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로마서 9강(롬 1:18-23), 불의와 진노 /박영선목사

새벽지기1 2016. 2. 9. 06:5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에 들어와서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될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복음의 내이 관념이나 사상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제사장 직분을 계속하고 계시는 예수님,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의 관념론으로 흐르는 것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불신자들과 기독교를 논할 때 착하게 사는 일, 선하게 살면 되었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가? 옛날 우리 하는 식으로 예수 믿으려고 예배당에 갔더니 눈감으라고 하고서 신발 훔쳐 가더라는 시비를 당했던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이것이 다 기독교가 무엇이냐는 핵심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부정적인 차원에서 훨씬 더 두렵게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성경을 따라 해보자면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우리 앞에 커다란 재난이 가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하고 그리고 무슨 다른 일로 그 일을 회피할 수 없는 영원한 불 못이 있다고 성격이 이야기합니다. 거기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가는 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히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그러니까 모든 자연인이 예수를 믿지 않고 이 복음을 모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예외 없이 이 영원한 형벌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자랑한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진노라는 것은 성경에서 생각보다 훨씬 혹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냥 보통 “벌을 받는다. 넌 틀렸다” 이런 식이 아닙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주를 믿어 하나님의 자년가 되지 않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매우 혹독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 마지막 심판을 묘사하는데 “극렬한 풀무불 같다”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시리라”와 같이 대단히 잔혹한 표현을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아무리 자기를 믿지 않고 반대했다고 해서, 좀 나쁜 짓을 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잔혹하게 보복하실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실 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 하나님의 진노가 그렇게 참혹하게 표현된 이면에는 인간이 짓고 있는 죄라는 것이 그만한 대가를 받을 만한 죄라는 데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죄에 대해서 너무 무감각하고 그 실상을 잘못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저지르는 죄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좀 깊이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18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이제 임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치 않고 불의한 이 일들이 앞에 보시면 하나님의 진노가 진리를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묘사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죄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거스르는 것입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고 할 때 이 ‘막는다’는 말은 ‘의도적으로 거스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죄란 나쁜 짓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반대하는데 반항적이고 의도적이고 고집스럽게 거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말 속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는가에 대하여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거스른다는 내용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뒤에 이렇게 나타납니다.“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19)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아는지를 일부러 거스르고 있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을 알게 하셨는가의 설명이 잠깐 나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 : 20-23)


하나님이 인간에게 최소한의 신 지식을 준 것이 있습니다. 내면적으로 주신 것과 외면적으로 주신 증거가 있는데 인간 내면에 주신 신 지식은 일조의 초월자에 대한 어떤 감각을 주신 것입니다. 이 감각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과 같이 성격이 이야기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절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인류학자들이 증언하는 것인데 어느 시대 어느 부족, 어느 사회, 어느 집단에 가도 종교가 없는 집단은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없다고 그렇지만 현대인들이 갖는 신앙은 과학입니다. 현대인들이 갖는 복음은 돈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원시적이고 아무리 단절되어 있는 문명과 단절되어 있는 곳을 갈지라도 종교는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으로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허락하신 참으로 은혜로우신 일반 은총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할게 하고 인간이 모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일을 허락하셨습니다.


게다가 하나 더 양심을 주셨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양심적으로 압니다. 물론 우리가 상황 윤리라든가 또 그 시대하다 사회적으로 다른 윤리관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만 근본적인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공통적인 양심이 있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죄라든가 그리고 남을 죽이는 것이 죄라는 것쯤은 양심적으로 모두가 압니다. 게다가 이런 내면적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초월자에 대한 인식말고도 외부적으로도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주신 또 다른 계시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자연계시라고 하여 자연현상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경치를 본다든가 무슨 좋은 일을 만난다든가 하면 다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발설하게 됩니다. 처음으로 유인 우주선을 타고 대기권을 벗어났던 미국의 첫 우주 비행사가 대기권을 벗어나서 지구를 보고, 온 우주를 보고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과연 하나님은 계시더라.” 물론 소련에서 처음 우주선 타고 올라간 사람은 그랬답니다. “암만 둘러보아도 없더라.” 이것은 시력의 차이가 아니라 신앙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중요한 외적 증거가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십시오. 인류 역사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과 하나님이 역사를 주장하신다는 것이 많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칼로 흥한 자로 영원히 그 권세를 유지한 자가 없습니다. 칼로 흥한 자는 꼭 칼로 망하는 것을 우리가 역사에서 봅니다. 그렇게 힘을 썼던 바벨론, 앗시리아, 페르시아, 이집트, 로마, 그리스, 나치독일 모두 그것으로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이 영원한 것이 아니며 이 세상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군데 계시하셨고 우리가 역사를 보면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었던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하려고 할 때 일기가 나쁜 것입니다. 그 당시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 장군을 위시해서 참모부에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나머지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밖에 없다.” 인류역사상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대하고 가장 어려웠던 일은 언제나 인간이 속수무책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그때 만일 “이렇치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의 그때 “만일 그렇치 않았더라면”은 인간의 생각과 계획과 동떨어진 것임을 우리가 경험합니다.


6.25전쟁 때 우리가 다 말려나고 유엔군이 참여하게 되었을 때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리고 거부권을 가졌던 나라 중에 틀림없이 거부를 해야 되었던 소련이 이상하게 참석을 안했습니다. 그 ‘이상하게’가 그냥 ‘이상하게’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워터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패해서 구라파 역사는 그나마 민주화를 시작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워터루 전쟁을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무어냐 그럴 때 나폴레옹이 배가 불러졌다는 것입니다. 원래 언제나 선두에서 말을 타고 앞장을 서곤 했었는데 그때는 너무 비대해져서 의자에 앉아 망원경으로만 표정을 살피고 저 언덕 위의 능선 모양이 이상한테 저기에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냐 하고 그 동네 농부를 불러다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거시 상당히 깊은 골짜기가 있었는데 그 농부가 어떻게 된 셈인지 나폴레옹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했는데 전쟁이 터지자 나폴레옹의 기병대가 그 선을 돌파하는데 그 깊고 긴 골짜기를 자신들보다 앞서 달렸던 전우들이 빠져서 메꾸어진 구덩이 위를 달려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워터루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래서 사람은 분명히 다 압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이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그 뜻을 거스립니다. 그러니까 신의 뜻을 요구할 때는 언제냐 하면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될 때에만 신을 찾고 자기 욕심이 있고 그 욕심에 혹 하나님이 개입해서 반대할 것 같으며 하나님을 절대 찾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갖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서 마땅한 핑계할 수 없는 인간의 악질적인 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이런 격렬한 풀무불의 심판으로 인간에게 형벌을 가하시겠다고 해도 인간이 핑계할 수 없다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를 지금 우리가 본 본문 내용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 (롬 1: 1-22).사람들은 고집스러워졌고 죄를 내서 하나님을 반대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과학 문명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법칙을 밝혀낸 학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법칙, 말하자면 ???????????????????????부?:?: 바람에 밑의 물고기가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이지 인간이나 과학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과학이 무슨 짓을 했느냐 하면 일차적인 하나님의 방법으로 자연을 두려워했던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벼락이란 신의 심판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의 자연현상이다. 가장 높은데 떨어진다. 그래서 교회당도 십자가 위에 피뢰침이 있다. 피뢰침만 달고 있으면 벼락이 제 아무리 높은데 떨어져도 괜찮다. 벼락을 무서워하지 말고 폭풍을 무서워하지 말고 큰 나무나 호랑이나 곰이나 이런 것 앞에 가서 절하지 말라.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그런 것들보다 더 고급한 피조물로 만들었다. 그래서 미신을 몰아내는데 큰 몫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미신 속에 하나님까지 넣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과학을 동원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 믿는 일을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는데 대하여 가장 먼저 신경 쓰고 연구를 한 곳은 유물사관이 판을 치고 있던 소련이었습니다. 소련은 자체 내에서 심령과학 연구가 가장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인정을 합니다. 과학으로 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과학 이상이 있다. 초월이 있다. 초월적 존재가 있고 초월적 현상이 있고 초월적 힘이 있다는 것을 합니다. 그러나 우린 과학으로 무엇을 하느냐 하면 아닐꺼야, 아닐꺼야라고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일과 하나님을 믿는 일을 핑계 대려고 합니다. 그래서 믿는 문제에 대하여 대부분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무엇을 동원해서 그 거부하는 것을 변명하느냐 하면 배웠다는 것으로 변명합니다.


제가 다녔던 중학교 때 생물 선생님이 그때는 실력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진화론의 추종자였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과목을 가르칠 때는 꼭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여기 예수 믿는 놈들 있으면 손 들어봐” 손들면 “야 예수를 믿냐. 차라리 내 주먹을 믿어나, 임마” 그러곤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진화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점투성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미 서구에서는 진화론이 하나의 가설이요 하나의 학설이지 진리가 아니라는 것으로 오래 전에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죽어라고 아직도 진화론을 추종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문명이 낙후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진화론을 믿는 자는 창조론을 믿는 사람보다 더 깬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아주 몰상식한 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사회에서도 진화론이 진리가 아니며 너무 과학적인 논리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교과서에 진화론은 넣어도 창조론을 넣는 것은 거부합니다. 그래서 신앙인 학자들이 교과서 내에 창조론을 진화론과 동등하게, 학설이 아닌 가설로라도 넣어달라고 요구를 하는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진화론이 허점투성이이고 틀릴 가능성이 많다고 인정해도 창조론은 가설로도 보아주지를 않습니다. 왜 그런다구요? 인간의 죄의 본성은 하나님을 일부러 거스르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린 어떤 오해가 있느냐 하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확실히 알 수만 있으면 내가 옳은 것을 택한다고 생각하는데 인간의 죄의 본성은 옳고 그른 것 이전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감정적이고 고집스러운 존재란 것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4장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의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 5:17-19)


이것이 바로 죄인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원칙의 아주 집약적인 설명이 나오는 곳입니다. 허망합니다. 허망하다는 것은 무어냐 하면 일정한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목표가 없다는 것은 진리와 절대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허망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허망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합니다. 발길 닿는 데로 갑니다. 인생의 모습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느냐. 총명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총명이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굴복해야 된다는 것이 어두워졌는데 그것이 굳어졌다고 합니다. 이것을 조심하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틀린 주제에, 틀린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틀린 데다 고집까지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무지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무식한 사람 치고 고집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식한 사람이 고집을 버리면 꼭 자기가 무식하다는 것을 알고 그 무식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공부를 하는데 무식한 사람은 예외없이 고집과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식하다는 것을 변명하고 어쩌고 하다가 끝에 가서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을 때 무어라고 그러냐 하면 “그래 나 무식하다 어쩔래” 그럽니다. 그러면 할 수 없죠.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신자와  논쟁을 벌이다가 혹시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꼭 끝에 그럽니다. “그래 나 지옥 갈래” 그 다음에 할 말이 없습니다. 지옥 가겠다는 데야. 이것이 바로 굳어진 마음입니다. 이것이 참 무섭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는냐 하면 구약성경에 이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을 무어라고 묘사하느냐 하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그럽니다. 왜 그런 꾸중을 듣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특별한 간섭을 받은 백성입니다. 홍해를 건녔죠. 만나를 먹었죠. 반석에서 나오는 샘물을 먹죠.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았죠. 남다른 기적을 체험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편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면 그것은 이상합니다. 홍해 말고라도 이 양재천이라도 갈라지고 내가 걸어가면 나는 이스라엘보다 신앙이 좋을 것 같죠?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죄란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하지 않습니다. 죄란 훨씬 악질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목이 곧다는 것이 무어냐 하면 의사들의 이야기인데, 인간이 증오심과 분노를 일으키면 제일 먼저 긴장하는 장소가 목이랍니다. 그러니까 고혈압 환자는 성질 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목이 굳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생물 중에서 성질 나면 목이 제일 굳어지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독사죠. 성질 나면 대가리 쳐드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목에 얼마나 힘을 주느냐 하면 코브라를 보세요. 완전히 목이 부풉니다. 사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늘 꾸짖는 것이 무어냐 하면 “야, 내가 너희에게 해 준 것에 비해 너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입 닦고 모른다 해도 할 말이 없는데 왜 늘 독이 올라 있냐?” 그겁니다. 그러니까 죄의 본성이 그렇고 이스라엘 인류가 그렇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 백성과 뱀이니까 여러분과 상관없어 보이죠? 여러분은 아닌 줄 아세요? 여러분이 걸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신앙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경우가 있습니다. 주일날 땡땡이 치고 어딜 가실 일이 있다던가 또 어디 가서 심심해서 고스톱을 친다든가, 물론 죄는 아닙니다. 조금은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안 되면 등산 갔다가 돌이 굴러서 머리가 깨졌단 말이에요. “그럼 아이고 내가 이거 교회 가는데 안 가서 이렇게 되었구나”라고 하고 돌아오면 괜찮은 수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무어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 그래 치사하게 땡땡이 한번 쳤다고 돌로 치고 그러기예요.” 우린 꼭 그렇게 반발부터 합니다. 금방 뭐하고 하느냐 하면 감정적인 반발을 합니다. 다분히 독사가 됩니다.


우리는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지독한 감정적인 원한을 가지고 덤비는 나쁜 종자들입니다 아까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짓이겨져 마땅합니다. 우리를 유황불에 던져서 우리의 죄값을 받는 것이 싼 것이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쪽에서 보면 밑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짓은 그렇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악당인지를, 지금 에베소서 4:19말씀을 다시 봅시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4:19)


감각이 없어져요. 죄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죄는 지으면 지을수록 점점 더 담대해지고 거기에 드디어 자신이 사로잡힙니다. 대표적인 예로 이것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죄인 된 본성과 그 행위들을 신자가 된 이후에도 얼마나 많이 갖고 있고 더 많이 행하는가를 보십시오.

이 세상을 살다보면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언제나 손해입니다. 그렇죠? 악하게 살로 꾀를 부려야 됩니다. 친구들끼리 모여서 생활을 하다 보면 묘하게 꼭 돈 안 내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식사하고는 나갈 때 꼭 화장실을 가요. 아니 들어올 때 화장실에 갔다 와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나마 속비우고 들어와야 많이 먹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도 조금 먹는 한이 있어도 돈 안 내려고 돈을 내고 나갈 때 화장실을 갑니다. 그리고느 “아휴, 벌써 냈어”그럽니다. 한두 번 속지 몇백 번을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밤낮 욕합니다. “저 웬수는 치사하게, 비겁하게” 그래놓고는 나중에 무어라고 이야기하는냐 하면 “그렇게 사람은 살아야돼”라고 두둔하게 됩니다. 안 그랬어요? 체면은 잠깐이고 돈을 영원한 것이라구 마누라들이 그러드라구요. “당신 누구 아빠 보세요. 뭐 당신은 치사하게 남자가 돈내기 싫어서 화장실 간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래서 밤낮 요모양, 요꼴 아니에요. 그래서 전세 살잖아요. 그렇게 다부져야 된다구. 얼굴을 철판 깔고 돈 안 내야 돼, 낼 돈 없으면 밥 안 먹으로 가야지 돈 안 내고 자기 집 살로 돈 내고 전세 살잖아.” 누가 그래요? 집사님들이 그러는 것 아니에요?우린 모두 그렇게 갑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하나님을 반대하고 자기 손으로 사는 것을 자랑삼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다?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저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합니다. 거기서 우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달라지셔야 됩니다. 정직하게 사시고 사람에게 놀림당하는 것을 감수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만족하셔야 됩니다. 누가 뭐해도 좋다, 하나님만 좋아하신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아무래도 좋고 난 사람한테 괄세받는 것은 못 참아!” 이것이 무슨 신자입니까? 오늘날 이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목에 힘주고 뻔뻔스럽게 사신다면 그 진노의 대상인 줄 아셔야 됩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그 죄로부터 구출 받은 자들입니다. 달라지셔야 됩니다. 달라지시라는 것은 윤리와 도덕적인 요구가 아닙니다. 우리의 복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행복입니까? 남의 것을 뺏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어렵게 살아도 하나님이 내 편이요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그것이 복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자랑입니다. 남이 “아이구 그렇게 살아서 어떻해” 그러면 웃으세요. 싸우지 말로 “어휴, 어쩜 그렇게 똑똑하세요. 저는 어쩌면 이렇게 바보 같죠.” 그리고 잊으세요. 그렇게 하는 겁니다. 고치세요. 신자답게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난 자, 의와 거룩으로 부름을 받은 자, 빛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자들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세상에 지지 말고 살기로 다짐하고 약속하고 결심하고 그리고 시작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