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로마서 12강(롬 1:32-2:1), 지금 내리는 진노(2) 박영선목사

새벽지기1 2016. 2. 16. 12:20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롬 1:32-2:1)


오늘 우리가 생각할 말씀은 여태껏 보아온 말씀과 같이 복음의 핵심과 그 복음이 필요한 인간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직시해야 되는 것은 신앙의 핵심 되는 것은 내용과 가치가 아닙니다. 교훈적인 가치나 윤리적인 가치, 그 진리의 어떤 수준 이런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의 최고의 가치가 사실이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하여 형벌 아래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이 성경이 지적하고 강조하고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모든 것의 최고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성경 말씀과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 동의를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은 사실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무어냐 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고 그리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리고 살아 나셔서 지금 우리 편을 들고 계신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었고 그 핵심은 그대로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의 죄인 된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 속에 이미 기초로 깔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럼 왜 이 복음을 받아야만 되는가? 그럼 왜 이 복음을 믿어야만 되는가? 우리가 믿지 않으면 우리는 다 형벌 아래 있고 처참한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하여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1:18에 있었던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범죄한 행위와 범죄한 존재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적으로 이미 주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임하고 있는 벌이라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나타났느냐, 주를 믿지 안는 자들이 어떻게 벌을 받고 있느냐, 자기 욕심을 따라 살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허망하게 살도록 내버려져 있는 데서 발견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더러움 속에 박혀 있고 죽을 줄 모르고 헛된 것을 구하며 헛되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 주변 어느 곳에서나  살펴볼 수 있고 그 일들이야말로 벌을 받고 있는 가장 뚜렷한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더 중요한 문제는 벌받고 있는 인간들, 그들이 자행하고 있는 죄들의 가장 초점이 되는 것, 핵심이 되는 것은 무엇이냐 그럴 때 그것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것을 성경이 지적하고 있고,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가장 핵심 되는 것과 불신자들의 가장 핵심 되는 잘못을 동시에 정확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32절, 본문에 있는 바와 같이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알고 있는 데 잘못을 행합니다. 2:1에는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하니라.” 이것이 이제 중요한 하나의 문제가 됩니다. 이 핑계치 못한다는 말은 이미 1:20에 보시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하는 이야기가 앞에서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확인을 합시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섬기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다. 그 벌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자기의 욕심대로 살게 내버려 두는 벌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지한 것이고 헛된 것이고 미련한 것이고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벌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더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더럽고 헛된 것일 뿐만 아니라 죄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무엇이 옳은지를 알고도 거스르는 반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는 자들은 잘못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려서 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벌을 받은 결과가 무어냐 하면 의롭게 살지 못하고 옳게 살지 못하고 아름답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럽게 살아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거역해서 더려워지고 있다는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같이 일반적인 종교심을 가지고 여러분이 거룩하게 살면 복을 받고 더럽게 살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면 거룩하고 아름다워지고 하나님을 배반하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그 더러워지는 것이 벌받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지금 성경의 지적입니다. 그래서 이 핑계치 못한다, 알면서도 반항하고 있다하는 부분을 여러분이 직시하셔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삶의 분명한 정체를 확인하시고 여러분의 신앙도 이 시점에서 차이가 나야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1:32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행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항하고 자기뜻대로 사는 자들을 옳다고 합니다. 그 앞에 있는 것들, 우매하고 배약하고 무정하고 무자비한 일을 하는 자들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우리는 확인해야 됩니다.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전에 학교에서 배운 바와 같이 앎은 행함의 시작이요 행함은 앎의 완성이라, 맞습니까? 앎은 행함의 시작이요 행함은 앎의 완성입니다. 말하자면 한 사람이 안다는 것은 어떤 정보를 입력하고 있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치있는 것이고 옳다면 그것을 행해야 그 사람이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행하는 것은 자기입니다. 그런데 알면서 행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 옳은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 속에 무엇이 끼어 있느냐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이하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곳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 8:34-44).


바리새인을 자꾸 예수님이 공격합니다. 너희는 가짜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가짜가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겁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왜 아브라함같이 살지 않느냐.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입니다. 무어라 그럽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뭐 좀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또 왜 나를 배척하느냐 배척하는 것을 보면 너희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다. 펄쩍 뛸 일입니다. 여기가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통틀어서 마귀들은 하나님을 압니까? 모릅니다? 진리를 압니까? 모릅니까? 압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줄 알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압니다. 사탄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어떻게 시험했느냐 하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렇게 하지 않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것을 해 봐라. 아들인 것을 시비걸지 않습니다. 아들이라는 것을 걸어서 다른 짓을 하게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놓고 공격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지점입니다. 사탄과 그의 졸개들 마귀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아는 것을 자기의 욕심으로 덮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거기에 있는 어떤 귀신들인 자를 만납니다. 너무나 귀신이 많이 들려서 귀신의 이름을 댈 수가  없어서 군대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때 떼로 들어 있는 귀신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무어라고 그럽니까? 주여 어찌하여 때가 이르기 전에 저희들을 괴롭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의 높은 자이심을 압니다. 알아요. 알지만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 사탄이란 거스른다는 뜻입니다. 대적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탄은 그런 의미에서 고유 명사가 아닙니다. 별명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는 말씀을 잘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옳고 그른 것이 개인적인 욕심에 삼키워진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알면서 무엇을 자기의 욕심으로 삼고 무엇을 거기서 선택하는 가를 보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보통 보면 옳고 그르다는 것은 다 무엇에만 사용하느냐 하면 남을 평할 때만 사용합니다. 그것을 자기에다가 적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불평할 때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무엇을 지적합니까? 저들의 불공정함, 불공평함, 철면피한 것, 교활한 것, 음흉한 것, 거짓된 것, 이중적인 것 이런 것들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것으로는 쓰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자기의 이익에 걸어 가지고 자기의 보호를 위해 많이 썼는지 아십니까? 자기의 합리화를 위해서 자기 변명을 위해서 옳고 그른 것을 쓰지, 진리를 진리 되게 하기 위하여 나의 욕심을 그 앞에 포기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있습니다. 분명히 나누어서 이야기합시다.


저는 테니스를 가끔 칩니다. 코트에 나가서 테니스를 치다가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테니스라는 게임에서 아마츄어 게임은 전부 복식을 하게 되고 4명이 합니다. 단식은 너무 격렬해서 웬만한 체력으로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 넷이서 실력이 비슷해야 제일 재미있습니다. 그럼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못치는 사람 셋이서 한명이 모자라서 게임을 못하고 놀고 있어도 잘치는 사람 둘이 와서 그 한 사람을 끼워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셋이서 그저 어쩔줄을 모르고 있는데도 그 둘이서 기어코 기다리고 있다가 실력이 비슷한 두 사람이 와서 넷이 되면 이 세 사람을 몰아내고 그 넷이서 칩니다. 그래서 처음 테니스를 배우는 사람이 어떤 시험을 받느냐 하면 저들은 인간도 아니다하는 시험을 받습니다.


처음에 테니스를 치면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못치는 사람 둘이서 계속 연습을 하고 있어도, 안에서 잘치느 사람 셋이 한 명이 모자라서 게임을 못하고 있으면서도 와서 같이 합쳐서 쳐주질 않습니다. 지쳐서 들어가면 셋이서 전화해 가지고 출장간 사람 불러서 네 명을 맞추어서 칩니다. 그래서 다 앙심을 먹게 됩니다. 두고 보자, 너희들이 그럴 수 있느냐, 내가 잘 치면 나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그래서 어지간한 사람은 탈락하고 앙심을 품는 사람만 살아 남습니다. 아주 살벌해요.


드디어 잘 치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도 못치는 사람이랑 절대 안 쳐줍니다. 그러니까 공평, 상식, 교양은 언제 쓰느냐 하면 자기가 피해자일 때만 씁니다. 그 말은 내가 피해자일 때는 공평해라. 교양 있어라.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라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자기가 베풀어야 되는 것일 때 사람들은 그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때는 무어라 그러냐 하면 자기보다 더 악랄한 사람을 예로 듭니다. 누구는 더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나는 덜하다. 그래서 나중에 새로 배우는 사람들이 잘 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럴 수가 있는냐 저럴 수가 있느냐 그러면 무슨 핑계를 대느냐 하면 내가 배울 때는 그것보다 더했다. 나는 그나마 비웃지 않고 몰아 내지는 않는다. 너희들이 연습하다 지쳐서 나온 다음에 치지만 내가 배울 때는 치고 있는데도 와서 몰아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의 죄된 죄의 대표적인 것이 무어냐 하면 바로 이것입니다. 진리를 진리로서 소유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의 욕심을 위하여 진리는 시녀노릇을 할 뿐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사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죄성의 문제로서 하나님과의 문제라는데 그 특성이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봅시다. 로마서 1장으로 돌아 가시면 우리는 이 일을 여러 군데에서 봅니다. 1:18 다시 봅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1:18)

‘진리를 막는 사람들’ 할 때 막는다는 것은 의지적으로 반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고’일부러 진리를 거스리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합니다. 본능적으로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종교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본능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인간을 높이는 것으로 갑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잘되면 자기 탓, 못되면 조상 탓.’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것 중에 하나가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잘 됐을 때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드뭅니다. 그러나 안 됐을 때 하나님께 화낸 적은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 마음 속에 ‘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는 분노는 여러분들 다 해 보았을걸요. 왜요? 그거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25절에 보시면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다고 그럽니다. 일부러 그러는 것입니다. 거짓 것으로 바꿉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로 말하자면 무신론자들과 유신론자들,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냐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면 이런 싸움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있다 없다는 논쟁을 벌이려면 일단 둘 다 편견을 버리고 들어가야 됩니다. 편견을 버리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것이 둘 다 편견을 버리고 양보한 공동의 장입니다. 그러나 세상 불신자들하고 이야기하면 언제나 무엇을 발견하느냐 하면 ‘없다’가 공평하고 정상적인 무에서의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없다는 데서부터 출발해서 신이 있다로 올려면 신이 있는 분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신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의 종교,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의 종교는 결국 무엇이 되는냐 하면 신을 자기들이 만들지 있는 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주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신은 종종 로보트가 되는 수밖에 없느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8절에는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싫어한다는 말을 꼭 기억하십시오. 감정적이고 편파적입니다. 사람들은 냉정하거나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싸움은 이리로 갑니다.


신앙이란 무어냐 그럴 때는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대상과 내용을 전제합니다. 믿음은 믿는 자의 열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 누구를 믿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결국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의 싸움인 것입니다. 신앙은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느냐의 싸움이기 때문에 누구와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진리이어야 하고 절대이어야 합니다. 그 대신 절대라는 것이 확인된 이상 거기에 대한 순종밖에는 신앙을 점검할 아무런 다른 기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인 경우 인류 전반에 걸친 보편적인 죄성은 무엇이냐 하면 진리라는 것 자체를 절대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순종을 안 합니다. 어디에 순종을 하느냐 하면 자기의 욕심에 순종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진리를 언제나 바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욕심이 절대입니다. 사실이 절대가 아니라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이 이즈러진 마음이 절대입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무지와 미련한 악한 생각들입니다.


이것이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이 불신자들과 기독교의 신앙에 관하여 논할 때 옳고 그른 싸움을 하려고 하는 것은 벌써 실패입니다. 상대방은 자기 욕심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고 우리는 사실을 알면 해결을 하리라고 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저들은 사실을 알기를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성경의 복된 구절들 중 하나인 요한복음 3:16을 봅시다. 이 말씀이 얼마나 이 인간의 죄성을 잘 설명하는가를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것이니라.”(요 3:16-19).


세상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빛이 왔으되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을 사랑하더랍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빛을 비추면 아, 하고 놀라서 깨닫고 돌아올 것이라고 자꾸 생각합니다. 아니요. 빛을 비추면 전등을 깨고 빛을 가리고 어두운 데로 더 숨고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누구를 사랑합니까? 자기를 사랑합니다. 신앙을 이렇게 점검해야 하며 불신앙을 바로 이 시점에서 점검해야 합니다.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순종합니까?


구약성경 사무엘상 15장에 가 봅시다. 이런 부분들을 여러분의 신앙에 중요한 근거로 놓치지 않고 있어야 됩니다. 22절입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서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께 꾸중 받는 장면인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십시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무엇이 가장 첫번째로 요구되는 것입니까? 순종입니다. 하나님께 순종입니다. 여러분의 욕심에 순종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우리가 로마서를 배우는 과정에서 무어라 그랬습니까? 자기의 더러운 욕심에 버려두었다는 것입니다. 벌입니다. 이미 그 자체로 벌을 받는 것이요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자기 욕심에 쫓겨 가지 마시고 거기에 잡혀 가지 마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십시오. 이것이 복이요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것이 무엇보다 낫다구요. 번제와 제사보다 낫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오해가 있느냐 하면 내가 교회를 나간다, 기도를 한다, 헌금을 한다, 이러저러한 좋은 일을 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예. 그것은 분명히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하는 보조 수단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입니다.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밑지고 세상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것을 감수하느냐, 즉 세상 사람을 기쁘게 하고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더 먼저라는, 여러분의 이해 관계를 거기에다 일치시키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아는 모든 것은 남을 꾸중하지만 자기 문제 있을 때는 모든 것을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씁니다.


종종 교인들이 이런 상담을 많이 해옵니다. 세상살이를 하다가 분명히 성경적으로 옳지 않은데 그 일을 안 할 수 없는, 하고 싶은데 해서는 안 되는 그런,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일 때 상담을 해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사셔야 됩니다. 그러면 무어라고 토를 다는지 아십니까? 장로님들도 뭐 이렇게 저렇게 살던데요. 미국에 가면 라스베가스에 관광 온 한국 관광객 중에 절반은 목사님이래요. 하기는 뭐 저도 갔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이야기가 뭡니까? 너희들도 떳떳치 않은 주제에 왜 나보고 말씀대로 살라고 그러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왜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나는 왜 말씀대로 살라고 그러느냐, 난 내 욕심대로 살고  싶은데 말씀이 와서 자꾸 긁으니 난 어떡하면 좋아, 그러니 목사가 어떻게 해 달라는 거예요. 상담한 이유가 뭐예요. 본심이 ‘아니 그냥 사세요.’ 이것을 요구하고 온 겁니다. 그럼 서로 다 망하는 겁니다. 그럴거면 왜 물어보러 옵니까? 그냥 그렇게 살다 죽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물어오는 것은 상당히 괜찮은 신앙의 증거입니다.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늘 기준이 무어냐 하면 나보다 더 나쁜 놈이거든요. 저놈도 잘 사는데 왜 나보고 무어라 그러느냐, 이겁니다. 이만하면 양심가다, 나는 왜 마음이 다부지지 못할까 이 생각을 하는 것이 불신자라면 신자는 남보다 덜한 죄를 지어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영 이것이 지워지지 않아서 어떤 생각을 하냐면 더 악해지려고 애를 쓰고 애를 쓰다가 결국 나중에 어떻게 결론을 내느냐 하면 ‘아이 관둬라 하나님하고 편한 것이 낫다. 내가 덜먹고 살지.’ 이것이 복된 것입니다. 이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아 그렇다 참 감사할 일이다. 내가 더러운 데로 더 이상 못가겠다. 내가 아는데 어떻게 죄를 지으랴.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어떻게 나를 기쁘게 하랴.’ 그렇게 잘 돌아오신 겁니다. 잘한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어떻게 가르칩니까? 야무지게 키우고 지지 않게 키웁니다. “넌 왜 병신같이 맞고 들어와.” 아니요. 맞고 들어오시는 게 낫습니다. 때리고 들어오면 “넌 왜 그러니” 이렇게 꾸중을 하십시오. 맞고 들어오게 하십시오. 지고 들어오게 하십시오. 그리고 정당하게 살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살게 하십시오. 여러분도 여러분을 그렇게 채찍질하시고 야무지지 마시고 악랄해지지 마시고 죄를 짓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 마십시오.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을 다행으로 아시고 복으로 여기시고 감사하시고 그것이 잊혀지지 말도록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것을 기쁨으로 삼기 위하여 더 많이 하나님을 배우려 하고 더 많은 하나님의 간섭을 요구하십시오. 버려두지 마시라고 기도하십시오. 내 욕심대로 놔두지 마시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결국 존귀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일에 아무도 낙오자가 되지 않기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