지식의 문제를 더 지나서 알아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의지적이고 적극적이고 그리고 감정까지 내포된, 하나님을 거스리는 행위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아오고 있습니다.
사람이 지성을 가지고서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를 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를 변호하고 합리화하는 데 써 먹으면 써 먹었지 진리를 혹은 생명을, 영혼과 사실을 알아가는 데는 절대 쓰지 않는다 하는 것이 1 : 32절에 있는, 그리고 앞에서 생각했던 가장 핵심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2 : 1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그래서 잘못보면 이 문제가 옳고 그른 문제를 그의 의지를 동원하여 실천하느냐 못하느냐의 싸움처럼도 보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으로 진리와 거룩과 생명을 위하여 쓰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자기 합리화하고 자기를 핑계하는데 씁니다.
그러나 나는 옳고 그른 것을 옳은 것을 위하여 쓰고 진리를 위하여 쓴다 그러면 옳은 것이냐? 그러면 다 된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죄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이 문제에서 좀더 깊이 이해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알고 모르는 문제 그 이상의 문제가 죄의 문제며 인간은 실천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의지력의 문제를 떠나서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어떤 심각한 지경에 빠져 있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알게 하고 싶어하는 복음과 연결된 인간의 현실이요 사실인 것을 직시하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란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원을 얻은 신자는 그 신자 된 것을 무엇으로 근거 삼는가? 무엇으로 그 내용을 삼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자란 물론 예수를 믿는 자요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히브리서 11 : 6로 가십시다. 믿음에 대한 가장 압축된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 : 6).
무엇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그 하나님이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신 것, 주권자이신 것을 믿어야 한다구요. 이것은 이해한다는 차원 이상이지 이해하고 납득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을 어떤 선택을 했다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조금 더 분명한 성경을 찾읍시다. 로마서 10 : 9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 9 ~ 10).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다, 그것은 하나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요식적인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 시인하려면 자기가 시인하는 것에 대하여 이해했고 이미 납득했고 그리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어떤 것이 이미 전제된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자기가 믿는 것에 대하여 어떤 분명한 확신이 있을 때에야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네 마음으로 믿고 네 입으로 시인해라. 이것을 성경에 있는 조금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며 우리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 이상으로 그분이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내가 죄인 되었다는 것을 납득하고 인정하고 그래서 그 진리와 성경의 요구를 내가 영접한, 선택한 내용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표현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모든 구원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이해한 것이고 선택한 것이라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생깁니다. 구원의 내용을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내용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지 말고 그것을 사건으로서 한번 설명해보자 이겁니다. 우리의 구원을 받았다, 예수를 믿었다 하는 것을 내용으로가 아니라 이것이 꼭 그렇게 두 개로 나룰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건적으로 봅시다. 에베소서 2 : 1부터 봅시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고 다 그 가운대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 1 ~9).
이 내용은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이라는 것이 내 행위의 결과라는 것입니까? 후자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를 살렸다. 너희가 믿어서 구원을 베풀었다가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너희를 살려냈다라고 합니다. 죽은 자. 죽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체가 아닙니까? 그러면 살아나기 위한 어떤 행위도 열심도 생각도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시체는 아무런 행위나 조건을 시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120% 수동적입니다.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4절입니다. “긍훌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이것이 조건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너희가 얻은 것 아니다. 너희가 만든 것 아니다.’ 8절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한다. 자기가 얻은 것,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 여기에 바로 구원 문제에 관해 우리가 좀더 깊이 이해해야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을 왜 자꾸 나누어서 생각하고 무엇 때문에 깊이 생각하여 하느냐 하면 우리가 ‘믿는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는다는 것을 알고 선택했다, 알고 결정했다라고 자꾸 생각합니다. ‘믿는다’라는 이야기의 가장 핵심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은혜와 사랑으로 그의 자녀를 삼아 그를 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죽었던 우리를 살렸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만들었다. 믿게 되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라는 표현을 좀더 확실히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 : 5 ~ 6).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저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이제 고린도 교회에 있는 사람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무엇을 전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우리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것을 알게 되었느냐, 자기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를 제대로 이해해야 상대방을 믿게 만들 것 아닙니까? 6절에 있는 바와 같이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창세기의 첫 번째 사건입니다. 빛이 있어라 하면 빛에 생긴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작업입니다.
마치 그와 똑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우리가 어떻게 죄인이고 벌받아 마땅한데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는 것을 마치 아무것도 없는 데서 빛을 만드시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만들어 내셔서 내가 예수를 믿게 됐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설명을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인간들이 갖고 있는 과학적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십시다. 전문적인 용어로 이야기할 때 구원이라는 것은 이런 식으로 옵니다. 일단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게 하셔야 우리가 믿든지 말든지 할 것입니다. 그것을 계시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셔야 하고 십자가를 알리셔야 되고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게 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일반적인 감각기관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수학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과학적인 실험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생활의 경험 속에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월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과 생명과 경험의 범주를 벗어난 범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 주셔야 됩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알려주신 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감각시켜도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며 자연과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인식을 못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 사람은 무엇이든지 합리적이지 않으면 인식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 기능은 이성인데 그 이성은 합리적이지 않으면 인식을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성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할게 하시는 작업을 하십니다.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 때문에 오신 것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해한 그것, 이해하게 한 능력을 이성 혹은 지성이라고 합시다. 그럴 때 알아서 달갑기 때문에 선택을 했다. 결정을 했다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을 여러분이 교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즉 이성과 지성이 진리를 이해한다고 해서 이성과 지성이 진리를 선택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내게 예수가 누구신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 주어서, 즉 계시라는 것이 진리에 대한 정보요 영원과 생명을 나열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선택한 것은 내 실력이라고 선택한 만큼 복음과 인간의 죄인 된 것을 오해하는 것은 없다는 그것입니다. 깨우친 것과 선택하는 것은 다릅니다. 오히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깨닫고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했기 때문에, 중생시켰기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분리하려고 하는 것은 이성과 지성이 갖는 위치입니다. 이해를 하는 것과 분별을 하는 것과 선택을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분리해 내야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게되고 구원이 십자가로 말미암았는지를 알게 되고 여러분이 인간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 : 6 ~ 10)
우리는 십자가를 알고 영원을 알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지옥이 있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우리가 알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럼 우린 그 다음에 무슨 오해를 하느냐 하면 그래서 나는 예수를 믿기로 했고, 나는 하나님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2 : 1부터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악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 : 1 ~ 5).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그 마음속에 걱정하고 조심한 것이 무어냐 하면 이것을 말로 설명하고 그래서 상대방이 설득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려는 것을 제일 조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핵심은 무어냐 하면 말의 지혜로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은 설득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해서 항복을 시키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설명해서 항복을 시키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나옵니까? 내가 너희 중에서 무엇만 알기로 했느냐 하면 이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려 갈 때는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하였다는 여기가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가 믿고 있는 구원에 관한 진리 말씀을 저들에게 전할 때에 그가 노력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설명해서 상대방이 이해하고 설득당해서 선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게 한 것 같이 전에 고린도후서 4장에서 본 바와 같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하나님의 창조사역, 그런 능력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이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는 하나님의 사역이 이 전도의 사역에 합세하지 않는 한, 아무 영혼도 예수를 믿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단 말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란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사람들이 그를 거부한 것 아닙니까? 빛이 왔으되 빛을 미워하고 어두움으로 다 도망간 것이 십자가 아닙니까? 우리가 누구인가를 밝혀주자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를 못 박아 죽인, 그래서 없애 버린 것이 십자가 사건이 담은 최대의 메시지 아닙니까? 인간은 옳고 그른 것으로 그가 자신을 콘트롤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자신을 움직이더란 말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옳고 그른 것을 알면 그 아는 것이 힘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아는 것은 힘이 아니고 그를 움직이고 그를 결정하는 것은 따로 있고 아는 것은 언제나 자기 변명할 때만 쓰이는 악세사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갔을 때 거기 있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전도할 때 애를 썼다는 말입니다. 설득과 항복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해와 결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 1 : 13 ~16).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셔서’ 나는 구원을 얻었고 사도도됐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나타내셨다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우리를 움직이는 어떤 성향과 그 속에 있는 어떤 것을 고쳐 놓은 작업을 말합니다.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 사도 바울의 회심 장면을 연상해 보십시오. 바울이 사도 되기 전에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때에 그는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예수 믿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스데반을 그가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핍박을 피해서 다메섹으로 도망간 자들을 다 잡아다 죽이려고 잡은 자들을 처형할 권리를 증서로 가지고 살기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고 있는데 가는 중간에 주를 만납니다. 큰 빛과 음성 앞에 그가 꺼꾸러집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느냐 하면 바울이 바울 된 것이 그의 노력이나 요구나 무슨 간구나 희망에 의해서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그는 정반대 길을 가고 있었고 주를 믿는 자들을 방해하기 위하여 또 주를 방해하기 위하여 가고 있었고 주님은 사고 바울을 고쳐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그를 납득시키고 붙잡아 앉히고 설명하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서로 꽝하고 충돌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넘어지자 그 빛 속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까’거기서 고쳐집니다.
바울 쪽에서의 조건도 요구도 기대도 욕심도 없이 주께서 오셔서 그의 마음에 있었던 주를 반대하는 마음을 뽑아 버리시고 주를 좋아하는 마음을 새로 넣는 작업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분명히 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옳고 그른 것으로 자신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성이나 이성이나 상식이나 교양이나 분별력으로써 자신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는 것으로 자신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좀더 복잡한 존재입니다. 지성이나 감정이 그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수인에 불과하고 보다 본질적인 어떤 것이 그를 움직입니다. 이것이 무어냐 하는 것입니다. 그를 움직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답은 죄입니다. 죄가 그를 움직입니다. 그 죄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속성이 있고 그 죄는 하나님을 반대하게 인간을 부추기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욕심대로 살고 자기 영광을 구하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거나 순종하지 못하게 하며 생명과 진리인 줄 알아도 그것을 순종치 못하게 하는 어떤 고집스런 성격입니다. 경향입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막을 수 없는 하나의 움직이고, 결정하고, 실행해 가는, 사람들이 갖는 어떤 말릴 수 없는 성질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 : 39 ~ 44).
여러분은 누구의 영광을 구합니까? 자기 영광만을 구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중에서 가장 큰 대조는 무어냐 하면 예수님께서도 진리를 이야기하고 바리새인들도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도 의를 이야기하고 바리새인들도 의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왜 서로 원수입니까? 의와 진리가 예수님 쪽에서는 하나님께로 가는데 바리새인들에게는 자기 주장과 자기 영광으로 가서 경계와 파멸로 가기 때문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옳고 그른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무엇을 하느냐 하면 자기 치장을 하고 정죄하는 데 씁니다. 남을 정죄해서 내가 얼마나 너보다 옳으냐를 명하지, 그 옳은 것을 실제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옳은 것의 궁극적인 목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며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고 회개하고 무릎 꿇는 자리로 가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옳은 것, 내가 아는 계명으로 그렇지 않은 자들을 욕하고 정죄하고 처단하는 일들은 있어도 자기의 생명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진리를 생명으로 보내며 하나님 앞에 자기를 무릎 꿇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옳고 그른 것이 자기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바른 것은 다른 하나의 기능입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나를 어디로 끌고가는가를 보면서 다른 것이 내속에 있다는 것을 직시하셔야 됩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가시면 같은 싸움을 바리새인들과 같이 이렇게 합니다. 지난 번에도 인용했던 내용입니다만 요한복음 8 : 37을 봅시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나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 8 : 37).
주님의 말씀이 바리새인들의 마음 속에는 들어갈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귀머거리라는 뜻도 아니며 특별히 그 말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지성이라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 말을 선택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 말에 항복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 : 40).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요 8 : 43).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 : 47).
듣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말 그대로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귀를 막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 말을 듣고 항복하지 않고 그 말에 공감하지 않고 그 말에 대해 반대 모습을 취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다른 무엇, 그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 가면 이 부분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기록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이 뭐냐, 죄인이 뭐냐, 자연인인 인간을 움직이는 죄가 인간을 어떻게 움직이냐 하는데 대하여 사도 바울이 기록한 이 말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 : 15 ~ 24).
이것은 여러분이 다 경험해 보신 일일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 줄 알지만 여러분이 그것을 시행치 못했던 뼈아픈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남이 그 잘못을 했어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수 있느냐 그래 놓고 나중에 자기가 그 경우를 당하면 자기도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 명분이 있을 때는 좋은데 그것이 명분에 맞지 않고 욕심을 따라 행할 때는 “인생이 그렇지 않아. 현실이 그렇지 않아”이렇게 우리가 우리를 얼마나 많이 핑계 대고 합리화시킵니까?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틀린 것인지를 알면서도 얼마나 열심입니까?
어떤 대학에서 동굴탐사를 나갔는데 지하동굴 탐사가 유행이랍니다. 남녀 학생들이 지도교수와 함께 갔는데 지하동굴에 들어가 보니까 갈래 길도 많고 해서 편을 짜서 여기저기로 나누다가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한조가 되어서 서로 같이 가게 된 것입니다. 기회는 이때다 하고 남학생이 여학생을 덥석 껴않았답니다. 입을 맞출려고 했대요. 안 돼요 돼요 돼요…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 늘 이 동굴의 울림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분명히 안 돼요 안 돼요 돼요 돼요… 언제나 이렇지 않습니까?
명분상으론 안 됩니다. 안 돼죠. 그렇게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이것만은 절대로 안된다고 하고 여태까지 지킨 것이 하나라도 있는지 보십시오. 거의 없습니다. 지키기 어렵습니다. 참 지키기 어렵습니다. 나는 저런 식으로 살지 않겠다. 저렇게 치사하게 안 살겠다는 것 때문에, 무엇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를 걸면서 나는 정당하게 살리라, 나는 깨끗하게 살리라 하고 약속을 합니다. 확인을 하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일이 나의 문제로 닥치면 우리 중에 아무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지성, 지식, 상식으로 자기를 움직이지 않고 무지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아는 것을 행할 힘이 없는 우리가 죄의 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성경이 복음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꼭 알리고 싶어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 예수 믿으면 지옥 가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가장 핵심 되고 본질적인 내용이지만 그것만으로 이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죄의 종이었다 하는 부분이 여러분에게 이해되셔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 : 6 ~ 11). 구원을 설명하는 국면이 무어냐 하면 죄의 종이었는데 구원을 얻은 이후로는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자신을 드릴자유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성령이 우리를 주장하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오해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것을 벗어날 자유가 없습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이제 여러분의 신자 된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면 여러분이 더 착해지고 의롭고 정직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일날 예배 보지 않고 가끔 어디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고 난 다음에 무엇이 다르냐 하면 그런 것들이 마음에 걸리죠. 어느 때까지 그것이 안 없어지느냐 하면 회개하고 돌아와서 여기와서 졸다 가는 한이 있어도, 와야 풀린단 말입니다. 무척 다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것을 하고 싶어도 그것을 할 수가 없고 선한 일을 한 것이 뭐가 진 것 같고 손해를 본 것 같고 나만 바보가 된 것 같은 것입니다. 선을 행한 것이 악을 행하고 나야 본 때를 보인 것 같고 오늘 할 일의 유종의 미를 거둔 것 같은 것입니다.
내 존재가 확실하게 드러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서는 그러면 싫은 거예요. 가끔 가다가 옛날 성품이 나와 해대기도 하지만 그러고 나면 찜찜하고 가서 내가 잘못했다고 그래야 유종의 미를 거둔 것 같고 마음이 편합니다. 여러분이 경청하시는 신자 된 가장 뚜렷하고 가장 자랑스러운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죄의 종이 된 것과, 우리가 성령님이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시는 성전이 된 것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재가 된 것을, 구별을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라고 해서 지금 아는 대로 다 행하진 못합니다. 힘이 없어선지 아직 그럴 실력이 없어서인지 본성은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되고 가장 달라질 것입니다. 특권이고 책임입니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인가를 이 시점에서 확실히 구별해 내지 못하면 여러분은 쓸데없는 요구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의의 병기가 되었고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5 : 8 이하의 말씀으로 결론을 삼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 : 8).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의 종으로 살 때는 너희들이 얼마나 더러우며 얼마나 부끄럽게 살며 그들이 어떻게 생명과 진리를 스스로 거부하여 파멸의 길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두움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주 안에서 빛입니다. 이젠 압니다. 이제 우리가 할 것은 아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하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라.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직시 하십시오. 죄에 의해 사로 잡혀서 종노릇하는 인생이 무엇인지 직시하시고 그것을 부러워하며 시험받지 마십시오. 빛의 자녀처럼 행하십시오. 의와 거룩으로 부름받은 여러분의 신자된 특권들을 자랑하시고 세상과 비교해서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점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빛과 생명 안에서, 진리와 거룩 안에서 영광된 소망을 내다보면서 승리하시고 감사하시고 열매 맺는 신자의 삶을 영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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