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8-19)
지난주에 말씀드리기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라는 말을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불쌍한 인생에 직접적인 은혜와 긍휼로 간섭하셨는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직접적이 간섭이 왜 필요한가라고 할 때 성경이 이야기하는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분명히 우리들이 처한 처지가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곤란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18절, 19절에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우리의 형편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고 이 형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 외에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샘이 됩니다. 복음이 무어냐 그럴 때 처음부터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요, 그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사건이요, 또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사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지속적인 사역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되게 된 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 쪽에서는 아무런 조건이나 협력은 할 수 없었던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 된 일의 결과가 우리에게 베풀어진 것을 복음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문제를 논할 때마다 인간이 그런 도움을 받을 만한 처참한 처지에 있는가 하는 것을 물어 보아야 되고 그런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인식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논리적으로 이 문제들에 대한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1:13로 가 보시면 아직 바울은 로마로 가지 않았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매우 열심히 그들 보기를 소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3-15)
할 수만 있다면, 열심히 너희에게 가기를 원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헬라인이든 로마인이든 야만인이든 어리석은 자든 지혜 있는 자든 누구에게나 이것은 필요한 것이라 그럽니다. 그리고 16절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원문에는 사실 이런 말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앞에 있는 대로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아니 그 이상으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는데 왜냐하면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다는 것은 수사학적인 표현입니다. 제대로 말하자면 “내가 이 복음을 자랑한다”입니다. 이 복음은 어떤 복음이기 때문에 내가 자랑하느냐 할 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도 같은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즉“왜냐하면 내가 복음을 자랑하는데 또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한꺼번에 연결해서 보지 마시고 이렇게 나누어서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왜냐하면 이 복음이 너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또 새롭게 내가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17절에서도 똑같은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그것도 원뜻을 살펴보자면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 복음 속에는 하나님이 누구인가도 나타났고 너희 속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것이고 또 사실상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답이기 때문에 내가 이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18절도 똑같이 ‘왜냐하면’이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희에게 이 복음 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에 하나씩 갖다 붙여야 된다는 겁니다. 왜 내가 너희에게 이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하느냐? 왜냐하면 너희가 처한 입장이 상당히 심각한 입장이고 그것을 해결할 답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왜냐하면의 속에는 너희가 심각한 문제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가 있고 이에 대한 답이 있기 때문이다가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문제에 해당하는 것은 답 될 수 있는 문제, 우리가 심각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이제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어냐 그러면 너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그럽니다. 이것만큼 인간이 직면한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보통 이 문제를 문제성 중에 가장 끝에도 놓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종종 이런 말을 씁니다.“내 아들이, 내 딸이 대학교에 들어가만 준다면 나는 식모살이를 해도 좋다.”이것은 가장 쓸데 없는 곳에다 여러분의 가장 좋고 중요한 것을 갖다가 놓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만 된다면 나는 목숨을 버려도 좋다라고 하는 것들이 지금도 있지 않습니까? “키만 5cm 키워 준다면 억만금이라도 내어 놓겠다, 코만 조금 오똑하게 해 준다면 ...” 정작 우리가 갖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모르면 이렇게 별 볼일 없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어냐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이 진노가 누구에게 임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과 모든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 불의한 자들의 무엇을 벌주시느냐 그러면 불의한 첫 번째 조건과 이유인 ‘경건치 않음’입니다. 경건치 않기 때문에 불의를 행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불의를 행한 것은 불의한 것만의 문제가 아니라 불의를 행할수 밖에 없는 저들의 경건치 않음에 대한 진노입니다. 그래서 경건히 않다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고 거륵하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으로 선하게 사는 것을 거룩하다고 그러지 않고 하나님께 속했느냐, 속하지 않았느냐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성경 속에서 고린도서나 갈라디아서같이 그 시선을 받아야 하는 대상들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심각한 신앙상의 오류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라고 부르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런 식의 편지를 씁니다. 거기서 성도는 물론 거룩할 ‘성(聖)’자의 성도입니다. 거룩한 자들, 경건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잘못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공격하는 내용에 들어가 보면 저들은 불신자라도 별로 행하지 않는 부도덕한 죄들을 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당황하는 대목입니다. 경건하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윤리적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가 경건치 않음에 대하여 임한다 하는 이 경건치 않음에 관한 문제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 됐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인류의 선조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이후로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인류는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진노의 자식입니다. 에베소서 2장으로 가보면 그런 내용이 훨씬 더 정확하게 묘사된 것을 만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1-3)
이것이 인간이 처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성경이 복음을 전할 때, 이것이 왜 복음이냐고 할 때 바울식으로 이야기하면 “이 복음이 너희에게 유일한 처방이기 때문이다”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참으로 무의미한 선언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은 이 부분에 대하여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는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영원한 운명과 관계가 있는가를 놓치는 것보다 손해보는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는 분명히 행복과 기쁨, 무슨 복이니 하는 것들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심각한 문제들을 슬쩍 외면해 버리고 있습니다. 모든 복과 저주, 가장 심각한 운명의 결정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문제고 복음 전체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권위로 설명되어질 수밖에 없듯이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시고 그가 우리를 만드신 이상 눈밖에 나면 이 진노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 문제가 여러분이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복음의 요소인 것입니다.
이사야 1장으로 가 보시죠. 이런 문제들이 성경의 얼마나 보편적이고 일관된 사상인지 만나게 됩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였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 : 2 - 6).
이스라엘의 역사는 매 맞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매 맞은 가장 큰 이유가 무어냐 하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정치 역학적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와 군사, 경제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웃나라 백성에게 압제를 당하고 잡혀가는 가정 큰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이 저들을 팔아 넘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팔아 넘기는 가장 큰 이유는 언제나 저들이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역사는 인간이 얼마나 그 마음에 성실함이 없는가 하는 것이 증거되는 것이며 동시에 모든 복과 벌의 힘이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면서 가나안 땅을 저들에게 줍니다. 지금 그것이 중동전쟁의 가장 큰 이유가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생존과 팔레스타인 난민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중동전쟁의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줄 때 뭐라고 그러면서 줍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는 단 하나의 조건은 너희가 내 말을 들어라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짖지 않은 집에 살고 너희가 심지 않은 열매를 먹을 것이다.그러나 거기 들어가서 잘 살다가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가 지은 집에 남이 와서 살며 너희가 심은 열매를 다른 사람이 먹을 것이다. 너희가 내 눈에 잘 보이면 너희를 치고 올라오는 자가 한길로 올라갔다가 너희가 옆길로 도망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구약성경의 초두부터 등장하는 약속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하여 배반하였다가 그 저주가 그대로 응한 것을 보여 줍니다. 그 뒤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2000년 동안 저들이 이야기한 대로 “그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드리소서”그렇게 돼서 2000년 동안 유리하는 백성이 됐고 우리가 잘 아는대로 2차대전 중에 600백만이라는 유태인이 가스셀에 갔고 지금도 전세계적으로 유태인이라고 그러면 대접을 받지 못하는 민족적 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을 통하여 배우고 신약성경을 통하여 배우고 인생 속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복의 근원이 누구며 온 세상만물의 주권자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분명히 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 하면 기독교 신앙이 뭐냐고 할 때 하나님의 존재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인식되어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한 싸움인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옵니다. 그로부터만 세상과 진리와 복이 있고 그로부터만 진노와 심판도 있습니다.
그의 진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우리에게 당면한 가장 심각한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지금 무엇과 타협을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갖는 자존심과 타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높여 그분께 아첨하듯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해서 기독교를 선한 단체로 만들었습니다. 윤리와 도덕의 단체로 만들었습니다. 무슨 Y.M.C.A 같아져 버렸습니다. 사회봉사를 하고 봉사라는 이름 아래 좀 더 헌신적이고 무슨 선행을 베푸는 구제단체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초대하는 말들도 “괴로움이 있으십니까? 교회로 나오십시오. 외로우십니까? 슬픔을 당하셨습니까? 교회 오십시오. 인생의 보람을 찾고 싶으십니까? 교회 나오십시오”라는 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매우 조심해서 써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그렇게 꼬실 수 있습니다. 전도의 한 전략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신앙의 핵심과 만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유혹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렇게 기독교를 이해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다’라고 보기 이전에 하나님과 여러분이 어떤 상태로 지금 위치에 직면되어 있는가를 지적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훨씬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을 깍는 것으로 도전해오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미운 종교가 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3장으로 가 보십시다. 세례 요한의 등장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3 : 7입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 3 : 7). 아니 회개를 시키실 것이면 좀 잘 구슬리면 안 되나요? “참 잘 살고 있습니다. 공부도 많이 하셨군요. 그런데 꼭 하나 부족한 것이 있네요. 예수를 믿으세요. 우리 삼페인이나 한 잔 하면서 인생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봅시다. ” 이렇게가 아니라 느닷없이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랄 만한 일입니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서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믿었지 않습니까? 결국 여러분이 믿고 들어 왔을 때 누가 어떻게 좋게 이야기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믿고 나서 확인한 것이 무엇입니까? “큰일날 뻔했다.” 이것을 확인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안 믿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나? 큰일날 뻔했다.” 이 마음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복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훨씬 이런 식입니다. 좋게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에 비하면 오늘날 기독교는 훨씬 분위기 좋고 심리적인 위안을 주는,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 좋다좋다 그러는 미련한 사람들의 집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행복을 논하고 기쁨을 논하고, 그래도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는 그나마 있는 돈을 모아서 선행을 베풀고 있는가로 서로서로 위로하는 이상한 단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참 나쁜 것입니다. 보람있는 인생을 살고 있고 내가 그대로 나만을 위하여 살지 않고 남을 위하여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함으로 자신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아니오. 그렇게 여러분을 확인하셔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확인하셔야 되는 것은 분명히 이것입니다. “지옥 가면 어떻게 하나” 이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정말 나를 불러 주실 것인가?” 이 문제를 분명히 해결해 놓고 나머지를 하셔야 합니다. “아이 뭐 치사하게 천당이니 지옥이니 그렇게 해서 사람 겁주지 말고 좀 더 고급스럽게 이야기하자.” 그러나 그것은 고급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슬며시 가장 주요하고 핵심적인 문제를 비켜가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 성경에서 모든 복은 이런 식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 : 1 - 2)
복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그 관계가 깊고 긴밀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복이란 시편 1 : 1에 나오는 것과 같이 악한 것, 세상과 긴밀한 관계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병이 무어냐 하면 바로 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복이 나오며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이 있다는 것을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자녀를 좋은 학교에 붙이는 것, 여러분의 건강을 더 좋게 오래 유지시키는 것 아닙니까? 행복이란 눈 오는 날 따뜻한 벽난로를 피워놓고 둘이 마주 앉아서 커피 마시면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음식을 먹고 가족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싸가지고 저 푸른 초원 위에 파라솔 펴놓고 낄낄거리고 뛰어 다니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정상화되어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찬송가 1장이 무엇입니까? ‘만복의 근원 하나님’, 이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고 모든 구원과 그리고 우리 모든 소망의 근거이고, 원리고, 기둥이고, 목표고 아니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이것이 놓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놓쳐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이라는 것은 참 기묘한 것이라서 하나님의 필요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인간이란 참 우스운 존재라서 이상한 데서 자존심을 세운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꼭 미련을 범합니다. 왜요?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린 영적으로 죄인이고 무지하고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이 문제에 대하여 무척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과의 화목, 이런 것들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냐 하면 우린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존재를 내가 인정하고 그 아래 내가 꿇어 엎드린 존재로서 복을 얻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존재가 정상화되어있다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삶 속에서 사실 이 문제는 너무나 자주 잊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친구들에게, 여러분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한다고 하면 무어라 하겠습니까? 일단 가장 교묘한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우회 전법을 쓰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작전으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느냐 하면 “야 네가 너 언제 죽을지 몰라서 하는 이야기인데 그냥 죽으면 큰일난다. 너 예수 꼭 믿고 죽어라. 너 보험 들었냐?” “응. 나 보험 들었어.” “그러면 그보다 더 심각한 것도 하나 해 놓아라. 예수도 꼭 믿어 놔라.” 그러셔야 됩니다. 꼭 그러셔야 됩니다. 그런데 우린 이 말을 잘 못합니다. “한번 나와봐. 우리 목사님 멋있게 생겼다.” 이것은 물론 작전으로는 좋습니다. 그러나 원래 목표는 여기에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그와 어느날 직면하게 되고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그 앞에 엎드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기 위하여 교묘한 작전을 쓰셨군요”라는 고백을 하게끔 해야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 생애에 나타나야 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 : 1- 5)
바울이 누구에게 가서 전도를 할 때는 그랬습니다. 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해 주기를 바래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안 했습니다.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다, 우리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씻으셨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의 말과 그의 전도에 하나님이 동행하실 것을 믿고 간섭하실 것을 믿으며 다른 방법에 대한 기대가 없다고 합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많은 교묘한 말의 지혜와 작전, 알아들을 만하고 설득력 있을 만한 것들로써 사람들을 초대하니까 우리의 삶에서는 우리의 표면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온 천하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찾아오신 하나님, 그를 믿지 아니하면 결국 마지막 날에 모두가 심판 아래 있을 수밖에 없는 두려우신 하나님이신 그의 존재가 자꾸 약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자체가 여러분의 삶의 표현, 모습, 원리, 남을 대하는 자세,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이 약화되고 있는 것에 주의해 보셔야 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설교는 어느 것에서나 이것으로 그의 힘을 삼고 어떤 형편에서든지 이 말씀을 전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혔든, 어떤 생명의 위협을 받든 이 말을 전하는데 두려움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 모든 인류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결을 요구하지 않고 십자가 안에서 풀으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해결하신 분이고, 이 문제를 여러분을 통하여 여러분과 만나는 또 다른 영혼들에게 알리시기를 하나님은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문제를 떳떳하게 설명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가 우리를 살려내신 그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감사하며 담대하십시오.
'좋은 말씀 > 박영선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10강(롬 1:18-19), 불경건과 불의/박영선목사 (0) | 2016.02.11 |
---|---|
로마서 9강(롬 1:18-23), 불의와 진노 /박영선목사 (0) | 2016.02.09 |
로마서 7강(롬 1:16-17), 하나님의 의(義)/박영선 목사 (0) | 2016.02.07 |
로마서 6강(롬1:16-17), 하나님의 손길로서의 복음/박영선 목사 (0) | 2016.02.05 |
로마서 5강(롬 1:8-12), 성령을 추구하는 복음/박영선 (0) | 2016.02.04 |