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로마서 10강(롬 1:18-19), 불경건과 불의/박영선목사

새벽지기1 2016. 2. 11. 08:42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 안에서 해결하사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제 따져 보아야 되는 것은 그 구원을 얻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고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성경의 주장에 대한 어떤 확실한 증거들을 납득해야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를 믿지 않으면 왜 안 되는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서지 않으면 왜 안 되는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서지 않으면 왜 안 되는가 하는 것들을 성경이 주장하는 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씻음 받은 것을 다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설명하는 가장 깊은 내용들은 신자들에게도 잘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을 압니다. 


18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데 쉽게 이야기해서 죄인들에게 임합니다. 저들의 죄목이 무어냐 하면 뒤에 있는 바와 같이 경건치 않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은 죄 이상으로 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의 조건을 죄목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경건치 않은 문제보다 불의에 대하여 훨씬 민감하고 신앙생활도 이 불의에 대한 상황이 어떠한가로 기준을 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이 주장하는 것은 불의해진 것, 죄를 짓게 된 것, 죄를 지어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 것을 먼저 심판의 조건으로 더 크게 부각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불의한 것은 성경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경건치 않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이야기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본질이 무어냐? 죄의 죄된 내용의 진수가 무어냐 그럴 때 불경건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자가 되어서 분명히 해야 되는 것은 죄인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지 여러분이 무엇을 했느냐의 문제는 이차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불경건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 인간의 전체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그래서 불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소원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들을 질문 형태와 답으로 모아서 요약하여 가르치는 책으로 소요리 문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세례를 받기 위하여 최소한의 믿는 바 교리들을 요약한 것을 공부할 때 이 소요리 문답을 가지고 공부를 하시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질문이 이것입니다.


그 제일 첫 번째 질문이 무어냐 하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하는 것입니다. 그 답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그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문구가 여러분에게 낯선 표현이라는 것을 아시겠죠? 하나님이 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내용과 목표와 대상으로 삼아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여러분이 결혼할 때가 되고 연애를 하게 되면 연애를 할 때는 뭐가 씌우는 것 아닙니까? 씌우지 않고서야 어떻게 같이 살겠습니까? 그 씌웠을 때는 상대방이 코를 풀면 그래도 좋고 감기가 걸려 기침을 하면 유명한 성악가가 소리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같았던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물론 저도 그 병에 걸려서 제 아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그 사람이 돈을 얼마나 가진 집안의 사람인가? 그 사람과 결혼하면 음식을 잘할 것인가? 애를 잘 키울 것인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면 무조건 좋았던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감아서 이쁘고 뜨면 떠서 이쁘고 덧니가 나 있으면 덧니가 이쁘고 그렇습니다.  쪘으면 쪄서 좋고 마르면 말라서 좋고 키가 작으면 작아서 좋고 크면 커서 좋았던 기억이 나십니까? 성경은 바로 이것을 경건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사랑이라는 말 외에 표현할 수 없는 관계로 묶여진 것, 이것을 성경은 경건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끊어진 다음에는 불의한 짓을 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만 생명이 오고 진리가 오고 지혜가 오며 의가 오고 선이 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은 혼자서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란 무어냐고 할 때 열심으로 목숨을 걸고 갈급하게 하나님을 소원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욕심에 대한 자족이 아니라 스스로 혼자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말로는 보통 인본주의라고 부릅니다. 이 죄의 본질을 창세기 3장에 인류가 최초로 범죄하는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1-4). 이것이 인류 최초의 범죄 현장입니다. 죄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무어냐 하면 사탄이 와서 인류를 꼬일 때 "저것을 먹어라.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것을 먹어라" 할 때 그것을 먹도록 마음에 충동을 일으키는 동기를 부여하는 내용이 무어냐 하면 "저것을 하나님이 못 먹게 한 것은 그것을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과 똑같이 되기 때문에 못 먹게 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한 분이 아니며 너희 편을 드는 분이 아니라고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저것을 금지시킨 것은 너희가 그것을 했을 때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꼴을 보기 싫어서 그것을 못 먹게 하고 그것 외에 나머지는 다 양보한 것이다. 여기에 덜컥 걸린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본성으로서 여러분이 다같이 갖고 계시는 공통적인 내용이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믿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줄 때, 어떤 좋은 말을 할 때 상대방들이 우리가 전하는 기독교 내용에 대해서 혹은 우리의 태도에 대하여 무어라고 그럽니까? "저 사람들이 다 무슨 속셈이 있어서 저러지 왜 맨 정신으로 저렇게 하겠는가?" "저렇게 처음에는 좋은 말로 해놓고 죽을 때까지 헌금 뜯어먹으려고 그러지." 이것 아니면 그 다음에 무어라고 그럽니까? 공짜로 주는 것이 다 비지떡이지 좋은 것이 어디 있냐고 합니다. 이 마음이 우리에겐 본성적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무어라고 비난을 합니까? "무슨 약점이 잡혀서 안 나가면 안 되느냐. 아니, 그렇게 무서워, 소심해, 꼭 무슨 종교 같은 데 의지해야 돼!"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담력이 있는 것이요, 떳떳한 것이요, 독립심이 있는 것이요, 무슨 종교를 가지는 것은 사람이 비굴한 것이요, 의타심이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어떤 신을 믿는 것이든 신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공연히 연약하니까 심리적인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지 그것을 그렇게 부추켜서 종교인들이 자기 먹고 살려는 것이지?” 이것 아닐까요. 우리가 지금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의 본질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에게마저도 복종하기 싫은 마음입니다. 자기 문제는 자기 혼자서 해결하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헬레니즘으로부터 출발된 그것이 좋게는 과학문명을 낳았습니다만 인본주의를 만들어낸 사상이 다름 아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내가 책임을 지겠다. 그 결과가 재난이라 할지라도 내가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이것이 인본주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진 교만입니다,


불난 집에 불이 붙어 들어오는데 “치사하게 불 무서워서 내가 뛰어 나가란 말이냐. 양반은 죽어도 개헤엄은 안 치는 법이다. 치사하게 불 같은 것 피해서 나가는 것이 자랑이냐, 나는 그냥 타 죽겠다." 그것을 가지고 용기라고 안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문제에만 오면 그리고 이 기독교의 문제에만 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을 죽어라고 싫어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신앙도 잘 보시면 이런 식으로 삐쳐 나가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할 때 아주 다급한 문제가 있어 구하러 올 때 "하나님 이 아이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 혹은 “이 아이를 학교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무엇을 제시합니까? “그래도 공짜로 해달라는 것은 아니에요. 이것만 들어주시면 저도 이런저런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이거야말로 가장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애걸하지 마시고 떳떳이 그러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제 부탁을 들어주며 제 편이 되어 주겠습니까?” 그렇게 오시는 것이 신앙의 참된 자세입니다. ‘해주신다면 저도 이것으로 갚겠습니다'이것은 나쁜 것입니다. 신앙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쪽이 훨씬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죄의 본성이 있고 그 죄의 본성과 본질은 하나님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하나님과 동등하려는 못된 독립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만 의와 생명과 진리와 영원한 것과 복된 것과 참된 것이 옵니다. 그를 떠나서 사람은 의도 선도 아닌 어떤 유익한 짓도 하지 못합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자기 치장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 전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 신자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압축시켜 보면 그 모든 율법은 결국 이 내용을 가집니다. 구약성경을 하나로 줄여서 이야기할 때 율법과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더 한마디로 할 때는 선지자를 빼고 율법서라고 합니다. 이 율법의 내용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제사법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실천법입니다. 사회법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법에 앞서서 언제나 제사법이 우선됩니다. 그리고 장황하고 깁니다. 여러분 성경을 한번 읽기로 마음을 먹고 창세기, 출애굽기 순으로 읽을 때 어디 오면 늘 그만 둡니까? 레위기에서 그만두죠. 책을 넘길 때마다 무슨 제사를 드리고 그 제사를 드릴 때는 어떻게 해야 되고 어떻게 몸을 씻고 어떻게 피를 흘리고, 어떻게가 짧지도 않습니다. 한없이 길도록 밤낮 그 이야기만 하다가 민수기에 오면 밤낮 사람 숫자 세다가 날샙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척 중요한 책이기 때문에 그렇게 앞서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출애굽기라는 것은 종 되었던 애굽에서 탈출한 것입니다. 탈출해서 어디로 가야 되는 싸움이냐 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가는 기록입니다. 그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면 꼭 지켜야 되는 것이 무어냐 하면 율법의 첫 요구, 하나님과 어떻게 정상적인 관계를 맺느냐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 땅에 들어가서 살지 못합니다. 우리 의를 행할 수 없고 선을 행할 수 없으며 하나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명령을 받아야 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려면 제사법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죄 지은 것을 씻으며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하는가? 속죄제, 화목제 이런 것들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어야 비로소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1-6). 이번엔 저주의 약속을 봅시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 28:15-19).


똑같은 내용인데 완전히 뒤집어져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복받고 저주받는 것의 단 하나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의 순종 여부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그의 편이 되고 그와의 관계가 정상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과 저주는 내가 착한 일을 했느냐, 악한 일을 했느냐의 결과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했느냐, 안했느냐의 싸움입니다. 이것을 경건이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경의 서신서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오늘  보고 있는 로마서 1장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6-7).

성도에게 편지를 하는 것입니다. 이 성도는 의롭기 때문에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해서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의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1-3).


‘고린도 교회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고린도전후서를 읽어 보시면 고린도교회에는 무척 심각한 잘못이 있었습니다. 음행을 범하는 자들이 있었고 분쟁이 있었고 말도 안 되는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신자들의 특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즉 의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성도라 부르고 거룩하여진 자라고 그럽니다.


‘성도’에게서 경건하다든가, 거룩하다든가 성도라는 것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했느냐,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느냐보다 인간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과 화목했느냐?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냐 되지 못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신자가 불신자보다 삶의 모습이 더 잘못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데 손가락질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치사한 성도고, 예수를 안 믿었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데 거룩하게 사는 참 위대한,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만났을 때 그들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오해하고 있느냐 하면 “예수 믿는 것들이 왜 그래?” 그러면서 의롭다 안 의롭다는 따집니다. 성경이 따지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아느냐, 그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느냐 안하느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만 빼놓고 하나도 쓸모 없는 신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 하나, 그것도 잘 믿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 모든 데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순악질적으로 하고 무엇이든지 밉게 굽니다. 그러나 그는 성도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천국 갑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표현대로 하면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어도 천국 갈 사람이야 하는 그런 사람들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이것을 구별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의라는 것은 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의란 하나님을 알아야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보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기 위하여 내가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의라고 하지, 그가 얼마나 정직하냐 그가 얼마나 남을 위해서 희생했느냐가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행하는 의, 하나님 없이 행하는 윤리와 도덕은 전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자기 과시입니다.


여러분 옛날 군자라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옛날의 군자상은 남에게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오해받은 것까지도 자기 책임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완전주의입니다. 아무에게도 욕을 먹지 않고 모든 사람을 항복시키는 자기 고양책인 것입니다. 자기 잘난 것을 온 천하만민에게 증명해 내고야 말 싸움입니다. 거기에는 생명도 없으며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도 없습니다. 욕을 먹지 않고 칭찬을 받는 모든 것의 결국, 궁극적인 목표가 자기 자신에게서 끝나는 것입니다.                              


신자의 의라는 것은 나의 존재를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이 의이고 성실이고 사람사는 가치이고 책임이라 그럽니다. 그것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필요하다면 나서기도 해야 되고 잘난 척도 해야 됩니다.


어떤 교인이 저에게 물어왔습니다. "목사님 자꾸 나서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제가 여기서도 입을 다물고 있고 모든 곳에서 입을 다물고 있는데 정말 보다 못해서 이것은 이렇게 좀 하면 좋겠다 싶어 내가 어떤 일을 좀 열심히 했더니 누가 이런 지적을 합니다. ‘당신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교만이야' 어디까지가 교만이고 어디까지가 겸손인 줄을 모르겠습니다. 교만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도무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정말 겸손입니까? 이렇게 전화를 해 왔습니다


제가 이런 답을 드렸습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과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면 교만하십시오. 그리고 교만하다는 욕을 먹으십시오. 여기가 바로 갈림길입니다. 그러니까 왜 교만 안 하려고 그럽니까? 내가 욕을 먹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이미 교만입니다. 교만 안 하려고 겸손떤 것이 교만이란 말입니다 모든 초점은 어디로 가야 되는 겁니까? 내가 이 일을 해서 욕을 먹더라도 하나님께 유익이 되고 신자 모두에게 유익이 나누어지는 것이라면 그 미친 짓을 하십시오. 내가 나를 치장하기 위해서 나를 보호하고 어떻게 욕을 먹지 않느냐를 궁리하는 것이라면 이미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의를 구하는 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 의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모세 시대의 산파들이 거짓말을 하고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왜 칭찬을 받았습니까? 하나님 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기생 라합이 나라를 팔아먹고도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은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 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율법의 핵심은 마태복음 22장에 예수님께서 친히 율법의 대강령을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함을 바래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40)


율법과 선지자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입니까? 구약성경 전체를 율법과 선지자라고 그럽니다. 선지자의 대강령, 가장 중요한 요점이 무어라구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렇게 이야기하지는 마십시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불경건한 자가 되지 말라. 하나님과 남이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속해야 됩니다. 이것이 언제나 시급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무엇이 나오느냐 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나옵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선행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두 번째를 해서 첫 번째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는 무업니까? 첫째되고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 어떻게 사랑하라구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목마른 것이어야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같이 모든 신자들은 그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갈급한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를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경건함입니다. 물론 그것이 하나의 형태로, 실천으로 나와야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원인은 이것밖에 없고 그 근거는 여기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일어나는 모든 도덕과 윤리, 어떤 의와 선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자기 치장이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 가치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의와 선을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은혜와 진리와 모든 선한 것의 유일한 근거자입니다. 그분 없이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이 온 우주 만물 속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문제가 오해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신앙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여러분이 늘 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공격할 것이 없습니다. 경건함을 제껴 놓고서 의로움을 논하는 것은 공부하지 않고서 좋은 성적받겠다고 하는 우리 아들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의로움과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불의함은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이고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진노의 첫 번째 대상이 된다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는 벌 받을 이유가 없다. 나는 정직하게 산다. 나는 거짓말한 적이 없다. 나는 도적질한 적도, 살인한 적도 없다"라는 말만큼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주제에,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생명도 받지 못한 주제에 무엇을 행치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는 '벌 받을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것은 여태껏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시며 생사화복이 그의 손에 있다는 것을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부인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나는 정직하게 행했으니 천국에 들어가야 된다.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으니 복을 받아야 된다"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너희는 내게 돌아오라"입니다 우리가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이사야 1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한탄이 무엇입니까?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그 주인의 구유를 안다. 그런데 이 백성은 어찌하여 나를 모르는가?” 하나님의 한탄입니다. 너희를 지었고 너희에게 모든 복된 것을 유일하게 줄 수 있는 나를 버리고 왜 점점 더 매맞을 짓을 하는가, 왜 저주와 재난의 길로 가고 있는가? 돌아오라!


내 손으로 껌팔이 해서 먹고 살겠다. 치사하게 엄마 아빠가 해주는 옷 안 입겠다는 것이 독립심이십니까? 이 문제에서 인간은 무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심해야 될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과 세상 사람의 공격이 바로 이런 시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없이 되는 일을 도모하지 마십시오.


이 문제는 Y.M.C.A라 Y.W.C.A가 저지른 실수가 많습니다. 물론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Y.M.C.A나 Y.W.C.A가 기독교 단체가 아니라면 전 인정을 하겠습니다. 하는 일에 긍정적인 면은 인정하겠습니다. 건전한 사회생활을, 건강한 소시민을 키워 내는 일에 분명히 사회적인 어떤 유익과 일익을 담당했던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Y.M.C.A나 Y.W.C.A는 누구나 다 알듯이 기독교 단체입니다 그 단체의 가장 큰 약점은 하나님과 화목되는 일을 전제로 하지 않고 불의한 일을 없애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십자가의 필요성을 인정치 않고 자기의 죄인된 것을 인정치 않고서, 회개하지 않고서 의롭게 사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당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상대방이 왜 이렇게 극악무도하게 구는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할 때 언제나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명령 앞에 그 영혼이 깨지기까지는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초등학생을 데려다가 돈을 달라고 해서 주지 않으면 죽일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모든 인간에게 있는 공통된 현실적 위치입니다. 우리는 더 낫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양심을 소생시키시고 영혼을 중생시키셔서 의와 거룩과 선을 감당하게 됐고 그 힘을 공급받기 때문에 그렇지 않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도 저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누구를 칼로, 총으로 쏴 죽인 적은 없지만 우리의 입으로 무수한 사람을 죽였고, 우리의 마음으로 무수한 도적질을 한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정체입니다. 우리는 남보다 낫다고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됩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일로 우리를 몰아가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불의를 행하는 데 대해서 지지 않아야 됩니다. 내가 의롭게 사는 것으로 복을 빌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것으로 내 인생을 뒤집어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바벨론 왕에게 절을 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바벨론 왕은 신이다. 그 신에게 절하라." 다니엘과 세 친구가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어떤 신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 너희를 저 풀무불에 넣겠다." 용광로에 넣겠다는 말입니다. 세 친구가 무어라고 대답했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저 극렬한 풀무불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 하신다할지라도 우리는 왕께 절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닙니까?


우리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모든 삶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해 내려는 것들과 싸워 이 관계성을 더 돈독히 하고 깊이 있고 살찌게 하는 것보다는 이러한 모든 일에서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했습니까? 제가 다른 것을 할테니까 이 일을 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식을 대학에 들어가게 한다든가 세상에서 남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영혼을 팔아 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와 관계 문제가 아니라 이 복권이 당첨되면 절반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불신앙입니까? 욥은 어느 날 갑자기 재난을 당합니다. "하나님 왜 이런 재난을 당합니까? 제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하나 분명히 아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왜 당하는지 모르지만 이 길을 하나님이 정하셨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므로 결국 나를 정금같이 만들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아십니까? 안다면 "하나님 앞에 이것을 내놓을 테니까 이것을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는 싹 없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문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여러분과의 관계를 더 깊이 하고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여러분은 훈련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건한 문제를 놓쳐 버리면 불의한 자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 때문에 우리도 불의한 방법을 써서라도 욕심내는 것을 이루겠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팔아먹습니다 영혼을 팔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 칼을 주십시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을 깊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흔드는 모든 시험은 결국 그것입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를 깨는 유혹입니다.  지지 마십시오. 그리고 모든 저주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묶여 있으셔야 됩니다. 그의 거룩과 자비와 은혜와 긍휼과 오래 참으심에 동참하셔야 됩니다. 악에게 지지 마시며 거룩한 것을 앞세워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것이 되도록 연습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을 외면한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며 목숨을 다해 그를 편들며 그를 뒤좇기 위하여 자기를 채찍질하는 경건의 연습이 있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